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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인들의 헌법 이야기

문재인 정부는 이른바 과학기술 컨트롤타워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로 일원화하려 합니다. 컨트롤타워가 총리급에서 대통령급으로 격상되는 것이니, 그만큼 정부가 과학기술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과학기술을 여전히 경제발전의 도구로만 본다는 게 문제입니다.

  • 윤태웅
  • 입력 2017.11.01 10:39
  • 수정 2017.11.01 10:43

왕에겐 백성이 하늘이고, 백성에겐 먹고사는 일이 하늘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항우에게 밀리던 유방이 식량 창고인 오창을 포기하려 하자, 역이기가 유방한테 했다는 말입니다. 왕이 백성을 다스리던 옛날이나 시민이 정부를 세우는 오늘날이나 경제가 중요하긴 매한가지겠지요. 대한민국 헌법은 경제 조항을 제9장에 따로 두고 있습니다.

과학기술도 경제발전의 중요한 도구입니다. 시민의 세금으로 지원되는 과학기술 연구가 경제발전에 쓰이길 기대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국가 역량을 오로지 경제성장에만 집중하던 1960~70년대의 상황에선 더더욱 그러했겠지요. 하지만 모든 게 경제에 예속되거나 경제만을 위해 존재할 순 없습니다. 과학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을 보는 시선은, 대다수가 가난했던 60~70년대나, 그때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적 역량이 커진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과학기술은 경제 조항을 담은 헌법 제9장 127조에 다음과 같이 규정돼 있습니다. "①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②국가는 국가표준제도를 확립한다. ③대통령은 제1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자문기구를 둘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이른바 과학기술 컨트롤타워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로 일원화하려 합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헌법 127조 3항(과 1항)에 따라 설치된 기구로서 대통령이 의장입니다. 컨트롤타워가 총리급에서 대통령급으로 격상되는 것이니, 그만큼 정부가 과학기술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과학기술을 여전히 경제발전의 도구로만 본다는 게 문제입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설치 근거인 헌법 127조 1항에 그렇게 씌어 있으니 말입니다.

헌법은 법률의 토대입니다. 과학기술 관련 법률도 헌법 127조에 담긴 과학기술의 개념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과학기술기본법의 목적은 이러합니다. "이 법은 과학기술발전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여 과학기술을 혁신하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국민경제의 발전을 도모하여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인류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 밖의 과학기술 관련 법률들은 다 과학기술기본법의 목적에 따라 제·개정하도록 돼 있습니다. 헌법의 경제 조항인 127조 1항이 과학기술에 관한 모든 법률적 장치의 뿌리인 셈입니다.

과학기술엔 경제발전뿐 아니라, 사회문화의 진보나 환경 보전 등 다양한 활용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과학기술을 경제에 가둔다면 그 무궁무진한 활용 가능성을 억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과학은 사유방식입니다.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민주공화국 시민의 덕목이라 할 수 있지요. 문화로서 과학은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기도 합니다.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도구로만 여겨선 안 되는 까닭입니다.

최근 생물학연구정보센터가 과학기술인들에게 헌법 개정에 관해 물었습니다. 모두 2280명이 설문에 참여했는데, 헌법 127조 1항의 삭제나 개정이 필요하다고 답한 이들이 70%가 넘었다 합니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네트워크(ESC) 열린정책위원회도 회원 설문과 토론을 거쳐 127조 1항의 삭제를 요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울러 국가의 과학기술 장려 의무를 명문화해 총강에 두자는 제안도 덧붙였습니다. 과학기술을 과학과 기술로 분리해야 할지 그 여부 등 따져봐야 할 논점이 더 있습니다만, 우선 127조 1항의 삭제를 바라는 과학기술인들의 목소리부터 이렇게 전합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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