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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 다 됐네"라는 말이 주는 찜찜함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저게 어디를 봐서 한국의 좋은 점이라는 거지?” 요즘 유행하는 외국인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자꾸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진작부터 ‘고쳐야 할 한국 문화’로 지적되며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이 자꾸만 외국인들의 입을 통해 ‘한국만이 지니고 있는 장점이자 특징’인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뚝배기를 상 한가운데 두고는 모두가 각자의 수저를 담그며 먹는 식습관이 비위생적이라는 지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예능에 등장하는 외국인들은 이를 두고 ‘공동체적인 식사’라며 추어올린다. 만나면 일단 서로 나이 먼저 확인하고 형님과 동생을 정하는 ‘족보 정리’는 한국 사회를 수직적인 서열구조 안에 가두는 악습 중 하나인데, 외국인들의 입을 거치면 졸지에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챙겨주는 정의 문화’가 된다. 식당의 여성노동자를 ‘이모’라 부르는 언어습관에 대한 문제제기는 2011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나 고국에서 한국으로 여행 온 친구들을 고깃집으로 데려간 멕시코 출신 방송인 크리스티안 부르고스는 ‘이모’라는 호칭을 친구들에게 가르쳐주고 합창을 유도한다. 저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물론 이런 사례 중 적지 않은 수는 선의가 과한 탓에 생긴 일이리라. 남의 나라에 와서 낯선 문화를 접할 때 비판적인 입장으로 이를 바라보는 대신 문화상대주의적인 입장으로 접근해 최대한 좋은 점을 발견하려 노력한 결과일 테니 말이다. 그래도 한국에 오래 살아 그런 부분들이 어떤 맥락 위에 있는지 알 법한 사람들마저 그러고 있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이상해진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외국인 방송인들에게 왜 형이라고 안 부르고 이름으로 부르냐고 따져 물었다는 캐나다 출신 방송인 기욤 패트리의 일화를 들을 때, 자신이 고려대학교 어학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연세대학교 출신 방송인들과 각을 세우는 호주 출신 방송인 샘 해밍턴을 볼 때, 자연스레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이런 의문이 이는 것이다. 저 사람들은 한국 문화의 저런 부분들이 정말 좋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뼛속 깊이 습득하게 된 걸까? 한국 사회 안에서도 꾸준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점들을?

그들이 한국의 악습을 옹호하는 이유

나의 단점을 남에게서 발견하면 그게 그렇게 미운 것처럼,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지 않은 어두운 부분들을 한껏 체화한 외국인 방송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영 언짢고 찜찜하다. 찜찜함을 덜어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외국인 방송인들을 비판하는 것일 테다. “당신들이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부분마저 옹호하는 순간, 어떤 방향으로 고쳐 나가야 할지 충분히 숙의의 대상이 되어야 할 점마저 졸지에 ‘세계인이 인정한 한국의 고유한 특징’이 되어 고치기 어려워진다”고 말하면 되니까. 외국인 예능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이 흔히 취하는 태도이고, 나 또한 외국인 예능에 관해 비판적인 코멘트를 해야 할 때마다 그런 입장을 취해왔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한국에서 활동 중인 외국인 방송인들은 그저 자신들이 접하고 배워온 한국의 모습을 거울상처럼 비추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외국인 방송인들이 서열구조에 집착하고 한국 특유의 집단주의 정서를 체화하는 게 싫다면, 가장 근본적인 처방은 서열구조에 집착하고 집단주의 정서로 뭉친 한국 사회 자체를 바꾸고자 노력하는 것이리라. 거울에 비친 모습이 마음에 안 들면 몸단장을 새로 해야 하는 일이지, 거울을 깨거나 외면한다고 해서 못마땅한 모습이 바뀌는 것은 아닌 것처럼.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를 바꾸는 게 근본적인 처방이라는 걸 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한국에서 인기를 누리기 위해 한국의 악습까지 옹호하고 체화하는 외국인 방송인들의 행태는 그 나름대로 비판할 수도 있지 않으냐고. 나 또한 비판할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외국인 방송인들이 한국의 악습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준다고 한국 사회가 그걸 귀담아들을 준비가 되어 있긴 할까? 지금도 국내 거주 외국인들은 단체 회식이나 족보 정리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다가 “아,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는 비아냥을 사는 일이 부지기수고, 끊임없이 독도의 영유권이나 동해의 명칭 문제, 보신탕 문화에 대한 의견을 질문받으며 피아 식별의 대상이 된다.

