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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님, '지정생존자' 보셨나요?

트럼프는 이 드라마를 봤을까. '지정생존자'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다. 백악관 오벌 오피스의 TV채널은 폭스뉴스에 '고정(?)'돼 있기 때문에 못 봤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 아닐 수도 있다. 지상파인 ABC에서 방영되는 화제의 드라마 아닌가.

  • 배명복
  • 입력 2017.11.08 07:18
  • 수정 2017.11.08 07:20

미국 정치 드라마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에 푹 빠져 있다. '웨스트윙(West Wing)'에서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까지 백악관과 워싱턴 정계를 다룬 '미드(미국 드라마)'가 다 그렇듯이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다. 몰아보기 탓에 폐인이 되다시피 한 건 이번도 마찬가지다. 작년 9월에 시작된 시즌 1이 끝나고, 지금은 시즌 2가 방영 중이다.

미 대통령은 매년 초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두교서(State of Union)'를 발표한다. 한 해의 시정 방침을 밝히고, 의회에 협조를 요청하는 연례행사다. 백악관 수뇌부는 물론이고, 행정부 장관들과 상·하원 의원, 대법관 전원이 참석한다. 만에 하나, 그 자리에서 불의의 사고가 발생해 참석자 전원이 유고가 되는 비상사태에 대비해 백악관은 장관 중 한 명을 행사에서 열외시킨다. 지정생존자다. 지정생존자는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워싱턴 밖의 은밀한 장소에서 대통령이 맡긴 '핵 코드 가방'을 갖고 대기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첫 번째 연두교서 발표 때 보훈장관인 데이비드 슐킨을 지정생존자로 지명했다.

드라마는 대통령의 연두교서 발표 도중 가공할 폭탄테러가 발생,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사망·실종되면서 시작된다. 지정생존자로 살아남은 톰 커크먼 주택 및 도시개발 장관은 졸지에 대통령직을 떠맡는다. 교수 출신의 존재감 없는 각료에서 일약 미 대통령이 된 커크먼은 수많은 난관과 도전을 헤쳐 가며 위기에 처한 미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커크먼은 자신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필요할 때 타협하면서도 정의와 공정, 통합의 가치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본 음험하고 교활한 대통령, 프랭크 언더우드와는 180도 딴판이다.

트럼프는 이 드라마를 봤을까. '지정생존자'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다. 백악관 오벌 오피스의 TV채널은 폭스뉴스에 '고정(?)'돼 있기 때문에 못 봤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 아닐 수도 있다. 지상파인 ABC에서 방영되는 화제의 드라마 아닌가. 트럼프가 보여 주고 있는 리더십은 '지정생존자'에서 커크먼이 보여 주고 있는 리더십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모든 걸 다 떠나 커크먼은 트위터를 하지 않는다. '지정생존자'는 미국의 정치 현실을 거꾸로 빗댄 우화적 드라마일 수도 있고, 미 정치인들을 위해 만든 교육용 드라마일 수도 있다. 트럼프를 위한 드라마란 생각도 든다.

지금 트럼프는 '러시아 스캔들'에 발목이 잡혀 있다. 트럼프 대선 캠프와 러시아의 유착 의혹을 수사 중인 로버트 뮬러 특검은 이미 폴 매너포트 전 선대본부장 등 3명의 캠프 핵심 관계자를 기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련성을 부인하며 불끄기에 급급하고 있지만 불똥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수사 결과에 따라서는 탄핵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다.

아시아 5개국 순방에 나선 트럼프가 일본을 거쳐 오늘 한국에 온다. 요코다 미군기지에 내려 주일미군을 격려하는 것으로 방일 일정을 시작했듯이 한국에서도 미군기지부터 들른다. 약 800개에 달하는 해외 미군기지 중 최대 규모라는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를 찾아 미군 장병들을 위로하고 연설할 예정이다. 트럼프가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을 재확인하는 데서 더 나아가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제시한다면 좋겠지만 그걸 기대하긴 힘들다. 북핵 문제에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는 것 같은 묘수는 없다. 불협화음이 안 나오면 다행이다.

한국에 이어 방문할 중국에선 '황제'로 등극한 시진핑(習近平)이 기다리고 있다. '국빈+α'의 예우로 트럼프를 극진히 모시겠다지만 시진핑인들 트럼프의 국내정치적 약점을 모를 리 없다. 결코 호락호락하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웃으면서도 따질 건 확실하게 따질 공산이 크다.

드라마에서 커크먼의 첫 번째 해외순방은 성과 없이 끝난다. 핵무기 감축을 위한 러시아와의 협상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들에게 제안하지만 미 국내 문제를 이유로 동맹국 정상들은 지지를 유보한다. 의사당 테러의 배후를 이슬람 테러세력으로 보고, 주모자를 검거했지만 사실은 미국 내 반역 세력이 사주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커크먼은 동맹국 정상들로부터 외면당한다. 내정(內政)이 외치(外治)의 발목을 잡은 꼴이다. 드라마는 현실을 초월하지만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지정생존자' 보셨습니까. 혹시 보셨다면 그에 대해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서울에 오는 트럼프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 이 글은 지난 7일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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