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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났나?

자산격차나 소득격차에서 한국은 미국 다음의 세계 최대 불평등 국가가 되었다. 한국은 상위 10%가 소득의 47%를 가진 나라, 상위 1%가 전국 토지의 반을 차지한 나라가 되었다. 비정규직 고용의 일반화, 청년실업, 30~40대 대도시 거주자의 주거 빈곤의 상당 부분은 모두 우리가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한 사항을 따른 결과였다. 게다가 한국은 청소년의 반이 부모의 능력이 자신의 미래를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신세습사회가 되었다.

촛불시위는 '정치적 주권' 상실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이다. 정말로 다행한 일이고 긍정적인 신호다. 그러나 1997년 아이엠에프가 강요했던 논리와 그것에 편승해서 이익을 챙겨온 '현지인'들은 건재하다. 시장, 경쟁을 마치 자연법칙과 같은 것으로 설명해온 논리하에서 대중은 '경제주권' 상실 상태에 있다.

1997년 외환위기, 국가의 경제주권 상실이라는 대환란을 맞은 지 20년이 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가장 빠른 기간에 이 환란에서 벗어났다는 찬사를 받았다. 과연 그런가? 한국은 분명 급한 병은 고쳤지만, 만성질환을 안고 사는 환자가 된 것 아닐까? 오늘의 한국은 부의 양극화, 불평등, 그리고 계층 고착화와 신세습사회의 증상을 심각하게 앓고 있고, 이 질병은 주로 외환위기와 이후의 구조조정에서 시작되었다.

자산격차나 소득격차에서 한국은 미국 다음의 세계 최대 불평등 국가가 되었다. 한국은 상위 10%가 소득의 47%를 가진 나라, 상위 1%가 전국 토지의 반을 차지한 나라가 되었다. 비정규직 고용의 일반화, 청년실업, 30~40대 대도시 거주자의 주거 빈곤의 상당 부분은 모두 우리가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한 사항을 따른 결과였다. 게다가 한국은 청소년의 반이 부모의 능력이 자신의 미래를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신세습사회가 되었다.

사실 외환위기는 하늘이 내린 벌이 아니었다. 위기의 징후는 김영삼 정부 전후 자본 자유화, 개방, 자율, 민영화, 세계화 구호가 요란할 때부터 드러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선진국이 된 것으로 생각했던 김영삼 정부는 그 중요한 전환기에 상황을 읽고 대처할 능력이 부족했다. 탈공업화, 후기 개발독재 시대, 중국과 후발국의 추격에 맞서 기존의 생산체제를 전면 재편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북한과의 대화를 지속하고 북방정책을 밀고 나가야 했으나 '김일성 조문 파동'을 빌미로 그 문을 닫았고, 노조의 파업을 '체제 전복' 행동이라고 공격하면서 밑으로부터의 경제민주화 요구를 차단했다.

그뿐인가? 인구절벽과 고령화의 위험, 학령인구의 감소, 수도권 집중 강화와 지방 소멸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으나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87년부터 97년까지의 10년은 한국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질적인 변신을 감행해야 할 결정적인 전환기였지만, 한국의 정치권, 관료집단, 학자들은 국가 미래를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하지 못했고,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무책임한 외화 과다차입에 손을 놓았다.

정치지도자들만큼이나 책임을 가진 집단은 경제관료들이었다. 미국의 경제학자 스티글리츠는 한국의 우수한 엘리트 관료들이 오만하고 무리한 아이엠에프의 요구에 대해 반론조차 제기하지 않고 100% 수용한 씁쓸한 장면을 알려주었다. 일부 경제관료들은 국민의 자산인 공기업을 외국 투기자본에 넘겨주는 과정에서 큰 이익까지 챙겼다.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경제주권을 상실한 대가는 너무 참담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민주화 조처나 복지정책은 대중들의 '경제주권 상실' 상태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융기관을 비롯한 한국의 주요 대기업의 주식은 외국자본의 손에 넘어갔고, 그들에게 막대한 배당을 챙겨주는 재벌 경제 시스템이 강화되어 반실업자나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고통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모르게 되었으며, 보통 국민들은 정권교체가 자신의 삶을 개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이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저물고 다시 국가의 시대가 왔다. 미국의 트럼프 당선, 일본의 아베의 승리, 영국의 브렉시트, 독일에서의 신나치당의 의회 진출 등 세계적 우익 포퓰리즘은 경제주권을 상실한 중하층민들의 분노의 표현이다. 그들은 애국주의라는 '독이 든 약'을 삼키고 있지만, 국가는 아직 그들의 것이 아니다.

한국의 촛불시위는 '정치적 주권' 상실에 대한 분노가 이들 나라와는 다른 방향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정말로 다행한 일이고 긍정적인 신호다. 그러나 1997년 아이엠에프가 강요했던 논리와 그것에 편승해서 이익을 챙겨온 '현지인'들은 건재하다. 시장, 경쟁을 마치 자연법칙과 같은 것으로 설명해온 논리하에서 대중은 '경제주권' 상실 상태에 있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은 사실 외환위기의 그늘 아래 있었다. 지금 우리는 국정원의 권력농단의 역사를 매일 접하면서 '정치주권' 회복의 기대를 갖고 있다. 그러나 국제금융자본-재벌-경제관료가 가져간 '경제주권'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에 대한 집단적 논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새 사회경제시스템 구축을 위한 논의, 다시 시작해야 한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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