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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가 알린 두바이의 경제 기적

실제로 두바이 경제의 최우선 과제는 석유 이후의 두바이 경제였다. 정신 나간 지도자가 아니라면, 이런 상황에서 개인적 취미 생활로 메이단 경마장을 건설하고 두바이 월드컵을 개최했을까? 혹시 두바이의 연간 13% 고도성장에 메이단 경마장과 두바이월드컵이 꼭 팔요했던 것은 아닐까? 혹시 셰이크 모하메드가 두바이 월드컵을 경제성장의 전략으로 선택했던 것은 아닐까?

  • 최현우
  • 입력 2017.10.23 12:30
  • 수정 2017.10.23 12:34
ⓒ두바이 월드컵 공식 홈페이지

1. 메이단 경마장

두바이 시내에서 외각으로 왕복 12차선이 시원하게 뻗었다. 평평한 사막에 아스팔트만 깔면 되니 어디서나 도로가 시원하다. 교통 체증이 생겼다는 뉴스에서 차량 속도가 우리나라 국도 드라이브할 때의 느낌이다. 두바이 시내에서 10여 분 달리면 황량한 사막 가운데 거대한 현대식 구조물이 나타난다.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규모의 경기장과 250개 객실을 소유한 최고급 호텔이 다가선다.

이 호화로운 경마장에서 1월부터 3월까지 1년에 달랑 3개월 경마가 열린다. 그것도 목요일 저녁에만, 한 주에 한 번 사용한다. 수백 마리의 말이 있고, 한 마리당 천 평의 초지가 제공된다.

사막에서 천 평의 초지. 초지를 만들려면 진흙을 가져와야 하고 풀이 마르지 않도록 끝도 없이 석유보다 비싼 물을 주지 않으면 풀은 말라 죽는다. 마구간에는 전부 에어컨 시설이 되어 있고 최상으로 관리된다. 경주로는 풀뿌리가 섞인 고급 흙으로 만든 진흙 주로와 잔디 주로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말이 있는 마구간에서 경주로까지는 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지하통로로 연결된다. 1 킬로미터를 말이 지나가면 말이 소변도 보고 대변도 본다. 이걸 치우고 에어컨으로 공기를 정화해야 한다. 1년에 달랑 12일 사용하는 이 경마장을 운영하려면 얼마나 소요될까?

그런데 이 경마장을 운영하는 수입은 제로다. 대부분 경마장은 경마꾼들이 경주에 돈을 걸고 그렇게 베팅한 돈의 적게는 20퍼센트 많게는 30퍼센트를 따로 떼고, 그 가운데 일부를 운영 수익으로 잡는다. 하지만 이슬람국가인 두바이에서는 도박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니 경주하는 12일 동안 경마관계자를 제외하고는 손님이 전혀 없다.

단 하루, 두바이 월드컵을 열리는 날만 예외다. 하지만 이날은 더 많은 돈이 든다. 우선 상금으로 나가는 돈만 3천만 달러, 360억이다. 마지막 한 경주 두바이월드컵 클래식에 걸린 상금만 천만 달러다. 개막식에 벌이는 행사와 폐막행사에는 세계 최고의 예술가들이 세계 최고의 쇼를 펼친다. 이날도 경주에 대한 베팅은 없어서 매출은 제로다. 이게 뭔 짓인가?

어디든 땅만 파면 쏟아지는 석유에서 나오는 돈을 주체하지 못해서, 정신 나간 중동 국왕의 천박한 취미 생활이라는 것 이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도 이 경마장과 두바이월드컵 경주가 석유를 기반으로 흥청망청 사막에 돈 뿌리는 만수르의 개그(Gag)로 생각했다. 그리고 두바이 월드컵은 현재의 국왕, 셰이크 모하메드가 죽으면 그 날로 끝이라고 확신했다.

메이단 경마장과 두바이월드컵은 정말 억만장자 중동 토후국 촌장의 촌스러운 취미 생활과 돈 자랑일까?

2. 두바이라는 나라

누군가 스마트폰으로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에서 '오만의 문화와 역사 전'을 개최한다고 알려왔다. 전시회 주제는 '신드바드와 유향의 나라'라는데 신드바드는 들어봤지만, 유향은 나도 모른다. 모르긴 해도 오만이 유서 깊고 자랑스러운 나라임이 틀림없을 텐데 나는 아는 게 전혀 없다. 주변에 오만의 수도를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외국인에게 나라 자랑할 때 내세울 게 없는 나라는 과거의 유산, 조상이 이루어놓은 걸 내세운다. 잘 나가는 나라는 현재를 자랑한다. 아니 자랑할 필요도 없이 모두 알아서 치켜세운다. 오만과 인접한 곳에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인이 아는 두바이가 있다. 페르시아 반도에 위치한 사막 국가로 산유국이며 이슬람 국가, 두바이와 오만은 다른 게 없다. 역사적으로 오만인은 두바이인을 우습게 알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은 칼리프, 오만의 통치자는 왕(king)이라 부르지만, 두바이의 통치자는 족장이라는 셰이크(sheiks)라 부른다. 그런데 한 나라는 인당 국민소득 6만 불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진국이고 다른 한 나라는 수도권 대학에서 아라비안나이트와 유향으로 소개해야 한다.

