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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원래 ‘하루'만 쉬는 날이었다?

가족·친척들과의 긴 만남보다 해외여행과 ‘방콕’이 일상이 되고, 극장가가 붐비는 지금 추석 모습은 예전과 어떻게 다를까? 대체휴일과 임시공휴일이 만나 사상 초유 ‘10일 연휴’를 갖게 된 2017년 추석을 맞아, 추석 연휴의 역사와 모습을 살펴봤다.

■ 추석은 원래 ‘하루’만 쉬는 날이었다

추석이 법정공휴일로 제정된 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이다. 이후 1986년에는 추석 다음날, 1989년에는 추석 전날이 휴일로 지정되면서 지금과 같은 ‘3일 연휴’ 체제가 완성됐다.

하루만 쉬던 추석이 2일 이상 쉬는 ’연휴’가 된 건 추석 다음날 일요일이 붙은 1951년이 처음이었다. 이후 연휴가 법제화된 1986년에 이르기까지 일요일을 앞뒤로 낀 추석연휴는 1951, 1954, 1958, 1967, 1974, 1975, 1981, 1984년 등 모두 8번 있었다. 10월3일 개천절과 이어진 이틀짜리 연휴는 1963년 한 차례였다.

3일 연휴가 법제화된 1989년 전까지 3일짜리 추석 연휴는 이틀짜리 추석 연휴(10월7일, 8일) 뒤로 한글날이 맞물린 1987년 단 한 차례 뿐이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하루 또는 이틀 안에 고향을 다녀오려는 귀성객들로 열차와 버스가 몸살을 앓았다. 추석 3일 연휴가 5일로 길어진 때도 있긴 했다. 1990년 당시 법정공휴일이었던 국군의날(10월1일·월)이 일요일과 추석 연휴 사이에 끼면서 사상 첫 5일 연휴를 만들어냈다. 그 탓이었을까. 국군의날은 그해 11월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됐다.

4일 이상의 연휴가 흔해진 건 2004년 토요일을 쉬는 ‘주5일제’가 시행된 이후다. 2014년 대체휴일제가 도입되면서 추석은 어지간하면 4일을 쉬는 ‘가을 휴가’가 됐다. 해외를 다녀오려고 여행객들로 공항이 붐비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사람들은 주변 휴일과 공휴일 사이로 개인 휴가를 끼워 일주일 안팎의 기간 동안 해외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 광복 이전: 하루만 쉬어도 텅~비었던 서울

가족끼리 모여 차례를 지내고 송편을 나눠 먹는 추석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장거리·대규모 귀성은 과거에 흔치 않았다. 일가친적이 가까운 곳에서 대가족을 이루며 사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적 의미의 귀성은 일자리와 학업을 위해 타지로 나간 이들이 늘어난 일제시대부터 본격화했다. 당시 추석은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대규모 귀성은 없었으며, 고향이 가까운 사람들만 주말을 끼고 가족을 찾아갔다. 1924년 9월12일자 <동아일보> ‘임박한 추석과 가을의 선물’ 기사는 당시 모습을 이렇게 쓰고 있다.

“고향 가까운 사람들은 부모형제 모여앉아 송편 한 개라도 달게 먹으려고 고향으로 다니러 가는 사람이 많다는 바, 추석날은 마침 토요일이므로 학생들도 일찍 공부를 마치고 나오리라는 데 금년에는 여러 가지 재앙으로 연사가 전만 못함으로 따라서 추석 놀이도 전에 비하면 매우 쓸쓸하리라더라.”-1924년 9월12일 <동아일보>

그런 상황임에도 추석이 되면 서울은 텅 비었던 것 같다. 1921년 <동아일보>는 텅 빈 서울의 모습을 잘 묘사해 놓았다. 100여년의 세월 차이에도 불구하고 낯설지 않다.

