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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혁명을 일으켰지만 혁명은 딜레마를 낳았다

  • 강병진
  • 입력 2017.11.06 12:03
  • 수정 2017.11.06 12:15

▶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17년 11월7일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인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급진적인 사회 변혁을 바라는 일반 대중의 염원이 낳은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70년 뒤 현실 사회주의는 붕괴했고, “세계를 뒤흔든” 러시아혁명은 한때의 ‘해프닝’인 양 잊혀왔다. 100년 뒤 되돌아보는 러시아혁명에서 21세기의 우리는 어떤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까.

러시아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이 혁명이 성공한 뒤 한호하는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

딱 한 세기 전인 1917년 이른 봄에 300년 넘게 러시아 제국을 다스려온 로마노프 황조가 제국 수도 페트로그라드(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의 시위로 무너지고, 급조된 임시정부가 권력의 공백을 메웠다. 그로부터 여덟 달이 지난 늦가을에 볼셰비키가 무장봉기를 일으켜 임시정부를 뒤엎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를 세웠다. 흔히 “10월 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대사건에 당대 대중이 보인 반응은 혁명 현장을 누비던 미국인 저널리스트 존 리드의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 다음과 같이 포착돼 있다.

나는 (……) 한 노동자가 모는 화물차의 앞자리에 타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갔다. (……) 지평선에 걸쳐서 낮보다는 밤에 훨씬 더 멋진 수도의 번쩍이는 불빛이 메마른 벌판의 보석의 담장처럼 펼쳐져 있었다. (……) 차를 모는 늙은 노동자는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환희에 찬 몸짓으로 저 멀리서 빛나는 수도를 가리켰다. “내 것이야!” 그는 환한 얼굴로 외쳤다. “이제는 모두 내 것이야! 나의 페트로그라드야!”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 저 노동자의 환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10월 혁명의 유산이었던 소비에트연방이 1991년에 맥없이 허물어진 지 거의 한 세대가 흘렀으니 더더욱 그렇다. “세계를 뒤흔든” 1917년 러시아혁명의 거대한 충격파는 지난 한 세기를 거치며 잦아들어 지금은 세간에서 잔향조차 감지하기 어렵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오히려 더 바빠졌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본격적인 학술 연구가 혁명이 일어난 지 한 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듯이, 정치에 얽매인 진영 논리에서 홀가분해진 차분한 러시아혁명 학술 연구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인 오늘날에서야 드디어 출발선을 박차고 나아갈 때를 맞이했을지 모른다. 세계를 뒤흔들었던 충격파의 진앙을 찾아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삶의 기틀과 사회의 얼개를 뜯어고치는 정치

혁명은 정치에 냉소를 보내던 일반 대중이 정치에 관심을 보이고 참여할 때 진행된다. 1917년 4월 볼셰비키당의 최고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과 함께 오랜 외국 망명을 끝내고 러시아에 돌아온 그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는 혁명 러시아에서 가장 인상적인 모습으로 길모퉁이마다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정치 토론을 벌이는 거리 광경을 손꼽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최전선 참호 안에서 소총을 쥔 병사들이 후방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얻고 싶어한 것은 다름 아닌 “읽을 것”, 즉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판단할 정보가 담긴 신문이나 정치 팸플릿이었다. 이제 정치는 고관대작들이나 몇몇 정당 지도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거리를 돌아다니는 시민,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는 노동자, 들판에서 쟁기질을 하는 농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혁명 러시아의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정치는 권력 교체를 둘러싼 정치 세력의 이합집산 따위가 아니라 삶의 기틀과 사회의 얼개를 확 뜯어고치는 활동과 투쟁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해방이었다. 온갖 특권과 부조리를 없애고 모든 영역에서 인간이 맺는 관계를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대중이 이루고자 꿈꾸는 목표였다. 1917년에 러시아의 기층 민중을 일깨운 이 해방의 염원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유럽의 노동자, 더 나아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피억압민이 합류했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실은 1920년에 모스크바에서 지내던 미국의 아나키스트 에마 골드먼이 벗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드러난다.

내가 사는 곳의 주된 매력은 여기서 지내는 사람의 유형이 점점 다양해진다는 거야. 중국인, 조선인, 일본인, 인도인이 “10월 혁명”의 성과를 배우고 자기 나라의 해방 과업에 필요한 도움을 얻으려고 이리로 온다니까.

러시아혁명이 세계를 뒤흔들었다는 존 리드의 표현은 이처럼 빈말이 아니었다.

