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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가장 막강한 영화기자도 하비 웨인스타인을 보호했다

1990년대 중반, 엔터테인먼트 업계 잡지 '버라이어티'의 젊은 기자가 주간 회의에서 하비 웨인스타인에게 좋지 않을 아이템을 꺼냈다.

소규모 영화 업체들이 프로덕션 영역으로 발을 뻗는 게 위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기자는 웨인스타인의 미라맥스를 예로 들고 싶어했다. 미라맥스가 초기에 시도했던 프로젝트들은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버라이어티의 막강한 편집장 피터 바트는 이 기사를 내는 것에 반대했다.

“피터 바트는 즉각 이 기사를 접으라고 했다. 언성을 높이며 이 기사를 내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것을 다시는 제안하지 말라고 했다.” 이 기자는 아직도 ‘업계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며 허프포스트에 이야기했다. 이 기사의 다른 사람들도 익명을 요구했다.

이 기자가 버라이어티에서 일하면서 쓰려한 기사들 중 접어야 했던 다른 글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일반적 편집 관련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관련된 회사 외에 다른 이유없이 기사가 거부당한 건 그때가 유일했다.”고 회상했다.

다들 회의실에서 나가자 한 동료가 그 기자에게 버라이어티의 비공식 규칙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미라맥스에 대해 그런 기사는 안 쓴다”는 것이었다.

당시 헐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매체인 버라이어티에서 이런 분위기는 잘 알려져 있었다고 전 버라이어티 직원은 말했다. “하비나 그 당시 그의 회사였던 미라맥스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는 버라이어티에 절대 실리지 않았다. 암묵적인 룰이 되다시피 했다.”

하비 웨인스타인과 피터 바트(오른쪽)

뉴욕 타임스뉴요커가 낸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희롱과 성폭력 폭로 기사는 엄청난 폭발력이 있었다. 수십 명의 여성들이 나서서 웨인스타인의 행동을 밝혔다. 현재 웨인스타인에게 강간, 폭력, 희롱을 당했다고 나선 여성은 최소 35명이다.

헐리우드에서 누구나 알고 있던 비밀이 드러나자 웨인스타인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사람들, 그들의 가족들, 언론인들, 업계인들은 대체 왜 그동안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언론인들은 웨인스타인에 대한 폭로 기사를 쓰지 않고 그와 잘 지내기를 선택했는지 묻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웨인스타인은 매체 조작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강압을 휘두르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하며 자신의 영향권 안에 끌어들였다.

웨인스타인을 샘 골드윈의 재림으로 다룬, 웨인스타인의 추락에 대한 기사에서도 이런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사실 웨인스타인은 영화 제작보다는 마케팅에 더 능했고, 그 사실을 덮기 위해서는 언론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잘 나갈 때는 영화 업계에서 가장 막강한 언론인 중 하나였던 피터 바트는 웨인스타인이 긴요하게 써먹었던 공모자였다. 피터 바트도 그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버라이어티에서 일했던 기자와 에디터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웨인스타인을 열심히 보호했다. 웨인스타인의 ‘다 아는 비밀’을 정말 오랫동안 비밀로 지켰던 사람이었다.

1989년에 웨인스타인의 미라맥스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는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때 웨인스타인과 그의 동생 밥 웨인스타인은 미국에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독립 스튜디오를 이끌면서 다른 사람이 만들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 호평 받는 대담한 사람들이라는 평을 받았다.

1989년 당시 피터 바트는 위클리 버라이어티의 에디터가 되었고, 그 이후로 바트의 커리어는 웨인스타인의 커리어와 얽혔다. 버라이어티에 들어가기 전 바트는 헐리우드 황금기에 활동하며 ‘악마의 씨’, ‘대부’ 등의 제작을 도왔다. 그는 자신이 헐리우드의 하찮은 인물이 아닌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다고 어느 전직 버라이어티 에디터는 말했다.

피터 바트는 지루한 잡지였던 버라이어티를 영향력있는 매체로 만들며 승진을 거듭했다. 그가 장악한 동안 버라이어티는 점점 두꺼워졌고 직원 수도 늘어났다. 영화계의 중요한 사건(과 영화제들)을 다루는 스페셜 섹션이 거의 매 호마다 실렸다. 바트가 들어오기 전인 1988년에 버라이어티에서 일하기 시작한 전직 뉴스 에디터 킨지 로우는 “모든 게 다 늘어났다”고 말한다.

