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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게여야 하는 이유

남편은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자마자 눈이 동그래졌다. 커다란 고무 대야에 갓 담근 듯 아삭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이었다. 우리는 국수가 나오기도 전에 접시의 절반을 비워버렸다. 식사를 하는 사이, 비워진 그릇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척척 채워졌다.

  • 손수현
  • 입력 2017.11.13 13:20
  • 수정 2017.11.13 13:22

일주일 넘게 시름시름 앓았다. 이번 환절기는 무사히 넘기는가 했는데 기온이 뚝 떨어졌던 어느 날, 아주 지독한 녀석에게 걸리고 말았다. 끼니보다 더 부지런히 챙겨 먹어야 하는 약 때문인지, 입맛도 싹 사라졌다. 배가 고픈 것도 잘 느끼지 못했고, 아픈 동안 2kg이 쑥 빠져버렸다. 온종일 누워있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오랜만에 일찍 끝났는데."

일찌감치 퇴근을 하고 남편 회사 근처에서 만난 우리는 오랜만에 외식을 하기로 했다. 그날도 입맛이 없어 같은 거리를 빙빙 돌고 있었는데, 작은 골목 구석에 처음 보는 국숫집이 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창문에는 모락모락 김이 서려 있었다. 뜨끈한 국물이면 몸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메뉴는 칼국수, 수제비, 칼제비 딱 세 가지뿐, '손국수'라는 이름에 충실한 구성이었다. 밥때가 조금 지났음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늦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서빙을 하시는 아주머니는 우리가 앉자마자 김치를 먼저 가져다주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비주얼이었다.

"와, 김치 봐. 국수의 팔 할은 김치인데. 일단 합격!"

남편은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자마자 눈이 동그래졌다. 커다란 고무 대야에 갓 담근 듯 아삭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이었다. 우리는 국수가 나오기도 전에 접시의 절반을 비워버렸다. 식사를 하는 사이, 비워진 그릇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척척 채워졌다. 그 바쁜 와중에도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그릇에 가득 채워져 나온 국수엔 잘 다져진 고기가 한 움큼 담겨있었다. 최근 이런 가격에 이런 음식을 먹은 적이 있었나. 지독한 감기마저 싹 사라질 듯했다.

"국수엔 갓 담근 김치가 잘 어울리잖아요. 그래서 우린 매일 아침마다 그날그날 필요한 양만큼만 담가.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네. 앞으로 자주자주 와요."

계산을 마친 우리에게 아주머니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갓 담근 김치니까 그렇게 맛있을 수밖에 없는 거였구나. 손님 하나하나를 살갑게 챙기는 것도 이 집에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일 것 같았다. 제 아무리 맛이 훌륭하고 외관이 멋들어지다 하더라도, 그런 표정과 그런 마음씨가 없다면 얼마 안가 발길이 뚝 끊겨버리고 말 테니 말이다. 거리에 다섯여섯 개씩 되는 과일가게 중 가장 멀리 자리한 가게에 가는 이유도, 대로변에 자리한 미용실을 지나 굳이 2층에 위치한 곳에 가는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더 반겨주고, 한 번 더 신경 써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을 즐기고 있다는 게 느껴져 덩달아 나도 즐거워지고 마는, 단골 가게에는 꼭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술집이 즐비한 거리, 딱 하나 있는 이 국수가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쓰린 속을 달래고 갔을까. 그 순간, 자그마한 가게가 엄청나게 커 보였다.

우리는 추위도 느끼지 못할 만큼 흡족한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가게들은 얼마 안가 문을 닫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는데, 이번 만은 부디 비껴가 주길 바랐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이유는 딱 하나, 더 넓고 더 목이 좋은 곳으로 이사 가는 것이길. 올 겨울의 추억은 이 국숫집 곳곳에 차곡차곡 쌓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이 글은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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