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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소통, 성찰과 품격

과거에 훌륭한 삶을 산 지식인이 말년에 이르러 당혹스러운 주장으로 구설에 오르는 경우를 이따금 보게 됩니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리영희 선생의 절필 선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이 훌륭하니 그대로 따르라고만 한다면, 보통 사람에겐 비현실적인 조언이겠지요. 마치 어설프게 쓰인 위인전처럼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BrianAJackson via Getty Images

대학 신입생 시절 읽은 고 리영희 선생의 사회 비평은 놀라웠습니다. 감았던 눈을 뜨고 새로운 세계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지요. 그 시대의 많은 청년이 그러했듯 저는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크게 감동한 건 2006년 9월 리영희 선생이 절필 선언을 했을 때였습니다. 선생은 <경향신문>과 나눈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개인에게는 무한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할 시기가 있는데 그 시간이 온 것 같다. ... 정신적·육체적 기능이 저하돼 지적 활동을 마감하려니 많은 생각이 든다. ... 내가 산 시대가 지금 시대하고는 상황이 많이 다르고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왔다고 봤는데, 마침 그 한계와 지적 활동을 마감하는 시기가 일치해 하늘이 일종의 깨달음을 주는 걸로 생각하고 고맙게 받아들인다."

리영희 선생처럼 공개적인 지적 활동의 마무리를 멋지게 선언하겠다 다짐하는 분들이 없진 않을 것입니다. 특정 시점에 이르러 자신의 능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알게 된다면, 그리할 수 있겠지요. 한때 공깨나 차던 사람이 나이 들어 예전만큼 재빠르게 공을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듯 말입니다. 물론 책을 읽으며 세상을 분석하고 현실의 해법을 모색하는 일은 축구와는 좀 다릅니다. 시간이 흐르면 지혜와 경륜이 쌓이기도 하니까요.

지적인 작업은 두뇌의 활동이고, 두뇌는 육체의 일부입니다. 세월이 가면 두뇌도 노쇠해질밖에요. 다만, 자신의 능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알아채기가 축구보다 훨씬 더 어려울 뿐입니다. 과거에 훌륭한 삶을 산 지식인이 말년에 이르러 당혹스러운 주장으로 구설에 오르는 경우를 이따금 보게 됩니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리영희 선생의 절필 선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이 훌륭하니 그대로 따르라고만 한다면, 보통 사람에겐 비현실적인 조언이겠지요. 마치 어설프게 쓰인 위인전처럼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권위주의입니다. 한국 사회에선 '부적절한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가 일상적으로 일어나지요. 논리를 무시하며 직위나 나이로 자기 생각을 관철하려 드는 태도는 분명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직위나 나이를 앞세우려는 의도가 특별히 없더라도, 그런 게 논리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꽤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되지 않도록 하려면, 토론이나 합의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동등한 발언권을 갖고 평등하게 소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논리가 곧 권위일 수 있겠지요.

리영희 선생 같은 거인이 아니고선 자신의 지적 활동을 냉철히 성찰하며 스스로 그 한계를 인지하기 어렵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세상 문제에 관한 공적 발언을 삼가달라 청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결국, 최선은 논리적 소통 과정에서 논리 외적인 요소가 개입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직함이나 나이와 무관한 호칭을 사용해봐도 좋겠습니다. 수평적 호칭은 몇몇 정보통신 기업을 필두로 이미 여러 곳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도 회원들끼리 서로 이름에 '님'자를 붙여 부르고 있답니다.

권위주의적이지 않은 수평적 소통 문화는, 자신이 지적인 한계에 이르렀음을 현명하게 깨닫기에 더 좋은 환경입니다.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할 테니까요. 물론 그동안 쌓은 지혜와 경륜이 진정한 권위로 힘을 발휘하기도 하겠지요. 어떤 경우든, 다 품격 있게 나이 드는 데 보탬이 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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