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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경험이 가장 짜릿했다"

2016년 10월 정유라씨 입시 및 학점 특혜 논란이 불거지면서 이화여대 교수들은 개교 사상 처음으로 집단행동에 나섰고, 학생들은 교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모였다. 최 총장은 시위 직전 사퇴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지난 1년에 대해 묻자, 제보자는 활짝 웃었다. 김연주(가명)씨는 “난 괜찮은데, 주변에서 더 걱정한다”고 했다. 김씨는 정유라씨가 이화여대 체육학부 재학 시절 계절학기에 출석은 물론 보고서 제출도 하지 않고 2학점을 이수했다는 사실을 한겨레에 제보한 당사자다.

관련 기사: 한겨레 2016년 10월12일, ‘최순실 딸 이번엔 이대 의류학과 학점 특혜 의혹’

제보 뒤 1년, ‘취준생’이 됐다

정유라 사태 이후 1년. 그는 이제 취업준비생이 됐다. 지난 1년 동안 이화여대 본관 점거 농성을 하고 제보를 하겠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사이, 졸업 요건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현재 늦깎이 졸업 준비생이다.

지난해 졸업을 못하게 됐다는 것을 알고, 취업도 접었다. 취업 자체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그때(제보) 이후 드러나는 진실들을 보면서 주류 사회에서 추구하는 게, 그리고 내가 거기에 편입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싶었다. 대안의 삶은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다.” 부모를 설득했고, 경제적으로 자립했다. 적게 벌고 적게 쓰자고 생각했다. 소규모 창업을 준비했고,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런데 그는 다시 취준생이 됐다. “그것(학업)도 돈이 필요하더라고요.” 인터뷰를 한 날도 김씨는 면접 준비 중이었다. 지난 1년 동안 삶의 무게가 부담스러웠을 텐데, 도리어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눈은 충혈돼 있었다. 인터뷰 중간중간 어깨가 뻐근한지 고개를 좌우로 툭툭 꺾었다.

- 제보 당시 상황은?

= 총장이 새로 부임하고 나서 학칙이 개편되고, 좀 뒤숭숭했다. 결정적으로 졸업 학기에 졸업 요건이 변경됐다. 이때부터 학생들의 불만이 커졌다. (패션)쇼가 갑자기 (의류학과 졸업 요건으로) 생겼다. 1년은 준비해야 하는데 그런 기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애초 미래라이프대학 문제는 제보와 별개 문제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게 관련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총장 선임, 미래라이프대학, 의류학과, 정유라, 최순실씨까지….

- 자연스럽게 제보하는 흐름이 생긴 건가.

= 과 자체적으로 정유라씨 문제를 공론화하자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특히 문제가 된 수업을 한 교수(이인성)는 대표적인 보직교수로 졸업이나 학사관리에서 학생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듯한 느낌도 있었다(이 교수는 정유라 학사 특혜를 이유로 구속됐다). 그래서인지 다들 조심스러워했던 것 같다. 특혜가 있었던 게 여름인데, 몇 달 동안 문제 제기를 못한 이유는 졸업을 앞둔 사람들이 많은 수업이어서 졸업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과 분위기상 길들여진 느낌도 있었다. 그러다가 농성 과정에서 과 친구들이랑 얘기하면서 분명한 문제의식을 나눴다. 알고 보니 다들 공통된 불만이 있었고….

미래라이프대학 문제로 대학본관 점거 농성이 한창일 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막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한겨레>를 통해 최순실이라는 존재가 비선 실세로 등장했고, 곧이어 이화여대가 등장(<한겨레> 9월27일치 1면 “딸 지도교수까지 갈아치운 ‘최순실의 힘’”)했다. 그 무렵 한 친구가 얼핏 계절학기 얘기를 꺼냈다. ‘글로벌 융합 문화 체험 및 디자인 연구’란 수업을 듣는데 ‘정유라’라는 이름을 봤다는 것이다. 김씨는 놓치지 않고 그것을 낚아챘다. 제보자가 제보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2016년 10월 20일 이화여대 컴플렉스에 붙었다 화제가 된 대자보

- 그 다음 어떻게 했나.

= (체육 전공자인) 정씨가 (의류학과) 수업을 듣는다는 게 왠지 뭔가 연결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의류학과의 상황을 알아봤다. 총장이 중국에 가서 양해각서(MOU·거래 전에 서로 원칙적인 합의를 표시한 서류로서, 체결되는 내용에 법적 구속력이 없다)를 맺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거기에 이 교수가 참가했다. 여기서 정씨가 이 교수의 중국 수업에 참가한다? 이건 최소한의 관련성 위에 놓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얘기가 될 만한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런 학교면 졸업장이 필요 없다 생각”

- 제보 자료가 3GB(기가바이트)가 넘었다. 어떻게 모았나.

= 친구에게 얘기를 듣고 정유라라는 이름을 들어봤는지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미 친구들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간직하고 있던 자료를 하나씩 내놨다. 중국에 갔던 학생들의 명단, 특혜 내용과 관련된 자료, 하나씩 부탁해서 수집했다. 어떤 친구는 정씨와 직접 관련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점 특혜와 관련해)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을 할 만한 녹취도 갖고 있었다. 교수가 미래라이프대학에 대해 얘기하는 내용이었다. 모아놓고 보니 자료량이 너무 많았다. 내가 하는 것보다 기자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자료를 더 모으는 데 한계가 보이고, 밝히면 큰 게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 그 시점에서 이화여대 기사를 많이 쓴 기자를 찾아 전자우편을 보냈다.

