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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오해하고 있다. '한글날'이지 '한국어날'이 아니다.

  • 허완
  • 입력 2017.10.09 13:45
  • 수정 2017.10.09 14:06
ⓒLisa Muller / EyeEm via Getty Images

매년 한글날이 되면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풍경이 있다. 모두가 '순우리말'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는 것. 이는 외래어가 오용되고 비속어 및 줄임말이 범람하는 현실을 꾸짖는 준엄한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일례로 한 언론이 올해 한글날을 맞이해 마련한 기획 기사 시리즈를 살펴보자. 이 기사의 '편집자주'는 다음과 같다.

9일 571돌 한글날이다. '누구나 자기 의사를 편하게 표현하도록 하겠다'는 세종대왕의 거룩한 뜻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곳곳에서 생소한 외국어·외래어가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에 국립국어원은 2004년부터 우리나라에 새로 들어와 쓰이는 외국어·외래어와 지나치게 어려운 용어를 국민과 함께 쉽고 쓰기 좋은 우리말로 다듬고 있다. 지난 7월 말까지 총 457개의 다듬은 말 중에서 일상에서 자주 쓸 만한 것을 골라 '가나다' 순으로 소개한다.

한 항공사는 외래어나 한자어를 최대한 뺀 '순우리말 기내 방송'을 실시했고, 한 국회의원은 법률 용어에 '일본식 한자어'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순우리말' 타령에는 꽤 중대한 오해가 있다. 이게 다 '한글'과 '한국어'를 구분하지 않아 생기는 일이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건 '한글'이라는 문자이지, '한국어'라는 언어가 아니다. 한글이 있기 전에도 한국어는 존재했다.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 체계다. '한글날'은 바로 그 문자를 기념하는 날이지, '한국어날'이 아니다.

'한글'과 '한국어'의 차이를 이해하는 건 꽤 중요하다.

한국어에는 외래어도 있고, 순우리말도 있다. 외국에서 들어온 말이지만 한국어처럼 사용되는 단어도 있고, 외래어가 독자적인 변천 과정을 거치며 한국어로 자리 잡은 경우도 있다. 순우리말이 아니라고 해서 한국어가 아닌 건 아니다.

게다가 어떤 언어도 '순우리말'로만 구성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영어에는 라틴어,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수두룩하다.

전광진 성균관대 교수는 9일 보도된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한자어나 외래어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돌아봐야 할 대목입니다. 이들 언어가 편입돼 어떤 면에서 우리말을 더 풍성하게 해줍니다.

"나라 간에는 인적·물적 교류를 하기 때문에 외래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없다면 폐쇄국가인 것이죠. 우리는 '한글날'을 제정해놓았지만, 한글이 무엇인지 정확한 개념을 모릅니다. 한글은 24개 자모(子母) 체계입니다. 영어로는 '코리언 알파벳(Korean alphabet)'이지요. 이를 '한국어(Korean language)'로 혼동하고 있습니다. 한글은 한자와 함께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문자입니다."

―한글은 우리가 내는 소리 중에서 의미와 관여되는 모든 요소에 분명한 형태(子母)를 줬지요. 이는 현대 언어학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획기적인 발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글과 한국어는 동일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종대왕께서 만든 한글 사랑을 위해 은어·비속어·외래어를 쓰지 말자'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순우리말을 지키는 것은 국어의 문제입니다. '한글 사랑'이 아닌 '국어 사랑'이라고 해야 합니다." (조선일보 10월9일)

설령 외래어의 오용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하더라도, 이 때 '파괴'되는 건 '한국어'일 뿐, '한글'이 아니다.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 체계다. 한글이 훌륭한 건 소리 나는대로 쓰고 읽을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지, '순우리말' 때문이 아니다. 한글날에 '순우리말'의 실종을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한글은 거의 모든 외래 언어를 쉽고 자유롭게 표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언어만 있고 자체 문자를 갖지 못한 소수 민족들이 공식 문자로 한글을 채택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이 민족이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게 아니다.)

줄임말을 쉽게 만들거나 새 단어를 자유자재로 창조해 낼 수 있는 것도 모두 한글이라는 문자 덕분이다.

블로거 'Sandro'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확히 지적했다.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순우리말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어를 표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한글을 통해 창제 당시에 널리 사용되던 한자어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 영어나 서양 언어들로부터 유래된 단어들까지 대부분 표기할 수 있는 뛰어난 문자이다.

다시 말해 한글을 통해 외래어까지 표기할 수 있기 때문에 한글 창제의 의미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중략)

(...) 세종이 만든 것은 한글이지, 한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외래어 사용에 반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오히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외래어들까지도 한글을 통해 후손들이 쉽게 표기할 수 있음을 보고 흐뭇해하지 않을까.

오해하지 말자. 순우리말, 한국어, 한글은 각각 다른 개념이다. 한글날에는 한글을 기념하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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