1990년대 중반에 웨인스타인은 헐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람 축에 끼었고, 바트 역시 영화계 누구 못지 않은 존재였다. 막강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양쪽 모두 이 관계에서 이득을 보았다. 웨인스타인은 오스카 수상을 위한 경쟁을 스포츠처럼 바꾸어 놓았고, 그에 따른 혜택을 버라이어티 만큼 많이 받은 매체는 거의 없었다. 버라이어티는 웨인스타인 덕택에 영화제 기간 중 날개 돋힌듯 팔려나갔고, 미라맥스는 광고를 엄청나게 실었다. 더 큰 제작사들도 미라맥스를 따라잡기 위해 광고를 많이 게재했다. ‘쇼콜라’가 작품상 후보에 오르자 버라이어티는 큰 수익을 얻었다.

헐리우드의 어느 베테랑 내부인은 웨인스타인이 “모든 매체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말하며, 버라이어티 매 호에 미라맥스 광고가 가득 들어찼던 시기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1997년에 버라이어티의 뉴욕 광고 세일즈 디렉터 마이클 에반스는 버라이어티의 오스카 광고의 40% 정도를 미라맥스가 구매했다고 뉴욕 타임스에 말했다. “버라이어티에겐 큰 수입원이었고, 물론 버라이어티에겐 그 돈이 필요했다.” 어느 직원의 말이다. 2년 뒤 ‘인생은 아름다워’와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밀던 미라맥스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오스카 캠페인들의 운영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들은 300만 달러를 썼다.” 드림웍스의 공동 설립자 제프리 카첸버그가 당시 놀라워하며 한 말이었다. 드림웍스 역시 마케팅 예산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버라이어티 전 직원 하나는 그때 피터 바트가 세일즈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결국 그가 신경 쓴 것은 세일즈였다. 그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길 좋아했다. 특히 하비와 친하게 지내려 했다. 주요 광고주 중 한 명을 언짢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광고 때문에 바트가 웨인스타인을 특별하게 대하지는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미라맥스는 우리의 큰 고객이었지만, 최대 고객은 아니었다.” 버라이어티의 전 발행인 찰리 쿤스는 1990년대에 많은 수입을 올린 것은 바트의 편집 방침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결과 바트가 편집장이던 당시 여러 직원들은 언론인으로서 타협해야 한다고 느꼈다. “사업적으로 보면 피터 바트는 버라이어티에서 아주 일을 잘했다. 하지만 뉴스 가치로 보면 잘 모르겠다. 하비 웨인스타인에 대한 나쁜 말은 절대 없었다.” 전 뉴스 에디터 로우의 말이다.

직설적이고 일상 대화 같은 것으로 유명한 바트의 글에서는 웨인스타인에 대한 칭찬이 많이 보였다. 1999년 오스카 시즌이 시작될 때 바트는 ‘하비 타임’이라는 표현을 쓰며, 웨인스타인은 “경쟁자들이 이를 갈 때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며, 오스카 트로피들은 거침없이 미라맥스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한다”고 칭찬했다. 바트는 웨인스타인은 이유있는 반항(“그는 의기양양한 분위기를 풍기며 담배를 하나 더 붙여 문다”고도 썼다)이라고 했으며, 웨인스타인이 프리미어가 ‘익명의 정보원’을 인용한 것을 비난했을 때 찬사를 보냈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하고 논란이 일었을 때 피터 바트는 웨인스타인을 지지했다. 미라맥스가 좋지 않은 한 해를 보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강철 같은 리얼리스트인 하비는 작년의 해트 트릭을 재현할 수 없다는 것, 매체는 숭배에서 사악함으로 쉽게 돌아선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피터는 하비에게 홀딱 반해 있었다.” 버라이어티 기자 출신인 레너드 클레이디가 허프포스트 인터뷰에서 말했다.

클레이디는 바트가 미라맥스에 대한 기사를 어떻게 쓰라고 대놓고 말한 적은 없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의 언론인이자 예전 버라이어티 소속으로 인디 영화 업계를 다루었던 기자 렉스 와이너도 똑같이 말한다.

