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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는 그리고 우리는

MBC에서 노조가 탄생한 건 1987년 12월이었다. 1987년은 6월 항쟁이 일어난 해다. 새로운 시대적 갈망이 꿈틀대던 그해에 MBC 노동조합이 설립됐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거다. 노동조합의 탄생은 공정한 방송 보도를 지향하고 국민에게 진정한 알 권리를 제공하고자 하는, MBC 내부자들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 이었다. 흥미로운 건 9월 4일 총파업을 시작한 지금의 MBC가 그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이다.

  • 민용준
  • 입력 2017.09.28 11:12
  • 수정 2017.09.28 11:33

이번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다. MBC 총파업이 시작됐다.

상암동에 있는 MBC 본사를 찾은 건 지난 8월 30일 오전 10시경이었다. 꽤 넓은 1층 로비는 전반적으로 한산해 보였지만 방송국 견학을 온 것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한편은 왁자지껄했다. "안녕하세요, 김철영입니다." 라디오국의 김철영 PD였다. 그의 명함에는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서울지부 편제 부위원장이라는 직책이 쓰여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이 명함을 받았다면 그가 라디오 PD인지 알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한동안 라디오 연출을 맡지 못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었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애초에 명확한 이유가 존재할 일도 아니었다. 물론 심증은 있었다. 2012년 파업에 참여한 전국언론노동조합 MBC 본부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배 생활이 시작됐다. 삼청교육대를 빗대 '신천교육대'라 일컫는 신천의 MBC 아카데미로 교육 발령을 받고 그곳에서 브런치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 뒤론 MBC 경인지사로 전보 조치됐다. 그나마 몇 달 뒤 다시 라디오국에 복귀했지만 여전히 제작과 무관한 임무가 주어질 뿐이었다. 심지어 그 전까진 존재하지도 않았던 야간 MD라는 직책을 졸속으로 만들어 업무 지시가 떨어지기도 했다. "지난 7년 중 프로그램을 맡은 날을 합치면 아마 2년도 안 될 거예요." 그나마 최근에는 몇 달 전부터 아침 프로그램을 하나 제작 중이다. 하지만 그날 그는 스튜디오로 가지 않았다. 28일부터 라디오국도 제작 거부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PD가 사라진 라디오에선 음악만 나오고 있었다.

김철영 PD를 만난 곳은 MBC 방송센터 로비 1층이었다. 그는 전국언론노동조합 사무실로 안내하겠다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여의도 MBC 시절 노동조합 사무실은 1층에 있었다. 누구나 오가며 들르기 쉬운 위치였다. 지금의 MBC에선 그렇지 않다. "정말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두려고 노력한 티가 너무 나요." 상암동 MBC는 세 개의 센터로 구성돼 있다. 방송센터 와 경영센터 그리고 미디어센터. 전국 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사무실은 미디어센터 11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방송센터에서 건너가려면 8층으로 올라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경영센터로 이어진 구름다리를 건넌 뒤 경영센터 13층으로 올라가 또다시 구름다리를 건너야 한다. 물론 미디어센터 1층으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까지 올라가는 게 더 간편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접근성이 떨어지는 건 확실해 보였다. 노동조합 사무실을 배치할 권리를 누가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노동조합 측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처럼 보이진 않았다.

사무실은 분주했다. 유리 벽 너머 회의실 안에는 MBC의 대표적인 해직 언론인이자 최근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 <공범자들>을 연출한 최승호 PD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공범자들>에 등장했던 김연국 전국언론노동조합 MBC위원장도 눈에 띄었다. 곧 방송센터 로비 1층에서 집회가 예정돼 있다고 했다. 사무실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미디어센터 1층으로 내려와 방송센터로 걸어왔다. 이래저래 번거롭긴 매한가지였다. 어쨌든 1층 로비는 여전히 한산했다. 그러나 5분 사이 삼삼오오 모여든 직원들로 그득 메워지더니 곧 행렬을 맞춰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머릿수를 대충 세어봐도 500명은 돼 보였다. 앉아 있는 이들의 정면에 있는 모니터에서 영상이 나왔다. 꽤 오래된 보도 영상들이 차례로 나왔다. 사람이 등장할 때마다 깔깔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는데 젊은 시절의 손석희가 등장할 때는 "오!"라는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점점 침묵이 짙어졌고, 곧 흐느껴 우는 이들도 있었다. 웃음과 환호가 교차하다 이내 조용해지고 숙연해지는 분위기에서 5년간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게 보이는 듯했다.

