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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시린 겨울, 임금은 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었나

17세기 무렵 조선 땅은 비참했다. 임금은 항복했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모두가 그럴듯한 명분으로 시작되었고 그럴듯한 명분과 실리로 전쟁이 끝이 났다. 그러나 시작과 끝 사이에서 그리고 끝 이후에서 많은 이들의 '삶'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특히나 힘없는 민중들의 삶이 그러했다.

1편에서 이어짐

'상(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1636년 12월 16일부터 그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까지의 기간 동안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에서 자주 등장하는 짧은 문구이다. 조선의 지존 인조임금은 왜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추운 겨울 한양도성을 떠나 남한산성에 있어야 했을까?

해발 500미터 위 험준한 산악지형을 따라 쌓아올린 남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남한산성의 성벽 전경, 남한산성에서 2017년 8월 촬영 ⓒ이태형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다

정묘호란을 겪고 난 뒤 인조정권의 조선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음이 분명했다. 어찌 보면 임진왜란 시기보다 더 큰 국가적 위기였다. 그때는 믿고 따랐던 어버이의 나라 천하의 대국 명나라라도 건재하지 않았던가! 당시는 국가존립의 절체절명 시기였다. 위기의 시대에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위정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국가의 존립을 위해 치열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있었다. 먼저 힘을 길러 후금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군사력을 양성해 명과 협공해 후금군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아니면 후금의 뜻대로 명과의 관계를 끊고 새로운 국제질서에 순응하는 실리외교를 선택해 전쟁의 참화를 피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의 결말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 10여 년의 기간 동안 집권세력은 요동치는 동북아의 국제정세 속에서 우왕좌왕했다. 저물어가는 명나라에 대한 집착은 계속됐다. 그 사이 새로운 패권 국가인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대륙을 경영할 야망을 품고 더욱 강성해지고 있었다.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진격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동북아의 패권 국가로 거듭난 청은 조선에게 명나라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싶었다. 청의 입장에서 하늘 위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듯이 상국(上國)도 둘일 수 없었다. 청은 끝내 조선에게 군신(君臣) 관계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조선 조정은 다시 발칵 뒤집혔다. 짐승만도 못한 족속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것도 굴욕인데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다니. 조선 내에서 다시금 청과 결전을 준비하자는 강경론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분만 살아있을 뿐 결전을 대비하지도 준비하지도 않았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한 혁도아랍성(赫图阿拉城), 1634년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천권흥경(天眷兴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청황제 옆에 신하들이 도열해 있다. 그 옆으로 청의 주력군 팔기군(八旗軍)의 깃발이 걸려있다.조선을 침략한 청태종 홍타이지는 이곳에서 조선에 대한 동향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중국 요령성 무순시에서 2017년 7월 촬영 ⓒ이태형

청에게 조선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답답한 나라였다. 다 망해가는 명나라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화를 자초하다니. 더욱이 정묘호란 때 이미 조선은 청에 반기를 들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조선을 후방에 두고는 대륙으로 나아가기에 어딘가 모르게 찝찝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조선을 아군으로 만들기 어렵다면, 아니 적어도 중립을 지키지 않는 선택을 할 것이라면 조선에 대한 완전한 복속이 필요했다.

결국 1636년 12월 9일, 12만의 청의 대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인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청군의 두 번째 침략 속에서 청군은 주도면밀했다. 압록강 건너 의주부터 한양도성까지 산성으로 항전을 시작한 조선군과의 교전은 최대한 피했다.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 속전속결(速戰速決)로 조선왕 인조를 사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반면에 조선은 우왕좌왕했다. 청군이 도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파발이 전해지자, 강화도로 어가를 옮겨야 한다는 말이 조정을 덮었다. 정묘호란이 발발한 지 언 10년이 지났음에도 인조정권의 조선의 최선의 전쟁 대비책은 강화도로의 파천뿐이었다. 인조는 주저했다. 이번에도 파천을 단행하면 왕위에 오르고 세 번째로 도성을 버리는 것이니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강화도로 가야 한다는 신하들의 독촉이 이어졌다. 그러나 재조지은의 은혜를 내려 준 명나라를 위해 오랑캐와의 일전을 망설이지 않겠다던 조선 사대부들의 핏대 세운 말들은 청군의 진군을 일초도 늦추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청군의 빠른 진군 탓에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시린 12월의 겨울, 인조정권의 잃어버린 10년의 결말은 남한산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남한산성의 남문인 지화문(至和門), 1636년 12월 인조는 이곳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