충격파의 진앙인 1917년으로 되돌아가자. 1917년 초엽에 전제정을 무너뜨린 공장 노동자들이 노동계급의 대표 조직인 소비에트를 만들었고 이 소비에트가 자유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임시정부와 정치 권력을 분점하면서 “이중 권력” 체제가 들어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중 권력”이 비단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전제군주 니콜라이 2세를 내쫓고 공장으로 돌아온 노동자들은 작업 현장에서 폭군으로 군림해온 작업반장을 내몰고 민주적 선거로 새 작업반장을 뽑았다. 군대의 병사들도 고압적인 장교들을 처단하고 병사위원회를 만들어 장교단의 권위에 맞섰다. 러시아 제국의 강압적인 민족 정책에 신음하던 소수민족들도 자율성 확대와 자치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왼쪽)과 이오시프 스탈린.

혁명 러시아에서는 낡은 권위가 새로운 권위로 대체되는 데 그치지 않는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인 변혁을 바라는 염원이 터져 솟구쳤다. 1789년 프랑스의 시민이 그랬듯이, 1917년의 러시아의 일반 대중은 권력을 가진 이들이 누리는 특권을 끔찍이도 싫어하고 미워했다. 특권은 불평등에서 비롯되며, 불평등은 사회의 권위주의적 위계 구조에서 비롯된다. 사회 혁명의 핵심은 이 권력자를 저 권력자로 바꾸는 차원이 아니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명령을 내리는 이와 명령을 받는 이의 구분을 없애버리는 차원의 변혁을 이루는 것이다. 러시아 인민은 위계제 구조 자체를 아예 해체하는 일에 나섰다. 공장에서는 위에서 임명된 경영자가 사라지고 작업대 앞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선출한 공장위원회가 경영진 노릇을 하게 되었다. 군 계급에 따른 철저한 상명하복이 요구되던 병영에도 평등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병사들은 계급 권위의 표상인 견장을 군복에서 떼내는 엄숙한 의례를 치르며 모든 형태의 권위주의를 배격한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이렇듯이 혁명 상황에서 삶과 사회의 기틀과 얼개를 밑뿌리부터 재구성하려는 풀뿌리 대중의 염원은 자유주의 세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에 머무르려는 멘셰비키 같은 온건 사회주의 세력이 협력해서 짜놓은 좁은 틀에 갇힐 리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펄펄 세차게 끓어오르는 밑바닥 기류를 가장 빨리 느끼고 잡아내서 강령으로 내세운 정치 집단이 바로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가 이끄는 볼셰비키당이었다. 노동자와 병사는 처음에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던 볼셰비키당을 자기들의 바람을 이뤄줄 정치 세력으로 여기고 집권을 노릴 강력한 정당의 위치로 밀어 올렸다. 볼셰비키의 성공은 거저 얻은 횡재가 아니라 풀뿌리 정서를 재빨리 알아채는 능력의 산물이었다. 이 놀라운 감각은 볼셰비키 안에서 경직된 위계제가 아니라 유연한 당내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작동한 결과였다. 1917년의 볼셰비키당은 통념과 달리 음모 조직이 아니라 위아래 가리지 않고 활발한 토론과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역동적 조직이었다.

반혁명의 파상 공세를 힘겹게 홀로 막아내

1917년 11월7일(당시 달력으로는 10월25일)에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를 뒤엎고자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노동자와 병사가 무장봉기의 주력이었다. 풀뿌리 대중의 눈에 임시정부는 근본적 변혁의 걸림돌일 뿐이었다. 이튿날 러시아에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갓 태어난 정부는 참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쳐 나아가야 했다. 1918년 여름부터 내전이 일어나 신생 정부는 나라 안팎의 적대 세력과 3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여야 했다. 전쟁과 혁명, 내전, 그리고 자본주의 열강의 경제 봉쇄로 생산활동이 붕괴한 탓에 시민은 내내 굶주림에 시달렸다. 볼셰비키가 난관을 타개해줄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神)’이라는 뜻의 문학 용어이며, 도저히 풀리지 못할 만큼 문제가 헝클어진 파국적 상황에서 신이 기계장치를 타고 무대에 내려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무대 연출 기법을 말한다)로 기대했던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은 1919년 1월에 처절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는 동·서·남쪽에서 잇달아 밀려오는 반혁명의 파상 공세를 힘겹게 홀로 막아내야 했다. 태어나자마자 불로 세례를 받은 혁명 정부는 끝끝내 버텨내서 1921년에 반혁명군을 모조리 물리쳤으며, 이듬해 말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결성해서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거의 다 되찾았다. 러시아혁명을 전염병에 비유하며 “요람에 있을 때 목 졸라 죽여야 한다”던 윈스턴 처칠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17년에 태어난 혁명은 1921년에는 아직은 연약할지라도 자생력을 갖춘 체제로 자라난 셈이다.

