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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헤프너는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했을까?

  • 강병진
  • 입력 2017.09.28 11:56
  • 수정 2017.09.28 11:57

‘플레이보이’의 창립자인 휴 헤프너가 9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한 명의 잡지 에디터에서 세계적인 미디어 제국의 왕으로 거듭났던 그의 생애를 짤막하게 정리했다.

그는 에스콰이어의 카피 에디터로 일하며 1952년에 자신의 잡지를 만들 것을 꿈꿨다. 1953년에 자금 투자를 받고 플레이보이를 창간했다. 그해 12월에 나온 창간호의 표지에는 마릴린 몬로가 등장했다.

1960년대에 헤프너는 플레이보이를 상징하는 얼굴이 되었고, 스모킹 재킷과 파이프, 늘 대동하고 다니는 미녀들로 유명세를 얻었다. 귀와 꼬리가 달린, 이젠 아이콘이 된 유니폼을 입은 ‘버니’들이 근무하는 프라이빗 키 클럽을 여럿 열었다.

헤프너는 배우 제인 맨스필드의 누드 사진을 냈다가 1963년에 외설죄로 체포되었다. 배심원단이 평결을 내릴 수 없어 기소는 취소되었지만, 헤프너는 이로 인해 플레이보이 재단을 만들어,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연구하는 단체들에 자금을 지원하고 검열과 맞서 싸웠다.

헤프너는 1971년에 기업을 공개했으나, 70년대 중반에는 펜트하우스 등 하드코어 잡지들이 등장해 심한 경쟁을 겪었고 부수가 줄어들었다. 플레이보이는 1972년 1월에 최초로 마릴린 콜의 전면 전신 누드 센터폴드를 발표했다.

헤프너는 1985년에 59번째 생일을 몇 주 앞두고 가벼운 뇌졸중을 겪었다. 그때 헤프너는 큰 깨달음을 얻고 방탕한 라이프스타일을 많이 바꾸었다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보도했다.

“나는 2주 전 뇌졸중을 겪었다. 완전히 회복되었다. 기적에 가깝다. 이 일은 사실 행운인 셈이며, 나는 이로 인해 인생의 방향이 바뀔 것이라 생각한다.” 헤프너가 발표한 성명이었다.

그는 1982년부터 플레이보이 회장을 맡아온 딸 크리스티에게 기업을 넘겼다. 크리스티는 1988년부터 이사회장 겸 CEO로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2009년에 스콧 플랜더스가 CEO로 취임했고, 플레이보이는 방향을 크게 선회에 브랜딩과 라이센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년 뒤 헤프너는 2억 7백만 달러짜리 계약을 맺고 주식을 사들여 사기업으로 전환했다. 헤프너는 이 계약으로 매년 1백만 달러를 받고, 잡지 편집권을 전적으로 장악하고,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계속 살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고 포브스는 보도했다. 2011년 9월에 헤프너는 자신이 플레이보이의 37% 정도를 소유하고 있으나 라이센싱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 관여하고 있다고 헐리우드 리포터에 말했다. 자신의 개인 재산이 1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같은 기사에서 헐리우드 리포터는 죽음 이야기를 꺼냈으나, 가까운 동료의 말에 의하면 헤프너는 죽음에 대해서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헤프너는 자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으며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헤프너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딱히 피하지는 않았다. 당시 플레이보이측도 헤프너의 죽음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그건 상상하기 힘들다. 승계 계획도 없다.” 플랜더스의 말이었다.

2012년에 헤프너는 당시 21세이던 아들 쿠퍼가 플레이보이를 대표하는 얼굴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8월에 쿠퍼 헤프너는 플레이보이의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CO)가 되었다.

휴 헤프너는 늘 미녀들에게 둘려싸여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헤프너가 언론에 등장한 것은 주로 악명높은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그와 함께 살았던 젊은 금발 플레이보이 모델들 때문이었다.

헤프너는 1949년에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학생 밀드레드 윌리엄스와 결혼하여 크리스티와 데이비드를 가졌으나 1959년에 이혼했다.

1989년에는 36세 연하의 올해의 플레이메이트 킴벌리 콘래드와 재혼했다. 마스턴과 쿠퍼 두 아들을 낳은뒤 1998년에 별거, 2010년에 이혼했다.

콘래드와 12년 동안 별거하면서 헤프너는 플레이보이의 여러 젊은 모델들과 사귀었다. 샌디와 맨디 벤틀리 쌍둥이를 만나기도 했고, 한 번에 무려 7명의 여성과 사귄 적도 있었다. 그가 플레이메이트 홀리 매디슨, 브리짓 마쿼트, 켄드라 윌킨슨을 동시에 사귀었던 것은 리얼리티 시리즈 ‘더 걸스 넥스트 도어(The Girls Next Door)’에 나오기도 했다.

2008년에 세 여성 모두 헤프너와 헤어지고 플레이보이 맨션을 떠나기로 하자, 헤프너는 60세 연하의 크리스탈 해리스, 20세 쌍둥이 크리스티나와 카리사 섀넌과 사귀게 된다. 헤프너는 쌍둥이와 헤어지고 2010년에 해리스에게 청혼한다.

이들은 2011년 6월에 결혼하기로 했으나, 해리스는 결혼식을 5일 남겨두고 취소한다. 두 사람은 개의 양육권을 두고 요란하게 싸운 다음, 헤프너의 비서로 오랫동안 일했던 메리 오코너(2013년에 사망)의 도움으로 화해했다. 헤프너는 2012년 12월 31일에 해리스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

헤프너와 플레이보이는 누드를 싣지 않기로 하고 2016년 1,2월 호에 마지막 누드 커버 모델로 파멜라 앤더슨을 선택하여 화제가 되었다. 올해 초 ‘정체성을 되찾겠다’며 다시 누드를 싣기로 했다.

작년에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 소유였던 로스앤젤레스의 방 29개짜리 5에이커 플레이보이 맨션이 헤프너가 죽을 때까지 계속 살며 일하게 해달라는 조건 하에 1억 달러에 팔렸다.

2004년에 래리 킹이 낸 책 ‘내가 없어졌을 때 기억해줘(Remember Me When I’m Gone)’의 인터뷰에서 헤프너는 자신이 플레이보이 등에 남긴 유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밝혔다.

“나는 섹스에 대한 해롭고 위선적인 생각을 바꾼데 일조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리고 그 과정은 아주 재미있었다.”

헤프너의 유가족은 아내 크리스탈, 자녀 쿠퍼, 크리스티, 마스턴, 데이비드이다.

 

허프포스트US의 'Hugh Hefner, Founder Of Playboy, Dead At 91'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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