남한산성에서 2017년 8월 촬영 ⓒ이태형

청군의 기병대가 인조를 사로잡을지 모르는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였으나 적과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곳이었다.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당시 수군에 약했던 청군을 떠올리며, 유사시 강화도로의 파천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강화도로 가는 길은 막혔고 남한산성에서 수성을 하며 장기전을 도모해야했다. 그러나 12월 겨울, 식량이 문제였다. 시간은 청군의 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남한산성에 있는 병력들로 청군을 격파하거나 전국 각지의 근왕병들을 모집해 청군의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정권을 만들었던 반정공신 영의정 김류를 중심으로 꾸려진, 지휘부는 그 어느 것도 해내지 못했다. 갑갑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답답함이 남한산성 곳곳을 누볐다. 대안 없는 현실 앞에서도 신하들은 인조에게 심지를 굳건히 하고 오랑캐들과의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주청을 잊지 않았다. 그 사이 청태종 홍타이지가 조선으로 왔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날들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무엇이 옳은 길인가

해질녘, 남한산성에서 청군이 진을 치고 있던 송파방향을 바라 본 모습. 1636년 12월의 해질녘도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날을 생각하니 이곳의 석양은 두려움과 답답함, 분노와 비참함의 구름이 한데 모여 만들어 낸 것 같았다.

남한산성에서 2017년 8월 촬영 ⓒ이태형

남한산성에서의 날들은 인조임금과 신하들에게 조선이 얼마나 무기력한 나라인지를 곱씹어 보게 했다. 명·청 교체기 동북아 국제질서를 제대로 읽지 못한 대가는 참혹했다. 그동안 선과 악의 논리로 무장한 충절의 논리는 입과 입을 거쳐 조선을 움직였다. 나아가 입이 모자라 그 논리는 수많은 먹과 종이를 거쳐 조선 조정을 뒤덮었다. 조선의 위정자들의 수많은 말과 글은 이미 이 세상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여기서 인조정권에게 명에 대한 충성은 절대적인 정언명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이제 조선은 패망을 떠올려야했다. 청군은 남한산성 지척에서 진을 치며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국가 패망의 위기 속에도 명분론자들은 한결 같았다. "오랑캐와의 화친은 없다" 모두가 당연시하는 전제였다. 같은 말의 도돌이표였다.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했고 청태종의 의중은 조선의 완전항복임이 드러났다. 이제 싸우다 죽을 것인지, 무릎을 꿇을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다. 무엇이 옳은 길인가. 비참함 속의 고뇌였다.

청태종의 조롱과 협박, 회유 그리고 인조의 선택

새해가 밝았다. 인조 생에 가장 고통스러운 새해였다. 새해 둘째 날, 1637년 1월 2일 청군진영에 보냈던 홍서봉이 청태종의 글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청군 진영에 파견한 좌의정 홍서봉이 가져온 청태종의 글은 조선의 지난 10년 세월과 작금의 비참한 현실, 그리고 다가올 날의 선택을 담고 있었다. 사관이 기록한 청태종의 글은 이 전쟁의 원인과 조선의 현재 행태에 대한 조롱과 협박으로 가득했다.

"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중략··· 짐이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대 나라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 것이요, 망령되게 스스로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고 성 안이나 초야에서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반드시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이를 그대 무리에게 유시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일 임인 2번째 기사-

청태종은 인조에게 보내는 글 말미에, 회유도 잊지 않았다. 자신에게 순종하면 살려주는 것은 물론 대우 또한 해주겠다는 것이다. 조정은 청태종의 말에 무엇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침묵은 돌고 돌아 다시 침묵을 낳았다. 생각 끝에 인조가 신하들의 뜻을 물었다.

청태종의 협박 앞에 예조판서 김상헌은 기존의 자신의 입장대로 청과의 결전을 주장하며 분노를 토해냈다.

