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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시린 겨울, 임금은 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었나

조선은 수탄 국난 속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종묘와 사직이 우선이라는 '명분'으로 도성을 버리고 파천을 단행했다. 해전에 약한 후금군과 맞서기 쉬운 강화도가 파천의 목적지였다. 그 와중에 수많은 조선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후금군의 노예로 끌려갔다. 인조정권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우왕좌왕했다.

  • 이태형
  • 입력 2017.09.28 13:06
  • 수정 2017.09.28 13:20

'상(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1636년 12월 16일부터 그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까지의 기간 동안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에서 자주 등장하는 짧은 문구이다. 조선의 지존 인조임금은 왜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추운 겨울 한양도성을 떠나 남한산성에 있어야 했을까?

남한산성 행궁 전경 2017년 8월 남한산성 촬영 ⓒ이태형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는 굴곡진 인생을 살았던 군주다. 1623년, 인조는 자신의 숙부인 광해군을 반정으로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다. 숙부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하며 왕위에 오른 그의 소회는 이러했다. "오늘날 비로소 금수의 땅이 다시 사람의 땅이 되었다." 이전 정권을 금수의 정권 즉 짐승의 정권이라 칭하고 자신이야 말로 인간다운 새로운 세상을 열 새 시대의 주인임을 선언한 것이다.

인왕산 기슭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풍문과 인조 집안의 비극

인조의 집안은 숙부 광해군으로부터 철저하게 파괴당했다.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항상 불안했다. 광해군의 한 평생을 함께 한 단어가 '역모'였으니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 할 자는 누구도 살려 둘 수 없었다. 광해군의 시대에 수많은 역모 사건이 있었다. 왕실의 종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역모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 되었다. 인조의 집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인조의 동생 능창군이 연루 돼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의 집 부근인 인왕산 기슭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풍문이 화근이었다. 이 일로 자식을 잃은 정원군(능창군과 인조의 아버지)이 곧 홧병으로 세상을 등진다. 동생과 아버지의 잇따른 죽음 앞에 인조는 복수를 다짐 했을 것이다. 이후 역사의 수레바퀴는 인조의 입장에서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굴러갔다. 앞서 언급한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한 것이다.

광해군시대의 적폐를 드러내야 한다는 압박

반정이라는 성공한 쿠데타를 통해 정권에 오른 인조는 모든 힘을 다해 광해군 시대를 부정했다. 인조가 어떻게 광해군 시대에 대해 부정했는지는 인조반정 직후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의 정당성을 알리는 교서에 잘 나타난다. 무려 열 가지를 발표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폐위 명분은 두 가지다. 첫째, '폐모살제(廢母殺弟)', 문자 그대로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살해한 죄이다. 광해군이 아버지 선조의 계비였던 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것은 유교의 효의 원리와 배치되는 패륜아적인 행동이므로 이를 단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이다. 두 번째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저버린 죄, 즉 명나라가 일본에 의해 다 망해가는 조선을 구원해줘 살아남게 해주었는데 조선은 은혜를 갚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조정권의 주장에 의하면 명나라와 후금(후의 청)의 전투에 있어 광해군이 명나라의 파병 요청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후금과 내통해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것이다.

인조정권에게 있어 광해군의 시대는 조선의 정체성을 부정한 '적폐의 시대'였다. 친모는 아니었지만 엄연히 아버지의 정비였던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친동생을 죽인 것은 유교국가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어버이의 은혜를 베풀어 조선을 구한 명나라를 적극 돕지 않고 오랑캐 중의 오랑캐인 야인(野人)이라 부르던 후금과 내통하다니! 인조정권이 이끌어낸 광해군 시대의 종말은 하늘이 허락한 '정의구현 시대'의 서막이었다. 인조반정을 이끌어 낸 세력은 자신감에 차있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비정상의 정상화를 진행했다.

사상누각(沙上樓閣)을 짓다

다른 조치보다 먼저 인목대비를 복권해 '효'의 나라 조선의 기틀을 다시 세웠다. 그와 함께 재조지은의 은혜를 갚기 위해 대외적인 정책의 기조를 친명배금(親明排金)으로 선회했다. 명분과 의리에 입각한 정의로운 유교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인조정권세력의 뜻이 반영된 조치였다. 그들이 쌓은 명분의 성은 철옹성 같아보였다. 그러나 명분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지킬 수는 없었다. 그들이 꿈꾸는 정의로운 세상이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새 시대의 시작과 동시에 찾아 온 내우외환(內憂外患)

인조 즉위 이듬해인 1624년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괄이 2등 공신에 책봉된 것에 불만을 품고 주요 반정공신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반란을 도모한 것이다. 초기 이괄의 반란군의 기세는 대단했다. 한양도성이 반란군의 손에 넘어가고 인조는 공주까지 파천을 떠나야했다. 인조정권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가까스로 반란군을 진압했지만 피해는 컸다. 내전으로 인해 가뜩이나 약했던 국방력에 크나큰 손실을 가져온 것이다. 특히나 북방지역의 방어를 담당해야 할 군사력이 반란군 진압에 활용되면서 관서 지방의 방어체계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다.

압록강 건너 북한 모습 2017년 7월 중국 단동에서 촬영 ⓒ이태형

인조정권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정권의 위협을 넘어 국가의 존립을 뒤흔드는 일이 발생했다. 1627년 1월 후금 군이 압록강을 넘어 의주성을 공격한 것이다. 후금이 조선을 대규모로 공격한 정묘호란의 시작이었다. 당시 후금은 후금을 세웠던 누르하치가 죽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왕위에 있었다. 청태종으로 불리는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누르하치의 생전에 명을 치기 위하여 후환을 미리 없애려고 하였고 따라서 조선부터 정벌해야한다는 호전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정묘년에 인조정권의 친명배금의 외교기조를 구실삼아 단단히 손을 봐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을 친 것이다. 조선정벌에는 잔인하기로 소문난 몽골군으로 구성된 부대를 앞세웠다. 후금군은 한양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인조는 다시 도성 한양을 떠나야 했다.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다시 도성을 저버려야했던 것이다.

현재 중국과 북한을 잇는 압록강철교 2017년 7월 중국 단동에서 촬영 ⓒ이태형

한국전쟁 때 끊어진 구철교 옆에 신철교가 나란히 놓여있다.

주변 산천은 변했지만 말 없이 흐르는 압록강은 400년 전 그 날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조선의 선택

조선은 숱한 국난 속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종묘와 사직이 우선이라는 '명분'으로 도성을 버리고 파천을 단행했다. 해전에 약한 후금군과 맞서기 쉬운 강화도가 파천의 목적지였다. 그 와중에 수많은 조선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후금군의 노예로 끌려갔다. 인조정권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우왕좌왕했다. 승산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양측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후금군과 가까스로 화친교섭을 진행했다. 교섭의 결과물은 '형제의 맹약'이었다. 교섭 이후 인조정권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됐다. 개돼지보다 못하다고 무시했던 야만인들과 형제관계가 된 것이다. 인조정권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인하게 된 현실 속에 조선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후금이라는 거대한 힘에 맞설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 수긍할 것인가. 답은 간단해 보였다. 하지만 400년 전 조선이 내린 답은 참혹 그 자체였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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