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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때문에 수능 연기됐다고 욕하는 댓글 보고 슬펐어요"

ⓒ뉴스1

“다음주에 수능을 쳐야 하지만 공부도 안 되고 여기 상황도 심각해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어요.”

16일 오후 3시께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옥성리 흥해실내체육관 입구. 지진 피해 주민들이 모인 이곳에서 포항여고 3학년 정유정(18)양이 노란 조끼를 입고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체육관에 대피한 주민들에게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을 부지런히 건넸다. 유정양은 지진이 일어난 흥해읍 옥성리 주택에서 부모와 함께 산다. 지난 15일 지진이 일어나 집 안이 엉망이 된 뒤 가족들과 텃밭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다.

유정양 친구 중 일부는 여진이 오든 말든 그냥 집에서 수능 공부를 하고 있다. 다른 친구들은 막바지 수능 공부를 하기 위해 대구 등 친척집으로 갔다. 또다른 친구들은 흥해실내체육관이나 근처 대도중 체육관 등에서 담요를 덮고 틈틈이 공부를 한다. 승용차 안에서 공부를 하는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유정양은 학교에 가지 않는 이번주는 공부 대신 자원봉사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공부도 잘 되지 않고 이곳에 와보니 주민들이 너무 힘들어하고 있어서 오늘부터 자원봉사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인터넷에서는 우리들(포항 학생들) 때문에 수능이 연기됐다고 욕하는 글들이 있어 슬펐어요.” 얇은 옷을 입고 자원봉사를 하며 추위에 떨던 유정양이 이렇게 말했다.

규모 5.4지진이 발생한지 하루가 지난 16일 낮 경북 포항 흥해실내체육관에서 한 고3 수험생이 공부를 하고 있다.

흥해실내체육관 안은 대피한 주민 700여명으로 북적였다. 어머니와 같이 이곳에 있던 고3 정혜미(18·가명)양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전날 지진으로 혜미양 방의 책상은 두 동강이 났고 컴퓨터도 부서졌다. 지난밤 공부할 책도 챙기지 못하고 이곳에 피난을 와서 밤을 새웠다. 다시 집에 가서 책을 몇권 챙겨 왔다. 여기서 틈틈이 수능 공부를 해야 하는데 차마 책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책을 보고 있으면 기자들이 너도나도 인터뷰를 하자며 달려들기 때문이다.

“공부가 안 돼서 답답하고 에스엔에스(SNS)를 보면 수능이 연기됐다며 우리를 욕하는 글들이 보여 더 슬퍼요. 지진이 난 것이 우리 잘못도 아니고 천재지변인데, 왜 수능 연기가 포항 학생들 때문인 것처럼 비난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도 피해자인데….” 혜미양은 울먹였다.

또다른 대피소인 포항 북구 환호동 대도중 체육관 안에도 170여명이 북적였다. 밤새 여진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이들은 간이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간이침대에 누워 있던 포항 중앙고 3학년 김준석(18·가명)군은 스마트폰으로 지진 관련 기사를 보고 있었다. 수능이 다음주지만 그 역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방금 우리를 욕하는 기사 댓글을 봤는데 정말 슬퍼요. 우리는 이러고 있는데….”

지진으로 집과 공부할 곳을 잃은 포항의 고3 학생들은 자신들을 비난하는 인터넷 댓글들로 상처받고 있었다.

‘이번 수능 연기 결정은 위험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의 수준을 몇 계단 상승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명백한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지켜야 할 가치와 배려가 있습니다.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그 가치와 배려를 위해 시민의 지성을 믿고 일부의 비난을 감수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같은 경험을 통해서 배워나가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날 채장수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대구에 사는 채 교수에게는 고3 아들이 있다.

포항 전체 유치원과 초·중·고 242곳(학생 6만7000여명)에 휴업령이 내려져 학생들은 일단 이번주까지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하지만 지진으로 교실 천장이 무너지거나 벽에 금이 간 학교가 많아 실제 다음주부터 학생들이 학교에 나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포항 14개 고교가 수능시험 고사장으로 정해져 있는데, 다음주 실제 시험이 치러질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포항에는 모두 27개 고교(학생 1만7000여명)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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