그러나 와이너에 의하면 직원들은 조심했다고 한다. “버라이어티에서는 [바트가] 업계에 친구들이 있고 그들에 대한 기사를 쓸 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게 잘 알려져 있었다. 정반대로 바트는 ‘누군가를 공격해라.’고 말하곤 했다.”

버라이어티의 다른 전 직원은 미라맥스에 대한 기사가 거칠다 싶으면 바트가 담당 기자를 다른 담당으로 돌렸다고 말한다. “그는 분명 하비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모든 관련 기사가 좋은 내용 일색이었다.”

미라맥스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살피는 기자들에게 홍보 담당자들이 “그러면 하비가 피터에게 전화할 것”이라고 위협했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는 걸 버라이어티 기자들도 알았다.” 전 에디터의 말이다.

또 다른 전 직원은 “그가 신성시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하비 웨인스타인이었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기자들은 웨인스타인에 대해서는 자기검열하는 법을 익혔다고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바트는 기사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바꾸었다.

“작가와 에디터들은 그가 글을 고치거나 부드럽게 만든다고 개인적으로 불평했다. 특히 기사가 자신의 가까운 업계 친구들을 비판하는 경우에 그랬다. 미라맥스의 공동 설립자 하비 웨인스타인이 그중 하나였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2009년에 바트에 대해 낸 글이다.

바트는 웨인스타인 등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언급된 기사를 손보고 바꿀 수 있게 해주었다”고 로스 앤젤레스 매거진은 보도했다. 그 둘은 사이가 정말 좋아서, 웨인스타인은 바트가 진행하지 않은 버라이어티 인터뷰에도 바트를 동석시켰다. 뉴요커가 웨인스타인 폭로기사를 내기 하루 전, 버라이어티의 전 컬럼니스트 앤 톰슨은 컬럼에서 당시 상황을 자세히 밝혔다.

“버라이어티의 컬럼니스트로서 칸 영화제에 가서 웨인스타인의 혹평에 대한 피처 인터뷰를 잡으려 했을 때, 웨인스타인은 비터 바트와 그의 조수 팀 그레이가 동석해야 한다고 우겼다. 버라이어티가 자신을 돌봐주게 하기 위해서였다.”

미라맥스 측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미라맥스 전 홍보 담당자는 바트가 “(미라맥스를) 아주 아껴주었”고, “하비의 친구”로 간주되었다고 허프포스트에 말했다.

“피터 바트는 자신이 킹메이커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그런 거물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자신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영화 초기 편집본을 보는 것 등을 자랑했다.” 전 버라이어티 에디터의 말이다.

시간이 흐르며 거래가 오가는 바트와 웨인스타인의 관계는 뻔히 드러나게 되었다. 심지어 버라이어티 지면에도 실렸다. 1997년에 그들은 바트와 버라이어티 에디터들이 웨인스타인의 미라맥스 북스에서 낸 칸 영화제에 대한 책 ‘Fifty Years of Sun, Sex & Celluloid’ 출간을 기념하는 칵테일 파티를 열었다.

버라이어티에 실린 글에 의하면 웨인스타인은 파티에서 “이 책의 제목은 ‘Fifty Years of Sun & Celluloid’이 될 예정이었지만 나는 sex라는 단어를 넣기로 결정했다.”라고 농담했따고 한다.

2년 뒤 바트의 버라이어티 편집장 승진 10주년이 되었을 때 웨인스타인은 축하 파티를 열었다.

쿤스는 바트가 특정 인물을 편애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튜디오 대표들이 언제나 내게 전화를 걸어 그를 욕했다”고 허프포스트에 말했다.

웨인스타인도 그중 하나였을까?

“아, 그랬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비가 가끔씩 피터의 기사에 대해 불평했던 것 같다. 피터가 누군가의 손에 놀아났다는 건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옆에 있었다. 그런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몇 년 째 그런 말을 하고 있다.”

“나도 이해한다. 하비가 피터를 위해 파티를 열었느냐고? 그랬다. 내가 기자였다면 나라도 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2001년 9월에 에이미 월러스는 로스 앤젤레스 매거진에 바트를 맹비난하는 글을 냈다. ‘피터 바트는 헐리우드에서 가장 미움받는 사람인가?’라는 제목이었다.