- 제보자로 지목돼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부담은 없었나.

= 그때는, 솔직히 졸업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이런 학교면 졸업장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일단 화가 나서 시작한 일인데 생각보다 더 큰 내막이 점점 드러났다. 정의, 이런 것을 생각하고 말고도 없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실제로 졸업이 안 되면….

= 그보다는 졸업이 안 된다고 협박을 하는 상황이 오면 얼굴 공개하고, 아예 더 세게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졸업을 걱정하는 상황이었다면 취업도 당연히 문제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내 결심이 어떻든,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지난 학기에 따져보니 졸업 요건을 갖추지 못한 정도였다. 직전 학기까지만 해도 졸업을 제때 하려고 정말 열심히 학교를 다녔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졸업논문도 학기가 다 지나서 쓰기 시작했다.

- 주변에서 걱정했을 것 같다.

=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향한 걱정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료를 함께 모은 친구들이 너무 힘들어했다. 제보를 하면, 이러다가 자료를 제공한 사람이 누군지 알려질까 두려워했다. 졸업이 안 될 수도 있고, 개인만 불이익을 당할 수 있으니까. 물론 이건 초반 상황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대학 내 참여 인원도 많아지고 주변에 내 의견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친구들도 그랬고. 그때부터는 외롭지 않았다.

“지금 안 알리면 후배들이 고생”

- 가족들은 어땠나.

= 내 의견을 존중하고 응원해줬다. 대신 익명으로 하라고 부탁했다.

- 원래 성격이 그런가.

= 주변에서 나보고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들 한다. 재작년인가, 친구들과 찜질방에 갔다가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 옆에서 친구가 해코지당할 수도 있다고 그냥 넘어가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그냥 돌아서는데… 이번에 넘어가면 계속 생각날 거 같았다. 그때 곧바로 (가해자를) 잡아서 법정 공방을 열 달을 했다. 정말 힘들었다. 합의 등 소송 과정에선 피해자가 고생한다. 그래도 그게 내 성격이다. 그뿐만 아니다. 엄마가 방문판매 사기를 당했을 때 그냥 넘어가지 않고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를 찾아가기도 했다. (웃음)

-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해도 개인이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 사실 지났으니까 이렇게 말하지, 그때는 안 힘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뭐랄까, 그냥 지나가자는 느낌이 있었다. 내 편에 아무도 없는 듯했다. 오히려 같이 했으면 하는 친구들이 일단 나를 말리니까. 나는 알려야 한다고 했고. 지금 그냥 넘어가면 우리 밑(후배)이 고생하고, 또 고생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 생각뿐이었다.

김씨의 제보는 당시 보도를 맡았던 기자들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이끌어냈다. 입시 비리 못지않은 분노였다. 입학도 모자라 학사관리까지 특혜를 받았다는 데 학생들은 들끓었다. 점거농성장이 아닌 학내 곳곳에 대자보가 붙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의류학과가 있는 생활환경관에는 “의류학도인 벗들은 지난 학기 과제 때문에 수많은 밤을 새웠고 더 나은 결과물을 제출하기 위해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출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노력 끝에 얻게 된 학점을 정유라씨는 어떻게 수업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최소 B 이상을 챙겨갈 수 있느냐”는 내용의 16학번의 대자보가 붙었다. 대자보에는 “(담당 교수가) 학기 초에 ‘체육과학부 정유라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거나 ‘이 학생은 수강신청을 해놓고 왜 안 오는지 모르겠다’ ‘얘는 이미 F다’라는 말까지 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어 “어디에선가 말을 타고 있을 너에게”로 시작하는 대자보 역시 언론에 보도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엄밀해야 할 학사관리가 최소한의 공정성을 잃어버린 데 대한 분노였다. 김씨의 제보는 최경희 총장의 해임을 요구하는 시위로 번졌다. 그리고 개교 이래 처음으로 교수들의 총장 해임 집단행동이 등장했다. 이대에서 일기 시작한 파도는 물결이 돼 서울 광화문 촛불로 넘실댔다.

- 촛불집회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나.

= 당시에 큰 그림을 본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학생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제보를 한 것일 수도 있다. 교수와는 이미 소통이 되지 않았고(제보에 등장하는 수업을 담당한 인물은 이인성 교수로 2016년 정씨가 출석하지 않았고, 과제물을 내지 않았음에도 부정하게 학점을 준 혐의로 구속됐고,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 1년이 지난 지금의 심경은?

= 아직도 그 긴 사건 속에 있다는 느낌이다. 이후에는 아무래도 뉴스를 더 관심 있게 본다. 내 삶의 중요한 경험 중 하나니까.

“학생과 시민의 뜻이 통했다”

1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대는 총장이 바뀌었고,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계획은 없던 일이 됐다. 김씨는 “이제 다 제자리로 돌아간 느낌”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 꺼렸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주변에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이 아닌 모두가 만들어놓은 결과라는 처음의 가치를 지키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 1년 가장 짜릿했던 순간을 물었다. 역시 촛불집회의 경험이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뜻이 통했다는 느낌이 들 때요. 연대의 쾌감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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