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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넛지'를 위하여

넛지 정책의 실행은 정부가 하더라도 넛지 입안과 투명성 보장·감시 등은 언론이 먼저 나서자는 것이다. 넛지를 둘러싼 이념 갈등은 물론 정부가 넛지 입안의 주체가 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실질적인 위험을 피해가자는 뜻과 더불어 넛지를 디지털 시대에 쇠퇴해가는 언론의 갱생을 위한 탈출구로 삼음으로써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기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 강준만
  • 입력 2017.10.23 08:04
  • 수정 2017.10.23 08:09
ⓒScott Olson via Getty Images

언론이 넛지의 주체가 되는 '한국형 모델'을 제안하고 싶다. 넛지 정책의 실행은 정부가 하더라도 넛지 입안과 투명성 보장·감시 등은 언론이 먼저 나서자는 것이다. 넛지를 디지털 시대에 쇠퇴해가는 언론의 갱생을 위한 탈출구로 삼음으로써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기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스웨덴 환경보호국이 2014년에 발표한 '넛지 보고서'를 읽으면서 적잖이 놀랐다. 85쪽에 이르는 장문의 보고서 내용이 매우 알찼기 때문이다. 넛지가 탄생지인 미국보다는 오히려 유럽, 특히 북유럽 지역에서 인기가 높은 것은 넛지의 이념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는 중도 노선에 대한 거부감이 적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이 '넛지'라는 책의 공동 저자인 시카고대 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에게 돌아갔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내심 북유럽 사람들이 좋아할 이야기를 해야 노벨상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중도 노선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나라에서 넛지의 활용도가 높다는 것은 가볍게 여길 사실은 아니다. '넛지'(nudge)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라는 뜻으로, '넛지 이론'은 강제적 지시보다 부드러운 개입이 변화에 효율적이란 내용을 담고 있다.

세일러와 더불어 '넛지'를 쓴 캐스 선스타인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첫 임기 4년 동안 백악관에서 연방정부의 모든 규제를 감독하는 정보규제국의 수장으로 일했는데, 그의 임기 동안 넛지를 둘러싼 이념적 논란이 뜨거웠다. 선스타인이 규제를 혐오하는 보수파의 거센 공격 대상이 된 것도 그런 논란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우익 논객 글렌 벡은 "선스타인은 가장 사악한 인간,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는데, 선스타인은 이런 공개적인 비난뿐만 아니라 공개되지 않은 집주소로 살해 협박을 담은 것을 포함해 많은 증오 편지를 받았다.

반면 영국에서의 넛지 정책은 보수당 정부에 의해 실천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진보주의자들의 비판이 많은 편이다. 세일러가 영국 정부에서 넛지 자문 요청을 받았을 때 우쭐한 기분이 들면서도 당혹스러웠다고 말한 것도 그런 사정을 말해준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내 평생에 걸쳐 사람들이 나를 보수주의자라 칭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급진적이고, 말썽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짜증난다는 것을 포함하여 책에는 어울리지 않을 여러 다양한 표현들이 주로 나를 설명하는 형용사들이기는 했지만, 보수적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한국은 '넛지'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나라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사실 정책에서의 활용은 미미한 편이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이 넛지 행정을 열심히 펴고 있기는 하지만, 주로 교통안전, 범죄 예방, 질서 유지에만 치중돼 있다. 넛지를 둘러싼 이념 공방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은 정부가 넛지 정책의 주체로 나선 반면, 한국에선 그렇게까지 전면적인 정책으로 시행되진 않았기 때문에 이념적·정치적 논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과 영국에서 넛지 논쟁이 뜨거운 이유는 넛지를 이념적 시각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넛지 논쟁이 실제적 측면보다는 지나치게 이념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이는 정부에 대한 불신이 강한 상황에서 정부가 넛지 입안과 실행의 주체가 되는 한 피하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한국은 넛지 정책에선 후발 주자이지만, 지난 10년간 미국과 유럽에서 축적된 넛지 경험을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활용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나는 정부가 아닌 언론이 넛지의 주체가 되는 '한국형 모델'을 제안하고 싶다. 넛지 정책의 실행은 정부가 하더라도 넛지 입안과 투명성 보장·감시 등은 언론이 먼저 나서자는 것이다. 넛지를 둘러싼 이념 갈등은 물론 정부가 넛지 입안의 주체가 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실질적인 위험을 피해가자는 뜻과 더불어 넛지를 디지털 시대에 쇠퇴해가는 언론의 갱생을 위한 탈출구로 삼음으로써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기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모든 언론, 특히 지역 언론이 시민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넛지에 고정 지면을 할애하자. 이종혁 교수가 이끄는 광운대 공공소통연구소와 '중앙 선데이'가 협력해 여러 넛지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겨 적잖은 사회적 호응을 얻은 것처럼 산학협력 체제로 가면 더욱 좋을 것이다. 넛지의 참여 기반을 넓히면 넛지를 궁리하는 과정에서 지역의 공공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의제 설정·확산이 이루어지는 효과를 얻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문제를 제기하고 갈등을 부각시키는 것만이 언론의 사명이라는 오래된 미신에서 벗어나 문제 해결에도 눈을 돌릴 때에 비로소 언론의 살길도 열릴 것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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