두바이 하면 떠오르는 게 뭘까? 부르즈 칼라파, 팜 월드, 팜 주메이라, 세계 최대의 쇼핑물, 사막의 스케이트장, 억만장자 만수르....

세계인이 가장 많이 찾는 중동 도시는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의 출생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다. 이슬람 신도인 무슬림은 살아있는 동안 메카를 참배하는 것이 의무이고 방문하기를 꿈꾼다. 이런 열망으로 매년 300만 명이 메카를 찾는다. 90년대까지는 중동의 관광 수요는 이것이 전부였다. 현재 중동을 아는 사람들은 두바이를 '메카보다 더 확실한 관광 메카'라고 부른다. 두바이를 찾는 관광객은 메카의 세배, 연간 천만 명에 이른다. 무엇을 보려고, 왜 세계인이 두바이를 찾을까?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를 우리가 알게 된 것은 2000년 초반이다. 무한한 창의로 사막에 만들어진 첨단 도시 팜 쥬메이라와 버즈칼라파 사진과 함께였다.

팜 쥬메이라

두바이 앞바다, 초록빛 페르시아 바다에 화가가 그림 그리듯 야자수 모양의 리조트 섬을 만들었다. 초록빛 잔디와 야자나무 들어섰고, 초호화 리조트와 최고급 호텔이 서 있다. 영국 축구 영웅 데이비드 베컴을 비롯한 유럽의 부호들이 이 리조트를 분양받는다는 소식도 있었다. 아파트 전세도 버거운 사람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이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남의 일이지만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 의문점은 있었다. 인도양 페르시아 앞바다에는 파도가 없을까? 여름 태풍은 없을까?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으면 항해하다가 폭풍에 난파하는 이야기도 많은데 유독 두바이 앞바다에는 365일 잠자듯 잔잔할까? 만약 우리나라 같은 여름 태풍이 온다면 그 모래섬의 아슬아슬한 리조트는 어떻게 될까? 단순히 해안을 메꾸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 야자수 모양 섬을 만들면 바다 물길이 바뀌어 해안선의 침식이 일어날 텐데, 시간이 지나도 괜찮을까? 야자수 형태 섬을 원형으로 둘러싸면 바닷물이 움직이지 않아 썩은 물이 될 텐데 최고급 리조트 앞에 썩은 물이 고여 있다면 누가 살까?

그래서 이 리조트 분양받는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기우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팜 쥬메이라에 이어서 두 배 큰 야자수 섬이 등장했고. 팜 월드까지 들어섰다. 우려하는 문제를 현대 과학기술로 완벽하게 해결했다는 것이다. 바다에 야자수 인공섬을 만든다는 생각도 도전적이고 혁신적이며 창의적이지만, 그보다 더욱 큰 창의는 공학적으로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사막의 스키장, 스케이트장이 들어섰고, 세계를 놀라게 할 건물과 시설이 들어섰다. 하지만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이런 곳이 아니다.

부르즈 칼라파

부산을 찾는 중동 사람들은 동양 최대 규모 백화점이라는 롯데백화점을 보고는 '에게게?'라는 반응을 보인다. 잠시 생각을 한 뒤 '아! 백화점 중에 제일 큰 것!'이라며 깨닫는다. 백화점과 몰은 규모가 다르다. 두바이의 에미리트 몰은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없다. 누구든 에미리트 몰에서 길을 잃어 직원에게 물으면 전기차로 안내한다. 쇼핑몰 안에 자동차가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자동차를 타고 다녀야 몰을 온전하게 볼 수 있다.

두바이 인구는 200만인데, 외국인이 얼마나 와야 이 규모의 쇼핑몰이 유지될까? 이 또한 적자 보며 석유에서 나오는 돈을 무한정 쏟아붓는 것일까?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밤이 되면 에미리트 몰과 부르즈 칼라파에 접한 거대 호수를 배경으로 분수 쇼와 불빛 쇼, 음악회가 펼쳐진다. 평생 관광지에서 동영상 찍은 적이 없는 아내도 쉼 없이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지구상에서는 볼 수 없는 음악과 분수쇼, 불꽃쇼가 펼쳐진다. 그 감동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쇼를 보기 위해 10시간 비행을 마다하지 않고 세계에서 몰려든다. 이 또한 석유에서 생기는 돈을 무한정 쏟은 결과일까? 석유가 어느 정도 나와야 이 정도의 사치를 부릴 수 있을까?

