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남한산성'을 보며 핵무장을 생각함

지금 단계에서 핵무장을 추진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다. 한·미 동맹을 믿고, 미국과의 공조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핵무장에 대비한 외교적·군사적·기술적·경제적 준비를 소리 없이 할 필요는 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다. 남한산성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길이다.

  • 배명복
  • 입력 2017.10.11 06:47
  • 수정 2017.10.11 06:48

추석 연휴 극장가 박스오피스의 승자는 '남한산성'이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다룬 김훈의 소설이 원작이다.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지는 명(明)과 뜨는 청(淸). 두 태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게도 구럭도 다 놓친 조선의 서글픈 역사가 아득한 과거로 여겨지지 않았다. 현실을 수용하고 훗날을 도모하자는 주화(主和)파와 명분을 저버리고 현실과 타협할 수 없다는 척화(斥和)파의 대립은 오늘도 진행형이다.

2017년 10월 지금, 그것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한국의 처지일 수 있고, 핵무기를 손에 쥔 북한에 대해 강압과 대화로 갈라진 우리의 현실일 수 있다. 한·미 공조를 앞세운 동맹파와 운전자론을 외치는 자주파의 대립일 수 있다. 척화파의 영수 김상헌과 주화파의 영수 최명길의 대결에서 보듯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닌 만큼 오답도 아니다. 가치관과 신념이 달랐을 뿐이다. 외세에 의해 나라의 안위가 바람 앞의 등불이 되면 명분과 실리에 치우친 두 견해가 대립하기 마련이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가 대국(大局)을 살피며 좀 더 기민하게 대처했다면 '오랑캐 나라' 임금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와 치욕은 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대의명분도 좋지만 최대 피해자인 백성을 먼저 생각했다면 한발 물러서서 유연성을 발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힘에서는 밀리더라도 돌팔매로 골리앗을 상대한 다윗의 기개로 회심의 '한 방'을 준비했다면 그처럼 어이없이 당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 버스 지난 다음 손 흔드는 격이다.

지난 5월 타계한 미국의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생전에 미국에 의존하는 한국이 고립무원의 처지가 됐을 때 택할 수 있는 세 가지 옵션을 제시했다. 동아시아의 패권이 중국으로 넘어갈 경우를 상정한 어드바이스였다. 첫째, 중국의 패권을 인정하고 속국으로 사는 길이다. 자존과 독립은 훼손되겠지만 망하지는 않는다. 둘째, 일본과 손잡고 중국에 대항함으로써 자존과 독립을 지키는 길이다. 셋째, 자체 핵무장을 통해 홀로서기를 도모하는 길이다.

여전히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다. 중국에 밀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물러난다는 상상은 하기 힘들다. 문제는 북한이다. 김정은이 마지막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전배치가 조만간 현실이 되어 미 본토가 북한의 핵 타격권에 들어가게 될 경우 과연 미국은 자신에게 떨어질지 모르는 불벼락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을 지켜줄 수 있을까. 더구나 현직 미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를 지고(至高)의 가치로 여기는 도널드 트럼프다. 김정은과 경쟁적으로 '미치광이 전략'을 구사 중인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예측불허다. 1950년 미국이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켰던 것처럼 한반도에서 발을 뺄 가능성은 없을까.

브레진스키는 일본과의 안보협력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조언했다. 일본에 대한 역사적 구원(舊怨)에 사무친 한국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선택이다. 그렇다고 조선 시대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자체 핵무장으로 우리도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일부 정치권만 아니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런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추석 연휴 중에도 자위적 핵무장을 촉구하는 e메일을 아는 언론인들에게 보냈다. 지난 5일 맥 손베리 미 하원 군사위원장이 토론회에서 "한국의 핵무장에 완전히 동의한다"고 발언한 사실을 부각하며 미 행정부에 이어 의회에서도 핵무장 용인론이 나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핵무장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 미국이 월남을 포기하고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걸 보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핵무장을 결심했지만 워싱턴의 개입으로 무산됐다. 지금 한국은 자체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기술적 역량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에 따른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한다. 피해의 대부분이 국민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단계에서 핵무장을 추진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다. 한·미 동맹을 믿고, 미국과의 공조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핵무장에 대비한 외교적·군사적·기술적·경제적 준비를 소리 없이 할 필요는 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다. 남한산성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길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은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사실은 다르다. 그는 82세까지 장수하며 안동김씨가 권문세가로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후손들은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쳐 3명의 왕비와 12명의 정승, 수십 명의 판서를 배출하며 조선 말 세도정치의 주역이 됐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영화 #국제 #핵무장 #북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김정은 #남한산성 #한반도 #대립 #갈등 #핵전쟁 #사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