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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 아베처럼 못하는 이유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도널드 트럼프만큼 존경이나 신뢰와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인물도 드물지만 아베는 트럼프에게 젖은 낙엽처럼 달라붙어 '찰떡궁합'을 과시하고 있다. 미 대선이 끝나기가 무섭게 뉴욕으로 달려가 트럼프 당선인을 만난 첫 번째 외국 정상이 아베다.

  • 배명복
  • 입력 2017.10.26 06:27
  • 수정 2017.10.26 06:34
ⓒMatt Cardy via Getty Images

연합국에 패하고 일본이 취한 첫 번째 조치 중 하나가 점령군을 위한 '위안소' 설치였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고 사흘 만에 일 내무성은 외국군 주둔이 예상되는 전국 부현(府縣)에 위안시설을 설치하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패전 8일 만에 반관반민 성격의 '특수위안시설협회(RAA)'가 결성됐고, 곧이어 도쿄에 미군 전용 위안소 1호점이 문을 열었다. RAA는 최고급 의식주 제공 등을 약속하며 '특별 여자종업원' 모집에 나섰다. RAA에 소속된 윤락업주들은 황궁 앞에서 발대식을 갖고, 신(新)일본 재건과 일본 여성의 순결을 위한 멸사봉공의 결의를 다졌다.

전쟁 중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힘없는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했다. 전쟁에 패하자 자국의 헐벗고 굶주린 일부 여성들을 점령군의 성범죄로부터 대다수 부녀자를 지키는 '방파제'로 이용했다. 화대로 받은 달러는 전후 복구자금으로 쓰였다. 점령군을 위한 매춘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지만 전후 일본처럼 국가가 나서서 국책사업으로 추진한 예는 드물다.

인간을 민족이나 국적으로 갈라 일본인은 이런데, 한국인은 저렇다는 식의 이야기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불편함을 느낀다. 한국인이고, 일본인이기 이전에 같은 인간이다. 그럼에도 한국인과 일본인은 역시 다르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는 걸 솔직히 부정하긴 어렵다. 이율배반(二律背反)이다.

내 생각에 일본인은 한국인보다 실질적이다. 대의명분에 얽매이기보다 현실에 적응하고,기회를 이용할 줄 안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확실하게 머리를 숙이지만 자기보다 약한 사람은 짓밟는다. 때론 상냥하고, 때론 잔인한 두 얼굴로 철저하게 실속을 챙긴다. 좋게 보면 유연하고, 나쁘게 보면 이중적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도널드 트럼프만큼 존경이나 신뢰와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인물도 드물지만 아베는 트럼프에게 젖은 낙엽처럼 달라붙어 '찰떡궁합'을 과시하고 있다. 미 대선이 끝나기가 무섭게 뉴욕으로 달려가 트럼프 당선인을 만난 첫 번째 외국 정상이 아베다. 트럼프의 취미를 저격해 골프채도 선물했다. 취임하자마자 트럼프는 아베를 플로리다에 있는 자신의 마라라고 리조트로 초대해 27홀을 함께 돌았다. 다음달 초 아시아 순방에서 트럼프가 제일 먼저 찾는 일본에서 가질 첫 일정도 아베와의 골프 회동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사를 모시는 일은 부하들에게 고난도 미션이다. 얼마 전 워싱턴포스트는 백악관 참모 18명을 인터뷰해 트럼프를 다루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했다. 첫째는 무조건 칭찬.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이 최고의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둘째는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이 즐겨 쓰는 회피 전략. 시간을 끌면서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수법이다. 셋째는 조용한 반대. 이견을 솔직히 전달하되 갈등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는 방법이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이 대표적이다.

어떤 신공(神功)을 펼쳤는지 모르지만 아베는 트럼프의 입과 귀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할 때마다 트럼프가 가장 먼저 찾는 외국 정상이 됐다. 북한 문제로 트럼프가 한국 대통령과 다섯 번 통화하는 동안 아베와는 13번 통화했다. 이를 통해 아베는 철통같은 미·일 동맹으로 국가 안보를 지킬 수 있는 지도자라는 인식을 심어 줬다. 그 이미지가 그제 총선에서 유리하게 작용하면서 아베는 필생의 꿈인 평화헌법 개정까지 가능할 정도의 압승을 거뒀다. 북한의 도발과 트럼프 변수라는 악재를 호재로 바꿔 전쟁을 할 수 있는 군사대국으로 가는 문을 연 아베에게서 새삼 일본인의 진면목을 보는 느낌이다.

문재인은 왜 아베처럼 못하느냐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왜 한국인은 일본인처럼 못하느냐고 따지는 것만큼 어이없는 일이다. 한국인이 일본인일 수 없듯이 문재인도 아베일 수는 없다. 두 사람의 성격과 철학이 다르고, 두 나라가 처한 여건과 환경이 다르다. 문재인은 문재인답게 가는 수밖에 없다. 한국을 찾는 트럼프를 최대한 예우를 갖춰 정중하게 대하면서도 당당하게 할 말은 해야 한다.

북한을 최대한 압박하되 대화의 문은 열어 놓아야 한다는 점, 외교적 해법을 소진하기 전에 군사적 해법은 안 된다는 점, 어떤 경우에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공약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점, 한국이 미국을 필요로 하는 만큼 미국도 한국을 필요로 한다는 점, 한국 모르게 중국과 직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아베는 아베답게, 문재인은 문재인답게. 그게 정석이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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