이쯤에서 두바이 경제통계를 확인해야 한다. 2016 기준 아랍에미리트는 인당 국민소득이 6만 7천 불이고 세계 7위를 차지한다.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 7개 토후국 중에도 최고수준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아랍에미리트 석유는 95퍼센트 아부다비에 있고, 두바이의 부존량은 5% 미만이다. 그나마 2020년에는 고갈된다. 석유 수출이 두바이 경제에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놀랍게도 3퍼센트가 되지 않는다. 인당 국민소득 6만 7천 불 가운데 6만 5천 불은 석유가 아닌 곳에서 버는 것이다. 적어도 팜 쥬메이라, 버즈 칼라파, 메이단 경마장, 두바이 월드컵과 같은 투자가 석유에서 나오는 돈을 주체하지 못해서 펑펑 돈 뿌리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아랍에미리트는 7개의 토후국이 연합한 국가다. 각 토후국이 자치권을 가지고 운영하며, UAE는 실질적으로 아부다비와 두바이가 주도한다. 두바이에 대한 역사기록은 1075년에야 등장한다. 다음 기록은 1833년 당시 800명의 부족민을 이끌고 두바이 토후국을 건설한 것으로 나타난다. 두바이는 황량한 모래사막 뿐 이었고 먹을 거라곤 점처럼 떨어진 오아시스에서 나는 대추야자뿐이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바다로 뛰어들어 목숨 걸고 진주조개를 찾았다. 진주조개는 공산품이 아니므로 채취량에 따라 수입은 들쭉날쭉했다. 간간히 출몰하는 페르시아만의 해적도 두바이인과 무관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는 어렵게 채취한 진주를 팔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니 대공항이 닥쳤고 어느 정도 수습되자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이어서 일본에서 양식 진주 개발에 성공했다. 견뎌도 견뎌도 굶주림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고 기아를 피하고자 주변국으로 흩어졌다. 심지어 현재 기아에 시달리는 에티오피아와 아프리카국가로부터 구호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에 1966년, 석유가 발견되었지만, 생산기간은 2020년으로 고갈이 눈앞에 있었다. 석유가 나는 동안 석유 없이 사는 방법을 찾지 못하면 두바이의 미래는 없었고, 두바이 국민과 지도자는 탈석유 경제개발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실제로 두바이 경제의 최우선 과제는 석유 이후의 두바이 경제였다. 여기까지 알고 나면 궁금증을 가져야 한다.

정신 나간 지도자가 아니라면, 이런 상황에서 개인적 취미 생활로 메이단 경마장을 건설하고 두바이 월드컵을 개최했을까? 혹시 두바이의 연간 13% 고도성장에 메이단 경마장과 두바이월드컵이 꼭 팔요했던 것은 아닐까? 혹시 셰이크 모하메드가 두바이 월드컵을 경제성장의 전략으로 선택했던 것은 아닐까?

두바이 국왕이며 아랍에미리트 부통령인 셰이크 모하메드 부부가

자신의 말과 함께 두바이 월드컵 우승순간을 즐기고 있다.

3. 말과 셰이크 모하메드

두바이 구시가지 포구 근처 신디가에 조그만 이층집이 있다. 옛날 족장 집이다. 현재 두바이 지도자 셰이크 모하메드는 이곳에서 1949년 알막툼 가의 네 아들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인구 수천 명에 불과한 토후국이니 알막툼 가문은 우리 기준으로 보면, 규모가 조금 큰 부락의 촌장이다.

모하메드는 걸음마를 배우기 전부터 말을 탔고,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말과 놀았다. 점심 후에는 말을 타고 사막을 달리는 것이 일과였다. 그보다 더욱 아련한 기억이 있었다. 2016년 두바이월드컵 개막식에서 셰이크 모하마드는 그 기억을 이야기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랜 기억은 사막에서 말이 습보로 달리는 것이었다. 안장 위에는 아버지가 나를 안고 있었다. 나는 몸으로 전해오는 그 리듬을 기억한다. 아버지가 너무나 사랑했던 백색 씨수말 '사글라위'의 등 위였다. 모래 언덕을 가로질러 씨수말의 긴 보폭과 함께 하늘과 모래가 구르는 모습을 기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허리를 두르고 있던 아버지의 든든한 팔과 표현할 수 없는 즐거운 느낌, 내 영혼의 평화를 기억한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이런 분위기에서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젖먹이 때부터 국정 운영을 지켜보았다. 아버지 셰이크 라시드는 1958년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굶주림에 벗어나기 위해 두바이의 지리적 위치를 활용한 항만건설에 전념했다. 하지만 두바이에는 건설자금이 없었다. 마침 발견된 석유는 하늘의 축복이었다. 이렇게 건설된 라시드 항구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어서 더 큰 규모의 항구를 만들면서 두바이는 굶주림에서 벗어날 최소한의 기반을 갖추었다.