“어제 16일은 음력 추석이라. 있는 집에서는 곰국을 푸지게 끓여놓고 아이들까지도 모두 재미있게 지내는 모양. 더욱이 어제 하루 동안은 시내의 각병문에 인력거 구경을 할 수가 없었고 3~4전 하던 무 한 단에 십전씩 주어도 얻어볼 수가 없었으며 관에는 고기가 동이 났다 함은 아무리 죽네 하여도 경황이 전보다 나은 것을 증명”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신세를 비관해 명절에 자살하는 이들이 있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사람마다 그 준비에 분망중인 지난 29일 밤 극도의 생활난으로 세상을 비관하여 사랑하는 자식 두 명을 양팔에 안고서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참극이 있었다.”-1933년 10월3일자 동아일보 3면 ‘명절이 고통 애자양명을 포옹코 진행차에 투신자살’

“한 노파가 (열차에) 뛰어들어 무참히도 자살을 하였는데, 조사 결과 그는 서성리 김씨(61)로서 추석 명절이 닥쳐왔건만 생활이 곤궁하여 한끼니의 밥도 지어 먹을 수 없음을 비관하고 추석날 미명에 목숨을 끊고 말았다 한다.”-1935년 9월14일 동아일보 5면 ‘생활난 비관 노파가 자살’

■ 광복부터 1950년대까지: 승차권 못구한 승객들 무임승차…미군 객차까지 투입돼

1949년 추석 당일이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고향을 찾는 이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귀성의 핵심은 기차였다. “서울역 광장에는 차 탈 사랑들이 문재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섰다. 서울역 오후 5시45분발 열차는 개찰도 하지 않았는데, 용산에서부터 초만원이 되었다” 1949년 10월7일자 <경향신문>이 묘사한 추석 하루 전날 서울역의 풍경이다.

1951년은 사상 첫번째 연휴였지만, 전쟁으로 명절 분위기를 한껏 낼 수는 없었다. <동아일보는> 9월15일자 신문에서 “고난과 궁색 중에서 맞이한 조상의 제례도 못 올리는 오늘의 추석 명절…(중략) 그래도 무심히 뛰노는 새 옷 입은 거리의 아이들이 조국의 꽃봉오리다. 그리고 변함없이 반가이 맞아주는 만월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새 희망으로 고난극복”이라고 짧게 썼다.

고향가는 길은 휴전선이 정해진 뒤인 1952년부터 다시 혼잡해졌다. ‘대규모 무임승차’로 열차가 연착하는 등 지연운행이 극에 달했다.

“추석을 앞둔 부산역의 혼잡은 극도에 달하여 비난의 초점이 되어있는데, 지난 2일 부산역을 출발한 서울행 급행열차와 대전행 여객열차는 승차권을 구입치 않은 여객들도 초만원을 이루어 여객차는 스프링이 주저앉아 이날 아침 8시에 출발, 6열차는 삼랑진에 이르러 2시간이나 늦어 대구역에 이르렀으나 극도의 초만원을 이루어 열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1952년 10월3일자 <경향신문> 2면 ’삼랑진 대구서 연발소동‘

열차 귀성객이 폭증하자 정부는 1955년에는 미군에 객차 10량을 긴급 요청해 투입했으며, 1956년에는 임시열차를 증편 운행했다. 하지만 열차만으로 장거리 여객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서민들이 정원 초과 열차표마저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일부 국회의원은 역무원에게 특권을 요구하는 등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추석의 명절을 앞두고 제각기 고향으로 내려가려는 시민들은 서울역이 갑자기 좁아진 듯 터져라고 몰려들고 있다. 언제나 2~3할 정도의 여유를 보여주던 각선 열차는 그 전날에 벌써 정원을 초과하고 차표를 못산 승객들은 이리저리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특히 가족 수행원들을 이끌고 귀향하는 국회의원 제공들의 접대에 서울역장실은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1955년 9월29일 <경향신문> 3면 ‘혼잡한 추석 열차 어제 서울역 풍경’

■ 1960년대: 기차로, 비행기로…빈부 따라 갈라진 고향길

산업화로 고향을 떠난 ‘이촌향도’ 현상이 사회문제로 떠오른 60년대의 귀성길 혼잡은 극심했다. 몰려든 승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열차의 스프링이 내려앉는 등의 사고가 잇따랐다.

