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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학과에는 정말 장애인이 없을까?

어린 시절부터 많이 놀림을 받았기 때문에 창피하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특별전형으로 들어왔냐느니, 역차별이라느니,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서워서, 아니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주목 받고 싶지 않아서, 장애가 드러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장애를 감추는 학생이 있지 않을까?

  • 송영균
  • 입력 2017.11.21 05:04
  • 수정 2017.11.21 05:44

2014년에 대학원에 입학하고 두 달만에 암 진단을 받았다.

항문에서 멀지 않은 곳, 직장(直腸)이라는 곳에 암이 생겼다고 했다. 암 투병을 시작하면서 항문을 보존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항암치료가 지난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암은 항문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결국 항문을 잘라냈다. 아랫배에 인공항문을 만들고 그 위에 배변주머니를 붙이고 생활하게 됐다. 나는 장루장애인이 됐다.

2년 동안 투병하고 학교에 돌아왔다. 학교에서 배변할 때마다 힘들었다. 배변을 처리하는 것도 불편했다. 변비나 설사가 생기면 통증이 심해서 누워있어야 했다. 장애인 화장실을 찾았다. 나는 건물 6층에서 생활하는데, 건물 1층에 한 곳이 있었다. 문이 잠겨있었다. 장애인 휴게실은 찾을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장애학생지원센터에 가면 장애인이 쓸 수 있는 간이침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곳에 자주 가서 누워있었다.

장애학생지원센터에 찾아오는 장애인 학생이 없었다. 근로학생에게 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근로학생은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한 해 동안 일을 하면서 나를 제외하고는 장애인 학생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학교를 다니면서 장애인 학생을 본 일이 없었다. 장애인 교수도 본 일이 없었다. 이 학교에는 장애인이 없는 것일까? 등록장애인이 전체 인구의 5% 정도라는데, 이 학교에는 몇 명이나 있는지 궁금했다.

장애학생지원센터에 있던 간이침대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학교 직원들의 책상이 들어왔다. 배가 아플 때에 누울 곳이 없게 됐다. 학교 직원에게 장애인 학생이 이용하는 공간의 용도를 장애인 학생의 의사를 묻지 않고 바꿔도 되는 것이냐고 따졌다. 직원은 미안해하면서, 이용하는 사람이 없고 방치되는 공간이어서 직원들이 자리잡게 됐다고 말했다. 방치되는 것을 보았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장애인이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장애인 휴게실을 만들기 위해 이곳저곳에 메일을 보내고 학교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장애학생지원센터를 비난하는 일이 많았다. 이상하게도, 장애학생지원센터의 직원들은 여전히 내게 자주 연락을 하고 친절했다. 어느 날엔가 총장과 장애인 학생이 대화하는 자리를 만들 것인데 내가 참석할 수 있는 날짜가 언제인지 물었다. 나는 수업이 적어서 다른 장애인 학생들이 편한 날짜에 맞추겠다고 대답했다. 직원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학교에는 30명 정도의 장애인 학생이 있었요. 그런데 대부분은 5, 6급의 경증 장애인이고, 장애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요. 그 학생들은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싶어해요. 저희가 연락을 하면 연락을 하지 말고, 또 자신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해요. 더러는 화를 내기도 해요. 장애가 드러나는 학생은 채 열 명이 되지 않아요, 그 학생들은 학교에서 활동하지 않고 수업만 듣고 집으로 돌아가요.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면 항상 도리어 저희에게 미안해 해요. 이 학교에서 장애를 드러내고 무언가를 요구하는 학생은 송영균 씨가 거의 유일해요."

생각해보면 나도 장애가 드러나지 않는 장애인이다.

장루장애는 옷을 입으면 겉보기에 거의 표가 나지 않는다. 배변을 처리하는 것도 모두가 화장실에서 혼자 하는 일이다. 서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웃지 못할 일이 자주 벌어진다. 비장애인은 방귀를 참을 수 있지만 장루장애인은 그럴 수 없다. 배변을 내 의사대로 조절할 수도 없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방귀가 소리를 내며 나온다. 배변이 시작돼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방귀가 나오거나 배변이 시작되면 내가 장루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내게 민망한 표정을 지어보이거나 눈을 흘긴다. 조금 친하면 웃거나 놀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황스럽다. 설명하기도 곤란하다. 애초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 장애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모든 것은 고역이다.

학기 초에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했을 때 한 친구는 내게 "너 장애인 같아."라고 말했다. 나는 장애인이 맞다고 대답했다. 친구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바로 사과했지만, 그렇다면 무슨 의도였는지는 아직까지 모르겠다. 학교를 다니면서 '병신'이라는 말은 아주 흔하게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지만 그래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철렁거린다.

"저희 과에는 장애인이 없습니다."

어느 대학교 어느 학과의 학생회 선거운동본부가, 장애인을 배려하기 위한 정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단지 이와 같은 문장으로 답변했다고 한다. 지금 그 대학교 그 학과에는 정말 장애인이 없을까? 장애를 감추고 있는 학생이 있지는 않을까? 어린 시절부터 많이 놀림을 받았기 때문에 창피하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특별전형으로 들어왔냐느니, 공부를 우리보다 못하고 노력을 우리보다 덜했을 거라느니, 역차별이라느니,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서워서, 아니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주목 받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모두가 장애인이 없다고 확신할 때 그 확신을 깨기가 무서워서, 장애가 드러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장애를 감추는 학생이 있지 않을까?

얼마 남지 않은 내년에는 그 대학교 그 학과에 장애인이 입학하지 않을까? 내년에 장애인이 입학하지 않는다면 내후년에는? 그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저 문장은 차라리 선언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는 장애인 따위는 없는, '정상인'들로만 구성된 집단이라는 선언 말이다. 차라리 그것이 혹시 장애를 숨기는 장애인이 그 대학교 그 학과에 있어서 그가 상처를 받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일일이 장애를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를 구할 수도 없는 어느 한 장애인이 몰래 상처 받는 일보다는 나을 것 같다.

설사 장애인이 없다고 해도, 내년과 내후년에도 장애인이 그 대학교 그 학과에 입학하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다. 등록장애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5%이다. 왜 그곳에는 0%일까? 이것은 혹시 차별이 아닐까? 혹시 이것이 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장애인을 위한 정책과 교육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등록장애인이 아니더라도 불편한 신체와 정신을 가진 사람이 배려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가족과 친구와 같이 소중한 사람이 장애인인 학생이, 그래서 장애인을 모욕하는 말을 참기 힘든 학생이 그곳에 있지는 않을까?

분명한 것은 장애인의 멱살을 잡는 것만이, 장애인의 면전에서 욕설하는 것만이 혐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장애인이 감히 자신을 장애인이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는 암묵적인 질서도 혐오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장애인이 아주 사소한 배려를 받는 것조차 미안해하고 눈치를 보도록 하는 분위기도 혐오다. 장애인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하는 것, 장애인인 자신을 혐오하게 하는 구조가 혐오다. 그래서 장애인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사회가 바로 혐오다. 그것이 "저희 과에는 장애인이 없습니다.", 이 한 문장에 드러나는 우리의 현실이다.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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