이후 셰이크 라시드는 외교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고 셰이크 모하메드를 영국 케임브리지 언어연수원에 유학 보냈다. 영국 유학은 모하메드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갈고 닦은 승마 실력으로 이듬해 영국에서 열리는 승마대회에 출전했고, 말을 타고 벌이는 사냥을 즐기며 영국의 상류층과 확실한 친분을 쌓았다. 후일 이때 사귄 영국 친구 중 일부는 언론계에 진출했고, 자주 두바이 특집을 만들어 유럽 사회에 두바이를 알렸다. 케임브리지 유학 시절 모하메드는 경마가 열리는 뉴마켓을 자주 찾았고 경마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러면서 새로운 의문을 가졌다.

"경마의 종주국은 아랍인데, 왜 영국을 종주국이라고 할까? 아랍의 경마 전통은 어디로 갔을까?"

근대 축구의 종주국은 영국이지만 기원을 찾아가면 중국이다. 근대 경마의 종주국 또한 영국으로 알려졌지만, 경마의 종주국은 아랍이다. 유럽의 경마 경주는 마차경주였지, 한 사람이 한 마리 말을 타고 빨리 달리는 경기형태는 역사적으로 아랍밖에 없었다. 뉴마켓의 경마를 보면서 모하메드는 경마의 중심을 두바이로 가져와야겠다는 생각, 어쩌면 두바이 월드컵의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후일 그는 경마 산업에 뛰어든 배경을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나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국가의 명예를 드높이는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아랍이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다. 나 자신을 위한 것만 아니라 국가와 아랍 전체를 위한 것이다. 유럽의 마주, 명마들과 경쟁하면서 나는 아랍을 대표한다. 그들과 경쟁에서 이겼을 때 나는 아랍의 자부심을 느낀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당시 영국의 마주, 조교사, 기수보다 경마 지식이 깊었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마주이자 조교사, 말 관리사, 기수였기 때문이다. 소년 시절 셰이크 모하메드는 집안의 마방에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소우다움 할래그'라는 암말을 발견했다. 귀 윗부분이 찢어지고 굽은 다리를 가졌기에 모두가 불길하다고 여겼다. 모하메드는 해마다 두바이 해안의 쥬메이라 비치에서 열리는 경마대회에 이 말을 출전시키기로 결심했다. 굽은 다리 치료가 우선 과제였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말의 다리를 고칠 수 있는 좋은 허브가 있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말의 다리 각도와 관절을 살피고는 말의 문제는 가끔 눈에 보이는 증상에 있는 게 아니라고 설명하며 말 다리를 고치기 위해 발굽을 어떻게 깎아야 하는지 설명해주었다. 소년은 해변을 달리고 말을 바다에 수영시키며 석 달간 이 암말을 직접 관리하고 훈련했다. 대회에는 자신이 직접 말을 타고 해변 경주에 참가했다. 출발선에 설 때까지 아무도 그의 출전 사실을 몰랐다. '할래그'는 우승마와 1마신차로 두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날 밤, 모두가 떠난 해변 경기장에서 소년은 암말과 함께 누웠다. 말의 배를 쓰다듬으며 밤새워 거듭거듭 말과 이야기 하며 잠들었다.

'네가 내게 해준 모든 것이 감사하다. 나와 이런 경험을 함께해준 것이 고맙다. 모든 것이 네 덕분이다."

페르시아 바다 위에는 별빛이 쏟아졌고, 암말의 따뜻한 체온과 편안한 숨소리가 깊은 잠으로 소년을 이끌었다.

셰이크 모하메드의 부인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날 경주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었다. 두바이 월드컵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설명하는 경주였다. 두바이 해변을 따라서 뛰는 경주가 세계 경마계가 주목하는 경마대회로 발전하게 한 계기였다." 라고 말했다. 부인은 말하지 않았지만, 세계 경마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신 또한 이 경주에서 출발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1968년 다시 6개월 과정의 영국 몬스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귀국 후에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쏟아졌다. 적대관계에 있던 아부다비와 두바이는 협력하여 아랍에미리트를 건국하기로 했고, 모하메드는 22세 세계 최연소로 아랍에미리트 국방부 장관에 올랐다. 1990년 셰이크 라시드가 사망하며 장남인 셰이크 막툼 빈 라시드 알막툼이 두바이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1995년부터 사실상 국정은 3남인 현재 국왕 세이크 무하마드가 운영했다. 2006년 장남인 형이 사망하면서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다.

1995년 셰이크 모하메드가 사실상 국정을 담당하면서 두바이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분초를 나누어 사용하는 일 중독자로 알려져 있다. 보고서는 참고일 뿐 직접 현장을 수행원이나 비서 없이 혼자서 다니며 확인했다. 팜 쥬메이라, 부르즈 칼라파, 에미리트 몰, 국제금융센터, 에티하드 항공 등 두바이의 변화는 끝이 없었다. 이런 엄청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그는 두 명의 부인과 함께 매년 중동에서 열리는 승마대회에 빠짐없이 참가했다.