"지금 사죄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노여움을 풀겠습니까. 끝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해 올 것입니다. 적서(賊書)를 삼군(三軍)에 반포해 보여주어 사기를 격려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이조판서 최명길의 말은 짧고 굵었다. 그는 병자호란 발발 직후부터 청과 화친을 통해 현재 상황을 타개해야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한(청태종)이 일단 나온 이상 대적하기가 더욱 어려운데, 대적할 경우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청과 주전론(主戰論)과 주화론(主和論)이 남한산성 행궁 담벼락을 넘어 산성 곳곳을 가득 채웠다. 최고 결정권자 인조에게 주전론은 공허했고, 주화론은 비참했다. 그 양극단에 김상헌과 최명길이 있었다. 젊은 언관들은 주화론을 펼치는 최명길의 목을 치고 청과 결전을 벌이자고 떠들었지만, 결전에 앞장서겠다는 자는 나오지 않았다. 인조는 자신이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 상황만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상황 극복을 위해서는 청태종에게 칭신 즉 신하를 칭해야만 했다. 최명길이 굴욕적인 국서를 써 내려갔고, 이를 발견한 김상헌은 눈물을 흘리며 국서를 찢었다. 인조를 찾아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울분을 토하는 김상헌에게 인조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한 채 탄식하며 말한다.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부형과 백관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경의 말이 정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실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의 일을 보게 된 것 뿐이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8일 무오 1번째 기사-

생욕(生慾)의 길이 치욕(恥辱)의 길을 꺾다

청과 화의를 도모하는 것은, 개돼지보다 못한 오랑캐에 굴복하는 것이었다. 인조와 신하들은 죽기보다 싫은 치욕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야 했다. 산성 안 식량이 바닥나고 추위에 병사들이 얼어 죽어갔다. 산성 안 행궁으로 청군의 포탄이 날아 들어왔다. 막다른 길 위에서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출구가 있다면, 스스로 세상을 저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인조는 치욕을 감내하고서라도 살아내겠다고 결심했다. 살고자 하는 생욕이 치욕을 꺾은 것이다. 인조는 청군에 사신을 보내 본인이 청태종 앞에 직접 항복하는 청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조선 개국이래 조선왕이 타국의 왕 앞에 직접 무릎을 꿇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굴욕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637년 1월 30일, 드디어 남한산성의 문이 열렸다.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지 47일 만의 출성이었다. 인조는 푸른색 남염의를 입고 말 위에 올랐다. 인조는 서문을 나서 청군 진영으로 향했다. 청군 진영으로 향하는 인조 임금을 바라보며, 많은 이들이 오열했다.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기 위해 나섰던 남한산성의 서문인 우익문(右翼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통과했던 남문보다 규모가 작다. 이 날 길을 나선 인조에게 서문은 저승으로 이어지는 관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남한산성에서 2017년 8월 촬영 ⓒ이태형

조선왕조실록은 그 날의 출성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 기사-

'우리 임금' 인조, 오랑캐 황제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후 환궁을 허락받다.

청의 장수 용골대에 인도에 따라 인조는 청태종 앞에 섰다. 인조는 곧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렸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강화도에서 잡혀 온 대군, 산성에서 함께 나온 세자 그리고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조선의 지존에게 역사가 명한 다시 없을 굴욕이었다. 이를 역사는 '삼전도의 굴욕'이라 말한다. 자신의 발아래 엎드린 인조를 보고 청태종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조선 완전 정복 선언이었다. 이 순간 인조에게는 일 분 일 초가 십 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청태종의 허락을 받은 인조는 47일 만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길 위에서 인조는 한 차례 비극을 더 만나게 된다. 환궁하는 임금을 향해 청군에 사로잡힌 만 명의 포로들이 울부짖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우리 임금이시여'를 똑똑히 들은 인조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만백성의 어버이라 불리는 임금이 자식과 같은 백성을 뒤로하고 궁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버이가 강도에게 끌려가는 자식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참극 속에서 인조는 차마 자신의 백성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도성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지난날들의 회한과 오늘의 굴욕 그리고 다가올 날들의 두려움이 서로 뒤엉켰다. 그렇게 구슬픈 1637년 1월의 마지막 날과 함께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는 사관의 기록도 끝을 맺었다.

