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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한 우리

우리는 서로를 비혼·비출산 가족, 연인, 도반, 짝꿍 등으로 그때그때 이름 붙이지만 어느 것으로도 가두지 않는다. 서로가 원하는 거리에서 원할 때 함께 있고, 따로 있는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몸의 바이오리듬처럼, 관계도 가깝다가 뜨거웠다가 차가웠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하는 불규칙한 리듬이다.

  • 홍승희
  • 입력 2017.11.06 09:38
  • 수정 2017.11.06 10:19

함께 살고 있는 A와 나는 폴리아모리스트다. 폴리아모리는 모노아모리인 1:1 독점관계와 다르게 독점하지 않는 관계를 의미한다. 타자를 배척하지 않고 서로가 만나는 사람도 존중하는 사랑 방식이다. A와 내게 지금은 그런 인연이 없지만, 앞으로 그런 일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하고 존중하기로 했다.

폴리아모리 안에서도 여러 가지 관계 형태가 있다. 우리를 구체적으로 이름 붙이면, 무질서한 관계(Relationship Anarchy)다. 무질서한 관계는 말 그대로 질서를 부여하지 않는 관계다. 우리는 서로를 비혼·비출산 가족, 연인, 도반, 짝꿍 등으로 그때그때 이름 붙이지만 어느 것으로도 가두지 않는다. 서로가 원하는 거리에서 원할 때 함께 있고, 따로 있는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몸의 바이오리듬처럼, 관계도 가깝다가 뜨거웠다가 차가웠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하는 불규칙한 리듬이다. 이런 우리가 폴리아모리스트라고 하면 사람들은 '질투심이 없는지' 묻는다. '소유욕이 사랑의 증거'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소유욕은 사랑이 아니라고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나도 질투심, 소유욕은 있다. 질투와 소유욕이 사랑의 증거이고 그것만이 관계를 깊어지게 하는 힘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별거를 결심할 정도로 갈등이 있었던 우리는 한동안 방을 따로 쓰다가 다시 방을 합쳤다. 사귄 적이 없어서 이별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우리 사이의 갈등은 이별의 징조나 무시무시한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처럼 느껴진다. 갈등이 지나간 후에는 A와 방에서 오타쿠적 감상을 나누며 지냈다. 하루 종일 프랙털 이미지가 나오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거나 이런저런 의미 찾기 놀이(단어 하나를 생각해내 단어에 대한 의미를 쓴 후 공유하는 놀이)를 하는 식이다. 요즘은 나란히 앉아 사주명리와 상징을 공부하고 있다. 꼭 소비하거나 소유하지 않아도 함께 즐거울 수 있는 A를 나의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연인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 들쭉날쭉하고 커다란 존재다.

이름 붙이기 싫어하는 우리가 굳이 폴리아모리, 무질서한 관계라고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있다. 사랑의 이름을 독점해온 1:1 이성애 연애, 결혼이 아닌 다른 관계도 존중되길 바라서다. 아직 비독점 다자동거나 다자결혼(폴리가미), 동성결혼 등 다양한 관계에는 권위를 주지 않는 사회다. 관습과 제도를 거쳐서 승인된 사랑의 규칙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만들어가는 독창적인 약속도 관계에서 권위를 가질 수 있다. 의미를 부여하는 권위는 우리에게 있으니까.

폴리아모리 커뮤니티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커뮤니티에 들어가 회원 가입을 했다. 함께 즐기고 연대하기 위해서다. 무질서한 관계의 사랑방식도, 폴리아모리스트도 성소수자로 분류된다. 당연한 일이다. 내 안에 무수한 소수자성이 있듯, 모든 고유한 관계는 소수자 서사다. 사랑이 차별과 한패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나이, 지역, 성정체성, 성지향성, 관계지향성, 신체적/정신적인 일시적/영구적 불편함, 학력, 학벌 등에 대한 정보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 유출할 수 없으며, 이에 기반한 그 어떠한 라벨링, 차별, 혐오 역시 허용되지 않습니다. 누구도 부당하게 소외되지 않는 평등하고 안전한 커뮤니티 운영을 위하여 구성원들 모두 적극 협조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폴리아모리 커뮤니티 공지사항에 적혀 있는 규칙이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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