6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부유층이 이용하는 백화점과 아파트 상가를 중심으로 흥청거리는 명절 분위기가 퍼졌다. 1968년 10월4일자 경향신문 ‘추석경기 흥청-사치품이 날개돋혀’ 기사는 서울 시내 일부 백화점에서 매상목표 5천만원을 예상했던 상품권이 매진되는가 하면, 귀금속 등 사치품과 냉장고, 에어컨 등 고가 전자제품의 거래가 늘어나는 등 과거와 다소 다른 명절 분위기를 전했다. 항공편을 이용하는 귀성객이 부쩍 늘어 서울-부산을 비롯한 주요 노선의 예매가 완료됐다는 소식과 함께 ‘초만원’ 서울역에 질서 유지를 위해 사복경찰이 투입됐다는 소식이 함께 전해졌다.

■ 1970년대: ‘고속도로 시대’ 개막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가 대전-대구 구간을 끝으로 전 구간 개통하면서 본격적인 고속도로 시대가 열렸다. 철도를 이용한 귀성객은 1969년 60만5000여명이었으나 1970년에는 36만명 수준으로 줄었다. 귀성객들은 출발 간격이 짧고 정류장이 가까운 고속버스를 선호했다. 역 앞에서 펼쳐졌던 귀성길 혼잡은 고스란히 버스정류장으로 옮겨갔다. 고속버스가 입석 승객을 받는 위험천만한 일도 빈번했다.

고속버스로 승객이 분산된 데다 승차원 예매제도가 시작되면서 추석 당일 서울역 등 주요 기차역의 혼잡은 줄었다. 하지만 날짜가 옮겨졌을 뿐 매표소에 길게 늘어선 줄은 버스터미널과 기차역에서 여전했다. 1970년 9월12일 <매일경제>는 “추석을 사흘 앞둔 12일 서울역을 비롯한 시내 35개 열차표 매표소는 이날 낮부터 귀성객들로 붐비고 있으며, 이미 12일용의 호남선 특급열차 태극호와 백마호의 차표는 11일의 예매에서 매진됐다”고 전했다.

■ 1980년대 이후: 사라질뻔한 5일 연휴

1986년 추석 다음 날이, 1989년 추석 전날이 휴일로 지정되면서 지금과 같은 ‘3일 연휴’가 시작됐다. 길어진 휴일과 승용차 보급으로 명절 고속도로 혼잡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매표전쟁에 질린 시민들은 포니 엑셀, 프레스토, 르망, 프라이드 등 신형 국산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쏟아져 나왔다.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됐다. 마을로 묘지로 향하는 시골길도 마찬가지였다.

“붐비는 건 고속도로뿐이 아니었다. 인터체인지를 빠져 국도와 시골길을 거쳐 고향 마을에 들어서자 황토길에도 서울 넘버의 포니와 르망과 시골택시와 봉고차에 경운기까지 뒤엉켜 마을안길 역시 차량들로 어수선했다.-1986년 9월19일자 <동아일보> 5면 ‘고향찾는 마음’

승용차의 증가로 고속도로 정체가 절정에 이르면서 사람들은 막히지 않는 철도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PC통신’의 전성기인 1990년대 중반부터 역과 터미널 앞에 길게 늘어선 예매 줄이 모니터로 옮겨갔고, 혼잡을 피해 서울의 가족 친지를 찾는 ‘역귀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지금은 5일 연휴가 비교적 흔하지만, 1990년대 전까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공휴일 조정’을 구실로 추석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990년 8월24일 국무회의에서 국군의날과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내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정부는 일주일 만에 백기를 들었다. 5일 연휴가 ‘기사회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짧았던 일주일 동안 여행을 계획했다가 취소한 사람들도 있었다. 시민들은 정부의 오락가락 졸속행정에 분통을 터뜨기도 했다. 그해 유지됐던 국군의날과 한글날은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2017년. 역 앞에 늘어선 긴 줄은, 컴퓨터 화면을 거쳐 모바일로 들어왔다. 명절엔 반드시 고향을 찾아야 한다는 의식도 희미해지면서 3일 이상 연휴를 여행이나 긴 휴식으로 보내는 이들도 늘어났다. 올해는 ‘7일 연휴’도 아쉽다는 여론에, 정부가 10월2일 하루를 더 붙여 10일을 쉬기로 했다. 추석이 법정공휴일로 지정된 지 68년 만에 하루였던 휴가가 10일이 된 것이다. 5일 쉬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며 휴일의 허리를 자르고자 했던 과거 정부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세상이 바뀌었다. 다음번의 추석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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