2010년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160km 말 마라톤(인듀어런스) 경주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긴다. 두 번째 아내 또한 바레인의 장애물 경기 승마선수로 승마에 대한 자문을 해주다 결혼에 이른 것으로 유명하다. 부인은 2000년 요르단 대표로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했고 이후 8년간 국제승마연맹(IEF)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셰이크 모하메드의 자녀 또한 두바이 왕족의 전통에 따라 승마를 배웠고 아랍에미리트를 대표하는 승마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승마하는 사람이 우승을 기뻐하는 방식은 유명하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리페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당시 마케도니아는 남쪽을 정벌하며 끝없이 전쟁을 벌였다. 전쟁 막사에 있던 필리페 왕에게 전령이 도착했다.

"폐하, 오늘 남쪽으로 갔던 우리 군대가 적을 무찌르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기쁜 일이다. 전령에게 시원한 음료와 음식을 내주어라. 승장에게는 별도로 포상하리라"

이어 또 다른 전령이 도착했다.

"폐하, 왕비님이 왕자를 생산하셨습니다. 폐하의 왕국을 이을 재목이옵니다."

"경사로다. 전령에게 술과 음식을 주라. 산모와 산파, 시녀들에게 선물을 내릴 것이다."

또 새로운 전령이 도착했다.

"폐하, 방금 폐하의 말이 경마대회에서 우승하였사옵니다."

"뭐라고? 우승이야? 당장 잔치를 준비하라. 당장! 그대들은 잔치를 준비하고, 전령은 이리 가까이 오라. 그래 어떻게 이겼는가? 말은 다친 데가 없고? 어서 말해보라. 어서!"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셰이크 모하메드의 아들이 승마 지구력경기에서 대표선수로 출전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하메드는 직접 카타르로 가서 전 경기를 참관했다. 왕자는 개인 및 단체 금메달을 땄는데 아들이 금메달을 따자 아이처럼 뛰어오르며 "내 생애에 오늘처럼 기쁜 날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머리에서 말이 떠나는 경우는 드물다. 모든 대화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난다. 정부 관료들에게 늘 속도를 강조하면서 "큰 것이 작은 것을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경마에서만은 빠른 것은 느린 것을 항상 이긴다."고 말했고 "석유가 고갈된 뒤에도 두바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이 앞에서 경제를 끌고 그 뒤에 정치라는 마차가 뒤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전통적인 마주의 역할도 바꾸었다. '마주는 마주실에서 샴페인 마시며 담소나 나누다가 경주 5분 전에야 예시장에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영국, 일본의 마주들과는 달리 마방을 직접 보고, 말이 무엇을 먹는지 알려고 했고, 수의사가 어떤 치료를 하는지 물었다. 조교사들이 놀랄 만큼 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고, 조교사와 말 관리사, 기수를 고용인이 아니라 함께 말을 보살피는 파트너로 대했다.

부인의 말에 따르면 모하메드가 어렵고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하거나,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사람들은 어디서 그를 찾아야 하는지 안다고 한다. 그럴 때 그는 마방에서 말과 단둘이 대화하고 있다.

두바이 국왕이자 아랍에미리트 부통령, 아랍에미리트 총리이자 수많은 국영기업을 이끄는 CEO지만 셰이크 모하메드는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승마인'으로 소개하는 사람이다. 입버릇처럼 "경마의 품격이 국격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두바이월드컵 창설과 운영이 졸부의 허영이나 천박한 취미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두바이 국왕 세이크 모하메드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160km 말 마라톤 경주에서 역주하고 있다.

4. 두바이 경제와 두바이 월드컵

매년 3월 마지막 주 목요일,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마장과 250개 초호화 객실의 메이단 호텔에는 전 세계에서 온 유명인사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다. 세계가 주목하는 두바이 월드컵 클래식 경주를 보기 위해서다.

TVG, HRTV가 생중계하고 미국의 ABC 방송이 중계한다. 50 디램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 경마장에는 베팅이 없다. 경주만 즐기는 대회다. 총상금 3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360억의 상금이 걸린 9개 경주가 열린다. 8개 경주는 세계 공통의 경주마 더러브렛이 출전하는 경주이고 나머지 하나는 순수 아라비아 말이 출전하는 경주다.

화려한 기념 쇼와 함께 시작되는 마지막 9경주가 세계인이 주목하는 두바이월드컵 클래식이다. 이 한 경주에만 120억의 상금이 걸려있다. 세계 최고의 예술가와 이벤트 팀이 준비한 갖가지 화려한 쇼가 열린다. 120억도 큰돈이지만 우승마에게는 또 다른 보상이 기다린다. 두바이월드컵 클래식 우승마는 은퇴 후 씨수말로서의 가치가 300억을 넘긴다. 이 대회는 1996년에 나드세번 경마장에서 처음 개최했고 2009년 메이단 경마장이 완공되면서 메이단 경마장에서 열리고 있다.