월러스에게 전화를 걸어 고소하겠다고 위협하는 바트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기사 앞에 들어가 있었다. 월러스는 바트가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반유대주의자라고 썼다. 이야기를 지어내며 늘 거짓말을 한다고도 했다. “주요 일간지의 기자나 에디터가 바트처럼 언론의 기본 룰을 어긴다면 쫓겨날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월러스는 바트의 이해 상충을 처음으로 자세히 밝히며, 기사가 나오기 전 웨인스타인 같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바꾸도록 해주는 것 같다고 보도했다. “내용이 바뀐 기사에 자기 이름이 실린 기자들이 항의하면, 바트는 데드라인 이후에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고 말했다. 어느 기자는 그가 ‘이건 내 잡지다. 내 마음대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월러스의 기사가 나가자 바트는 21일 동안 정직 당했고 버라이어티 소유주들은 외부의 조언을 얻어 이 기사의 주장을 조사했다. “피터가 에디터로서 권력이나 영향력을 남용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고, 바트는 편집장으로 복귀했다. 2년 뒤 미라맥스는 바트의 책 ‘Dangerous Company’를 출간했고, 버라이어티는 웨인스타인 형제들을 위한 파티를 열었다.

2005년에 100주년을 맞은 버라이어티는 하비 웨인스타인을 초청해 업계 잡지들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지 중 버라이어티가 최고다. 엔터테인먼트 업계 내부, 외부의 사람들은 매일 버라이어티를 읽으며 소식을 접한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자들은 뉴스를 쓸 때 팩트 조사를 아주 잘하고, 컬럼니스트들은 업계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시각과 통찰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2006년, 'Boffo!'의 출간파티에서 만난 하비 웨인스타인과 피터 바트, 그리고 배우 케빈 스페이시

미라맥스는 2006년에 바트의 책을 또 한 권 내주어 그의 주머니를 불려주었다. 바트는 2009년에 마침내 물러나며 책을 하나 더 내기로 웨인스타인과 계약했다. ‘Infamous Players’라는 책이었다.

명예직으로 물러난 뒤에도 바트는 웨인스타인을 보호했다. 2013년에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후보 5명이 “더 이상 하비 웨인스타인에게 반한 척할 필요가 없다”고 농담한 진행자 세스 맥팔레인을 맹비난하는 컬럼을 썼다(맥팔레인은 그 농담은 자기 친구가 웨인스타인이 원치 않는 접근을 했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한 말이었다고 최근 설명했다).

허프포스트에 보낸 이메일에서 바트는 자신이 웨인스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금지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다’고 말했다.

“버라이어티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라맥스에 대한 부정적 기사들을 잔뜩 보았을 것이다.” 버라이어티의 과월호들을 보면 미라맥스 관련 기사들은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것들이 많다. 바트에게 당신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비판 기사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제대로 답변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내일 회의와 스크리닝이 있어서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다. 게다가 익명의 비난자들에 맞서 변호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바트는 자신이 버라이어티에 있는 동안 미라맥스에서 책을 낸 적 없다고 말했다(낸 적이 있다).

“나는 미라맥스에서 ‘Infamous Players’를 내기 훨씬 전에 사이먼 & 슈스터, 퍼트넘, 세인트 마틴스, 린든 프레스 등에서 책을 냈다. ‘Infamous Players’가 나온 것은 내가 편집장이 아닐 때였다.”

전화 인터뷰에서 바트는 웨인스타인의 성적 혐의에 대한 “내부고발자의 언급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하며 “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바트는 자신과 기자들은 웨인스타인에 대한 ‘비즈니스 이슈’ 이야기는 들었다고 했다. “감독들이 최종 편집판에 웨인스타인이 개입했다고 느꼈던 것” 등이라고 한다.

웨인스타인의 성폭력 추문에 대해 피터 바트는 “나는 전혀 들은 바 없다. 들었다면 기사로 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버라이어티'는 10월 18일, 최신호의 표지를 공개했다.

 

허프포스트US의 'The Most Powerful Journalist In Hollywood Protected Harvey Weinstein For Years'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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