한국 사회에 대해 대놓고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가는 “당신은 외부인이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는 식으로 발언할 자격 자체를 탄핵당하고, 그래서 앞에서는 말을 삼가고 다른 자리에서 비판적 의견을 냈다가 그 사실이 알려지면 “한 입으로 두말한다”며 손가락질당한다. 한국방송(KBS) <미녀들의 수다>를 통해 인기를 얻은 독일 출신 방송인 베라 홀라이터가 독일에서 출간한 저서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2009)을 통해 한국에 대해 일부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했다가 졸지에 ‘혐한’이라는 오해를 샀던 일이 불과 8년 전의 일 아닌가.

이렇게 자국의 관점과 동화되기를 요구하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환경 속에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성들을 체화해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 외에는 외국인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길이 그리 많지 않다. 물론 히딩크처럼 온전히 자기 방식으로 일을 하면서도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외국인의 예가 없는 건 아니지만, 모든 외국인들이 한국 축구를 월드컵 4강에 진출시키는 기적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얼핏 한국 사회가 이제 제이티비시(JTBC) <비정상회담>이나 한국방송 <이웃집 찰스>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이들의 다양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한국인의 마음속 깊은 한구석에는 외국인들이 한국에 동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본질적으로는 아직도 명절 특집 외국인 노래자랑을 보며 “와, 저 사람 한국 사람 다 됐구먼”이라 말하며 감탄하던 시절에서 그리 멀리 오지 못한 셈이다. 결국 지나치게 한국화되다 못해 한국 사회의 어두운 특성마저 체화해버린 외국인을 보며 내가 느낀 찜찜함의 진짜 정체는, 한국 사회는 왜 좀 더 다양한 가치를 포용하며 ‘우리’라는 경계의 문턱을 낮추지 않는가 하는 갑갑함이었다. 물론 그게 한국의 악습마저 옹호하는 외국인 개개인을 비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짜증도 찜찜함에 한몫했겠지만.

“공은 우리 쪽 코트에 와 있다”

나는 여전히 기욤이 자신보다 어린 외국인 방송인들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요구한다는 게 못내 불편하고, 크리스티안이 자기 친구들에게 “한국에선 식당의 여성노동자를 ‘이모’라고 부른다”고 알려주는 게 못마땅하다. 그들이 그런 부분까지 한국인들을 닮아가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한국 문화의 논쟁적인 부분에 제 목소리를 높여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굳이 경중을 따지자면 그들에게 ‘진짜배기 한국 사람’이 되기를 요구한 한국 사회의 잘못이 더 클 것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을 그들에게, 배척당할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입장을 바꿀 것을 요구할 권리 같은 건 내게 없다. 그러니 내 짜증과 불편함 또한 그런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외국인들을 향하는 대신 한국 사회를 향해야 하리라. 집단주의를 공중보건보다 우선하고, 상대와의 서열을 확실히 해두지 않고서는 친해질 수 없다 믿으며, 습관적으로 여성노동자를 비하하는 우리들 말이다.

한국인 스스로 한국 사회를 더 개방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수평적인 공간으로 바꿔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빠른 년생’까지 따져가며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따박따박 따지고 술잔 하나를 돌려 쓰며 “이것이 진정한 한국의 주도”라 외치는 외국인들을 계속 보게 될지도 모른다. 참 피곤한 결론이지만, 결국 또 공은 우리 쪽 코트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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