이 화려한 메이단 경마장과 두바이월드컵에 대해 그럴싸한 소문과 오해가 있다. "청년기의 셰이크 모하메드는 영국에 유학했는데 근처에는 너무나 유명한 뉴마켓 경마장이 있었다. 그는 경마에 심취해서 경마가 열릴 때마다 경마장에 있었다. 하지만 중동의 왕자임에도 귀족인 영국 마주들은 그를 대접해주지 않았다. 마주가 될 수도 없었고 말을 살 수도, 자신의 말을 경주에 출전시킬 수도 없었다. 두바이에 석유가 발견되자마자 그는 경마장을 짓고, 가장 비싸고 좋은 말을 사 모으고, 자신을 무시했던 유럽인을 상대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쇼, 가장 거대한 경마대회를 열었다"라는 오해다. 사실과 많이 다르다.

그가 영국에 유학했고, 유학 시절 뉴마켓에서 열리는 경마장에 빠짐없이 간 것은 사실이지만 영국인들에게 열등감을 느낀 것도 아니었고,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두바이월드컵을 개최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사실 그는 유학시절 승마로 영국의 상류층과 친밀한 교류를 맺었다. 또한, 셰이크 모하메드는 영국유학에서 돌아온 후 1977년 영국의 마주가 되었고, 그해 6월 20일 암말 '하타'가 첫 우승을 거두었다. 81년에는 영국의 경주마 생산목장을 인수해서 본격적으로 경마에 참여했고 1994년까지 영국, 호주, 일본, 프랑스에서 열리는 대상경주에서 빠짐없이 우승마를 배출했다. 두바이 월드컵이 없었어도 영국과 유럽의 상류사회에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다. 두바이 월드컵 창설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아랍에미리트 석유의 95퍼센트는 아부다비에 있고, 두바이의 부존량은 매우 적을 뿐 아니라, 2020년이면 고갈되므로 석유가 있는 동안 석유 없이 살 수 있는 경제구조를 구축하지 못하면 두바이는 20세기 초의 굶주림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급박한 경제 상황을 앞에서 설명했다. 부왕의 항만건설로 최소한의 생존기반은 마련했지만, 번영과 성장에는 부족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부동산, 관광, 금융, 물류 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런 산업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한데, 두바이에서 나는 석유 수입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두바이는 이런 자금을 거의 해외에 의존하는 외부자금의존형 경제개발이 불가피했다.

현재 두바이 경제는 관광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가 익히 들은 초대형 건물과 휴양지는 두바이의 돈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모두 해외 투자자금으로 건설했고,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을 비롯한 유명인들이 분양받았다. 아무도 모르는 중동의 사막 도시에, 번듯한 건물 짓고 놀이시설을 건설한다고 해서 사람이 오지는 않는다. 관광과 부동산투자를 위한 자금유치, 개발된 부동산을 분양하려면 두바이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두바이를 알리기 위해 고심했다. 친분 있는 영국 상류층을 통해 여러 차례 매체에 두바이 특집을 마련하고 직접 발로 뛰며 두바이를 알렸지만, 95년까지 두바이를 아는 사람은 중동국가와 두바이를 통치했던 일부 영국인뿐이었다. 두바이를 알리기 위해 자동차 F1 경주, 프로골프 투어 데저트 클래식, ATP 테니스대회, 낙타경주, 드론경주를 열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실제로 1994년 셰이크 모하메드가 미국에서 열리는 그레이드 1(G1) 경주인 산타아니타 핸디캡에서 레드 비숍(Red Bishop)이라는 말로 우승했지만 몰려든 사람들은 어느 나라 말인지 몰랐다. 셰이크 모하메드가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서 왔다."고 답하자 사우디아라비아의 작은 도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90년대 걸프전의 영향으로 쿠웨이트에 있는 도시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반 대중이 아니라 기자, 미국과 일본, 캐나다와 호주의 상류층, 사회지도층인 마주들이 두바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 모른다는 사실에 셰이크 모하메드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017년 현재 UN 회원국은 193개, 국제법상으로 242개의 나라가 있다. 도시는 이 숫자의 수십 배가 될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나라나 도시는 얼마나 될까? 투자하고 싶은 도시는 얼마나 될까? 알지도 못하는 나라나 도시는 가지도 않을뿐더러 투자는 더더욱 않는다. 그래서 나라마다 도시마다 자신의 지역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미국이나 유럽은 경기장을 지어주며 프로스포츠팀을 유치하고, 프로스포츠가 발달하지 않은 곳은 엑스포나 월드컵, 올림픽을 유치한다. 천문학적인 돈이 들지만 도시나 나라를 세계에 알리려면 불가피한 선택이다. 한국과 서울 또한 올림픽과 월드컵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두바이는 사막 국가이기 때문에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유치할 수도 없을뿐더러 유치한다 해도 막대한 시설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경기 후 시설을 활용할 방안도 없다.

"세계 최고의 말을 두바이로 오게 하자.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경주를 두바이에서 열자. 경마로 두바이를 세계에 알리자!"

지금은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70년대와 80년대 경마는 영국의 전통을 고수하는 스포츠로 인식되었다. 조교사와 기수는 자기 나라에서만 일했고, 국제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마를 글로벌 스포츠로 만든다는 최초의 발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생각이 아니었다.