청태종의 능인 북릉(北陵), 무덤이라기보다 궁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중국 요령성 심양시에서 2017년 7월 촬영 ⓒ이태형

시린 겨울, 임금은 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었나.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17세기 무렵 조선 땅은 비참했다. 임금은 항복했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모두가 그럴듯한 명분으로 시작되었고 그럴듯한 명분과 실리로 전쟁이 끝이 났다. 그러나 시작과 끝 사이에서 그리고 끝 이후에서 많은 이들의 '삶'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특히나 힘없는 민중들의 삶이 그러했다. 수십만의 백성들이 청군의 노예가 되었다. 끌려가던 중에 죽임을 당했고 끌려가서도 짐승보다 못한 학대를 받았다. 수많은 여성들은 청군에게 유린당했으며, 아이들은 살해되거나 굶어 죽었다. 포로를 송환 할 때조차 일반 백성들은 비참했다. 사대부들이 포로 몸값을 높여 놓은 탓에 일반 백성들은 돈을 주고 송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력으로 탈출해 조선으로 돌아온 많은 백성들을 청과의 외교마찰을 핑계로 다시 청나라 땅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당시 조선 땅에는 부모 잃은 자, 남편 잃은 자, 자식 잃은 자들이 넘쳐났다. 현실에서 지옥을 보았다면 아마 그곳을 지옥으로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를 이끄는 제대로 된 위정자들이라면 이러한 현실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역사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청나라에게 배울 것은 배우자 주장했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는 귀국 후 얼마 안 돼 돌연사 했고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청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는 북벌운동을 펼쳤다. 남은 것은 다시 비현실적인 조건에서도 청에게 설욕하겠다는 조선 지배층의 자존심과 명과의 의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이었다. 결국 효종은 북벌을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진다. 이후 북벌론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여전히 청은 형식적으로 항복을 맹세한 상국이었지만, 무식한 힘을 앞세운 오랑캐에 불과했다. 비록 힘으로는 굴복당했지만 청을 무시하는 인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바뀌는 데 10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잠시 18세기 청나라를 배우자는 북학(北學)운동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조선의 개화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은 흘렀고 조선은 병들어갔다.

병자호란 이후 청태종에게 볼모로 끌려 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머물렀던 심양관 터. 현재 유치원 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명석했던 소현세자는 명·청 교체기를 몸소 경험하며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읽기 시작했다. 이 시기 소현세자는 '새로운 조선'이라는 포부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의 포부는 꿈에 그리던 고향, 조선에 돌아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의 허망한 죽음은 조선의 허망한 패망의 복선이었을지 모른다.

중국 요령성 심양시에서 2017년 7월 촬영 ⓒ이태형

결국 300여년이 지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러, 조선은 요동치는 국제질서를 읽는 데 다시 실패해 패망의 길로 접어든다. 1910년 경술국치 즉 국권침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후 국권 피탈기부터 1945년 국권을 되찾을 때까지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 땅의 수많은 사람들은 목숨과 재산 그리고 생명을 빼앗기고 학대당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다시 한반도는 국제질서의 힘의 논리의 한 가운데 서게 된다. 수백만이 죽거나 다쳤고 한반도 곳곳이 파괴되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비교적 가까운 우리 역사 속 한 장면이다.

2017년 대한민국이 직면한 현실은 어떠한가. 한반도 정세가 날로 불안해지고 있다. 북한이 핵보유국 지위획득을 위해 연일 도발을 이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패권국 미국은 북한의 이어지는 도발을 어디까지 용인할지 미지수다.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패권국 중국은 미국의 동북아시아 영향력 확대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일본은 북한 리스크를 핑계로 내부단속을 하며 군사력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도 한반도 문제를 유심히 지켜보며 자국의 이해타산을 저울질 중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비슷한 역사적 배경은 지속적으로 연출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역사를 교훈 삼아 우리의 상황 속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미래를 향한 선택에 앞서, 과거 비극의 원인을 복기해보자. 2017년,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한 질문을 다시 던져 본다.

시린 겨울, 임금은 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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