1917년과 1921년 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사회의 상층 엘리트가 완전히 바뀌었다. 옛 귀족 엘리트는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특권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거나 외국으로 도주했다. 그 빈자리는 노동자와 농민으로 메워졌다. 혁명이 없었더라면 사회 하층에 머물렀을 이들은 계층 상승 기회를 거머쥐고 새 엘리트가 되었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일하던 세묜 카나치코프라는 노동자 볼셰비키당원은 혁명과 내전을 거치며 요직에 올라 1921년에는 어엿한 대학총장이 되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한 청소년은 1918년에 내전이 벌어지자 붉은 군대에 들어가 반혁명군과 싸웠고 스무 살에 연대장이 되었다. 바실리 추이코프라는 이름의 이 풋내기 연대장은 훗날 제2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막아낸 소련의 명장이 된다.

하지만 1917년의 대중이 사회 위계구조의 타파를 바랐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엘리트의 교체가 혁명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볼셰비키와 풀뿌리 민중은 갈등을 빚었다. 세계 혁명의 전위를 자처했지만 내전과 경제 붕괴라는 혹독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 맞부딪쳐 생존에 급급해진 볼셰비키는 권위주의적 조직관으로 뒷걸음쳤다. 그들이 보기에, 혁명이 생존하려면 모든 조직의 효율성이 높아야 했고 효율성을 높이려면 위계제가 있어야 했다. 달리 말해, 혁명 사회에도 사람 사이에는 위아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붉은 군대가 반혁명군을 물리칠 강한 군대가 되려면 장교의 권위를 세워야 했고, 공장의 생산성을 높여 경제 붕괴를 막으려면 경영진의 권위가 살아나야 했다. 군대에서는 가혹한 규율이 다시 부과됐고,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작업반장을 선출하는 관행이 사라졌다.

새로운 형태의 특권과 불평등 부활

볼셰비키가 혁명의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본 위계제의 복원은 새로운 형태의 특권과 불평등의 부활로 이어졌다. 이것을 둘러싼 갈등은 에마 골드먼의 다음과 같은 목격담에서 엿보인다.

나는 스몰니(볼셰비키당 본부) 안에 별개의 식당이 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 나서 느낀 놀라움을 기억한다. 한 식당에서는 소비에트와 제3인터내셔널의 요인에게 푸짐한 건강식이 주어졌고, 다른 한 식당은 평당원용이었다. 식당 셋이 있었던 적도 있다. 해군병사들이 이것을 알아버렸다. 그들은 우르르 몰려와 그 세 식당 가운데 둘을 닫아버렸다. 그들은 “우리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나누도록 혁명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특권과 불평등의 재등장이 볼셰비키가 권력에 취해 타락한 탓이라는 시각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혁명이 살아남으려면 업무의 효율을 높여야 하며 그러려면 지도자가 누리는 일정한 특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볼셰비키 지도부의 현실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 인식에서 그토록 혐오하던 위계제의 부활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대중은 볼셰비키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는 혁명 사회의 새로운 지도자가 노동자, 농민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웠지만, 풀뿌리 민중이 보기에 특권을 누리는 새 엘리트가 노동자, 농민 출신이라서 다를 것은 없었다. 특권을 누리는 자가 바뀌는 혁명은 살아남았지만 특권을 배태하는 위계제 자체를 없애려는 혁명은 숨을 거두고 있었다.

혁명에는 딜레마가 있다. 대중은 권위주의의 혁파를 바라며 혁명을 일으키지만, 지도자들은 혁명이 생존하려면 권위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혁명의 생존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되살아나는 권위주의에 실망한 대중은 혁명에 등을 돌린다. 러시아혁명은 이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댔고, 그 궁극적 결과는 70년 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였다. 딜레마는 필연이라며 변혁을 포기할지, 아니면 역사에서 딜레마를 비켜갈 지혜를 얻어 더 올바른 변혁을 시도할지는 세계와 인간을 보는 각자의 철학에 달려 있을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817479.html#csidxd0f16de9f8289d9b1809b6bde86b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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