영국 유학에서 경마를 보면서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했다. 현대 경마장에서 뛰는 모든 말은 더러브렛이라는 품종이다. 17세기 영국에는 뛰어난 아라비아 말이 들어왔고 이 뛰어난 말 가운데 유독 잘 뛰는 말 세 마리가 있었다. 고돌핀 아라비안, 다알리 아라비안, 바이얼리 터크다. 이 세 마리 말이 영국에 있던 암말과 교배했다. 지금 세계 모든 경마장에는 뛰는 말은 이 세 마리 말의 후손이다. 세 마리 말의 후손이 아니면 경주에서 상대가 되지 않기에 경마장에 들어오지도 못한다.

현대 경주마의 조상이 아라비아 말이고, 아라비아 말은 베두인이 기르던 말이고,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사람은 베두인족의 후손인데 영국에서 경주하는 경마를 구경만 하고 있었다. 경마는 수천 년 동안 영국이 아니라 아라비아인들의 생활 스포츠였다. 역사적으로 아랍인에게 말을 타고 빨리 달리는 것은 생존에 직결되는 일이었기에 평소에도 빨리, 멀리 달리는 연습을 했었고, 축제 때면 경마대회가 있었다. 아랍인들은 경마 때문에 40년간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서양에는 말을 타고 장애물을 넘는다든가, 우아한 동작을 보여주는 마장마술경기, 그도 아니면 마차를 타고 달리는 경기가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빨리 달리는 경기는 없었다. 말 마라톤이라 부르는 인듀어런스는 아랍의 전통이었다. 왜 사람들은 경마의 종주국을 아랍이 아니라 영국이라고 부를까? 역사적으로 유럽인들은 늘 아랍말의 스피드에 공포를 느꼈던 사람들이다. 아랍에서는 국적과 관계없이 누구나 경주에 참가할 수 있었다. 아랍인의 전통에 따라 국경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말을 겨루는 경마 경주는 왜 없을까?

1996년 세계에서 가장 큰 상금이 걸린, 가장 화려한 두바이월드컵 클래식이 열렸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오래 달리는 말이 참가했고 그 말들 가운데 '시가'라는 미국말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시가를 부를 때 그냥 '시가'라 부르지 않고 '위대한 시가(Cigar The Great)'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인에게 시가의 인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말이 16연승 했을 때 3만 4,000명의 관중이 20분간 기립박수를 보내는 바람에 시가(Cigar)는 20분간이나 한자리에서 꼼짝도 못 했다고 한다.

마침내 연승기록이 깨졌고 텔레비전 카메라가 관중석을 비췄을 때 관중 모두가 충격으로 울먹이고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경주상금에 자신의 나라에서 최강을 자랑하던 말들이 출전했다. 세계 최고의 말을 결정하는 대회다. 시가는 정말 세계 최강의 말일까?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사였다. 영국과 미국, 호주, 홍콩, 일본, 프랑스의 경주마 소유주나 마주는 귀족이거나 기업경영자, 유명스포츠 스타, 사회지도층이다. 이들이 모두 두바이로 모였다. 모두 9개 경주가 한 시간 간격으로 열리므로 방송사는 시청자를 위해 두바이라는 나라를 알려야 한다. 두바이월드컵은 순식간에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두바이를 알린 사건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셰이크 모하메드가 이 화려하고 어마어마한 두바이클래식을 비용을 자신의 돈으로 치르지 않고 스폰서를 마련해서 치렀다는 것이다.

1회 두바이월드컵 개최 이후 두바이 경제는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역사상 유례 없는 연평균 13퍼센트의 성장을 기록했다. 고도 성장기 중국의 성장률이 9퍼센트였음을 감안하면 눈부신 경제성장률이다. 팜 쥬메이라, 부르즈 칼라파, 에미리트 몰을 건설하기 위한 자금이 몰려들었고 개발된 부동산은 깨끗하게 분양할 수 있었다. 관광객이 두바이에 모이기 시작했고, 금융 산업이 두바이에 둥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두바이의 혁신적인 규제철폐와 친기업 정책이 거들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아랍세계에서 알려진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이 일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사막에 조그만 나무를 심었다. 몇 년 뒤 수많은 새가 그 나무에 둥지를 지었고 나중에는 나무가 자라면서 다른 새들이 둥지를 지었다. 그 그늘에서 새로운 나무가 자랐다."

두바이 사람들은 두바이 월드컵으로 두바이가 얼마나 큰 것을 얻었는지를 보지 못하고 두바이월드컵에 얼마나 많은 돈을 쓰고 있는지만 이야기한다고 불평한다. 두바이 월드컵이 두바이와 아랍에미리트를 세계에 알린 덕분에 기업투자와 관광수입으로 아랍에미리트는 국민소득 6만 7천 달러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했고, OECD 기준으로 인도주의적 기부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금액을 내는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고 말한다.

