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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서 본 한반도 위기

감내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까지 간 것이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폭발 일보 직전까지 온 한반도 위기 상황은 극적인 반전의 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제는 대화다.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얼굴을 맞대야 한다.

  • 배명복
  • 입력 2017.09.28 07:09
  • 수정 2017.09.28 07:11

영국 영토인 북아일랜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런던데리. 아일랜드 사람들은 데리라고 부른다. 런던데리에서 남서쪽으로 15㎞쯤 가면 국경 마을 코시퀸이 나온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어디에도 경계를 알리는 표시는 없다. 양쪽을 잇는 4차로가 쭉 뻗어 있을 뿐이다.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국경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국경은 지도에만 있는 경계다. 500㎞에 달하는 '경계 없는 경계(borderless border)'를 넘어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가고 있다. 양쪽을 연결하는 210개의 도로를 통해 매일 3만 명의 인력이 상대 지역으로 출퇴근한다.

북아일랜드는 폭력과 테러로 얼룩진 분쟁의 땅이다.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원하는 가톨릭계 주민과 영국 영토로 남길 원하는 신교도 주민 간 유혈 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60년대 말부터 90년대 말까지 약 30년의 '더 트러블스(The Troubles)' 기간 동안 있었던 3만7000건의 총격사건과 1만6000건의 폭탄 테러로 3500명이 죽고, 5만 명이 다쳤다.

72년 런던데리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대표적이다.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평화행진에 나선 가톨릭계 주민들을 향한 영국군의 발포로 14명이 사망하고, 13명이 중상을 입었다. 90년 코시퀸에서는 아일랜드계 무장단체인 아일랜드공화군(IRA)이 주도한 차량폭탄 테러로 5명의 영국군이 숨졌다. IRA는 영국군에 협력한 '부역자' 가족을 인질로 잡고, 그 부역자를 시켜 450kg의 폭발물을 실은 차량을 영국군 초소를 향해 돌진하게 했다.

테러가 테러를 부르는 피의 악순환은 98년 합의한 '굿 프라이데이(Good Friday) 협정'으로 종식의 전기를 맞았다. 그리고 2006년 체결된 '세인트앤드루스 협정'으로 본격적인 이행 단계에 들어섰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의 경계를 허문 것은 초인적 인내로 진행한 평화 프로세스의 결실이다. 그러나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 결정으로 북아일랜드 평화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브렉시트는 EU에 유예한 영국 주권의 회복, 곧 국경 통제와 관세 장벽의 복원을 의미한다. 영국 영토인 북아일랜드와 EU 회원국인 아일랜드 사이에 다시 '딱딱한 국경(hard border)'이 재건될 수 있다는 의미다. 검문소와 세관, 군인들의 초소가 국경을 감시하고 통제하던 평화협정 이전 상태로 회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난주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수도인 벨파스트에서 경기도와 신한대, 아일랜드 트리니티대 공동 주최로 열린 국제 콘퍼런스에서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측 참석자들은 힘겹게 정착된 북아일랜드 평화에 브렉시트가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냈다. 브렉시트로 북아일랜드 평화가 위협받는 일은 없을 거라는 영국 정부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처럼 국경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국경 통제를 회복하는 것은 서로 모순이기 때문에 현실적 해법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북아일랜드의 평화 프로세스는 영국계와 아일랜드계의 경계를 인정하면서도 대화와 상호 존중, 권력 공유를 통해 경계를 뛰어넘은 과정이다. 그 과정이 아직 완전하게 끝나진 않았지만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순 없다는 데 양측 모두 동의하고 있다. 테러에 지친 신교계와 가톨릭계 주민들이 더 이상 폭력은 안 된다는 컨센서스에 이르면서 평화 프로세스는 시작됐다. 사상과 신념의 차이를 떠나 전인적 인격체로 서로를 대하며 끈질기게 대화를 이어갔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의 핵심은 아일랜드 정체성, 영국 정체성, 아일랜드·영국의 이중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반목한 북아일랜드인들에게 아일랜드나 영국 국적, 또는 아일랜드·영국의 이중 국적 중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헌법적 권리를 인정한 점이다. 경계를 뛰어넘어 공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감내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까지 간 것이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폭발 일보 직전까지 온 한반도 위기 상황은 극적인 반전의 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제는 대화다.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얼굴을 맞대야 한다. 누가 뭐래도 한국은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다. 한국을 배제한 채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의 말싸움이 주먹싸움으로 비화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용납할 수 없다. 전쟁을 할 때 하더라도 그전에 최대한의 대화 노력은 있어야 한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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