셰이크 모하메드 스스로 두바이월드컵을 '두바이를 세계에 알리고 세계인이 두바이에 투자하고 아랍의 관광 중심이 되도록 한 촉매'라고 평가한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두바이 월드컵 창설을 메마른 사막에 작은 나무를 심은 것으로 비유했다. 그는 아랍 세계에서 알려진 시인이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경마의 운영방식도 혁신했다. 두바이월드컵에는 배팅이 없다. 축제가 있다. 전통적으로 영국의 마주는 모든 것을 하인들에게 맡겼다. 말을 사고, 관리하고 훈련하며, 경주하는 모든 것을 하인에게 맡긴다. 마주는 경주 날 잠시 예시장에 와서 말을 쓰다듬고 경주가 끝나서 우승하면 위너스 서클에서 모양 잡고 사진 찍는 것이 관행이었다. 셰이크 모하메드가 경험한 아랍의 전통은 다르다. 아랍의 전통은 마주가 자신의 말을 직접 고르고, 자신이 관리하며, 자신이 훈련에 참여하고, 자신이 타고 경주한다. 조교사와 기수는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반자로 활동했다. 이런 마주의 역할을 경마의 격이라고 규정했고, '경마의 격이 국가의 품격'이라고 표현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이런 아랍의 전통을 실천하면서 마주의 역할을 완전히 변모시켰다. 말의 훈련에서는 미국에서 유행하는 - 아랍의 전통적 방식인 - 말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말의 협력하에 모든 일을 수행하는 자연주의 조교법을 채택했다.

승마 리더십은 두바이의 통치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런 혁신적인 방식으로 그는 경마 경주에서 4,000승 이상을 거두었으며, 스테이크 경주 1,000승, G1 경주 240승 이상을 거두었다.

두바이 국왕 셰이크 모하메드는 분초를 나누어 사용하는 일 중독자로 알려져 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혼자서 마구간에서 말과 대화를 나눈다.

5. 호스맨(Horseman) 셰이크 모하메드

현재 두바이에서 벌이는 모든 사업은 만수르로 알려진 두바이 국왕 셰이크 모하메드가 주도했고, 그 성공으로 국민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두바이는 최근 세계 최초의 드론 택시와 세계 최대 규모의 태양광 발전소 건설로 다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중동의 항만 중심국가로 일어서서, 경마를 통해 세계에 두바이를 알리며 관광산업으로 도약했고, 부동산과 국제 금융 산업의 허브로 발전했다. 이제는 첨단 제조 산업 기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중동의 무지한 석유 졸부가 아니라 선진국을 위협하는 산업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국왕 셰이크 모하메드의 지도력과 혁신, 창의력에서 출발했다. 그 혁신과 창의력은 어디서 출발했을까?

무엇인가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남들과 다른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은 사는 방식이 남들과 다르다. 남들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생활한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중동에서 알려진 시인(詩人)이다. 국왕이라 해서 시인으로서 특별한 대접을 받지 않았다. 그는 익명으로 신문사에 시를 보내 언론사가 채택하는지 확인했다. 이렇게 익명으로 쓴 그의 시는 아랍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연설문 한 문장도 직접 쓰지 못하는 지도자, 대필을 당연시하는 지도자들이 즐비한 것이 현실이다. 책임져야 할 일은 부하에게 미루고, 공은 자신이 독차지하는 동양의 지도자에 익숙한 우리에게 셰이크 모하메드는 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어에는 호스맨(horseman)이라는 단어가 있다. 말을 타는 사람(기수, 승마인, 기병) 또는 말을 잘 다루는 사람, 말 소유자나 생산자 또는 조교사와 말을 좋아하는 사람을 포함하는 우리에게는 없는 단어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타고난 호스맨이다. 직접 말을 고르고, 치료하고 먹이고 훈련하며 직접 말을 타는 사람이다.

승마인의 눈으로 볼 때 셰이크 모하메드가 부러울까?

나는 그가 부럽다. 그가 가진 미국, 일본, 영국, 호주 경주마 목장의 4,000마리 명마가 부러운 게 아니다. 메이단 경마장 두바이 월드컵 최다 우승 마주라서 부러운 게 아니다. 세계 최고의 씨수말 52마리를 가져서가 아니다. 두바이 국왕이라는 지위, 아랍에미리트의 부통령과 총리, 두바이 국민이 집집마다 자발적으로 사진을 걸어놓는, 그에 대한 국민의 신망이 부러운 게 아니다.

걸음마도 배우지 못한 아들을 안아 말에 태우고 습보로 사막을 뛰는 경험을 갖게 한 아버지를 가진 것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암말을 직접 고쳐서 훈련하며 경주에 참가하고, 함께 페르시아 해변의 별이 쏟아지는 밤을 보낸 기억이, 분초를 다투며 일하는 사람인데도 해마다 승마 경기에 참여하는 승마인의 열정이,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마방에서 말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그의 '말 사랑'이 나는 한없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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