이날 집회에선 소위 유배지라 불리는 여의도, 구로, 경인지사 등 MBC 자회사의 비제작 부서로 발령받은 조합원 32명이 유배지 폐쇄를 선언했고, 최승호 PD를 비롯한 해직자들은 복귀할 것을 약속했다. 파업에 연대할 것임을 선언했다. 어차피 모두가 다 MBC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하나하나 호명할 때마다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그 모든 순간이 지나고 집회의 끝에서 김연국 위원장은 파업을 선언했다. "지난 9년간 저항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수백 가지였지만 저항해야 할 이유는 단 세 가지 이유를 넘길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정의, 공정 방송, 양심, 우린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9월 4일 0시부터 강도 높은 총파업에 들어갑니다. 강고한 총파업으로 MBC를 되살립시다!" 우레 같은 박수와 환호에 이어 구호를 외쳤다. 덕분에 그 옆으로 줄지어 지나가던, 방송국 견학을 온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일후 아나운서는 2012년 7월 17일을 정확히 기억했다. MBC 사상 최장 파업 기간이었던 170일간의 파업이 종료된 날이었다. 저녁 8시경, 술자리에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친한 선배였다. "일후야, 너 발령났어!" 평소 워낙 짓궂은 장난을 많이 치는 편이라 그 날 역시 그런 줄 알았다. 아니었다. 갑자기 폭풍처럼 카톡 메시지가 쏟아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파업이 끝났으니 다음 날 아나운서국으로 업무 복귀를 했다. 부서장들은 별말이 없었다. 그들도 이유를 몰랐다. 발령 난 곳은 미래전략실이라고 했다. 처음 듣는 곳이었다. 파업이 끝난 당일 저녁 8시에 신설된 부서라 했다. 허일후 아나운서를 포함해 8명이 해당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담당 부서장이라는 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만나자는 것이었다. 문제는 부서장이라는 이를 포함해 그 누구도 부서 사무실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속해본 적 없는, 애초에 없던 부서였으니까. 겨우겨우 찾아간 곳은 일산MBC 드림센터 8층 안쪽 구석에 있는 공간이었다. 본래 직원용 피트니스 센터가 있던 자리라고 했다. 미래 전략의 필요성이 얼마나 갈급했는지 벽을 두른 유리 거울을 떼지도 않고 그 위로 벽지를 바른 듯했다. 사무실 명패도 없었다. 그저 인원수에 맞게 책상만 배치돼 있었다. 이틀 뒤에 인터넷이 깔리고, 사흘 뒤에 정수기가 설치됐고, 일주일 뒤에 복사기가 설치됐다.

"그 부서에 9개월 정도 있었는데 '너 아나운서 아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어요. 부서장을 포함해 사측 인사가 두 명 정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내게 요구한 건 뭐든 상관없으니 PT를 하라는 거예요. 예전에 다녀왔던, 좋았던 여행지에 관한 것도 좋으니 그냥 PT 를 만들어 오래요. 왜냐면 그 사람은 자신이 일을 시키고 있다는 보고서를 윗선에 제출해야 했기 때문에 뭐든 상관없었던 거죠. 20년 넘게 방송을 제작해온 PD들 입장에선 얼마나 모욕적인 일이겠어요." 확실히 미래 전략과는 무관한, MBC의 미래를 밝힐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전문 분야가 있는 인원을 무작정 타 부서로 발령내고 어떠한 목표도 없는 소모적인 작업에 투입하는 일은 허일후 아나운서 혼자 겪는 일이 아니었다. 노조에서 소위 유배지라 부르는 자회사의 비제작 부서로 발령된 이들에게 이런 소모적인 업무는 일상이었다.

허일후가 아나운서국에 복귀한 건 2013년 4월 5일이었다. 당시 노조에서 소송을 제기한 부당전보가처분 신청에서 승소한 덕분이었다. 2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원부서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추가 발령이 이어졌다. 아나운서국에서 쫓겨나듯 발령된 이만 11명에 달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허일후는 다시 발령을 받진 않았다. 하지만 아나운서국에 있을 뿐 아나운서로서 방송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1년 7개월 동안 어떤 방송도 못 했어요. 라디오 프로그램 타이틀 녹음도 불가했어요.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이 아홉 글자조차 제 목소리로 라디오에 방송돼선 안 된다고 했어요. 3분짜리 라디오 정시 뉴스만 가능했죠.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런데 2013년 가을에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다양한 시범 대회가 열렸다. 1년 7개월 만에 중계방송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2014년부터는 중계방송은 괜찮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기준이 없는 거예요. 물론 어떤 기준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떨 때는 되고 어떨 때는 안 되고, 선심 쓰듯이 대단한 기회를 주는 양 말하는데 당사자 입장에선 정말 힘든 거죠." 말하는 표정이 그리 어둡진 않았다. 되레 밝았고, 잘 웃었다. 그럼에도 그 웃음은 필연적으로 썼다. "9개월 가지고는 명함도 못 내밀어 요. 5년째 밖으로 도는 분들도 있고.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사실 정말 미안하죠. '내가 방송을 해도 되나? 밤 10시에 라디오 게스트를 나가도 되는 걸까?' 그런 마음이 들어요."

MBC에서 노조가 탄생한 건 1987년 12월이었다. 1987년은 6월 항쟁이 일어난 해다. 새로운 시대적 갈망이 꿈틀대던 그해에 MBC 노동조합이 설립됐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거다. 당시만 해도 MBC 뉴스는 '땡전뉴스'로 분류됐다. 그러니까 시계가 땡 하고 울리면 '전두환 대통령은'이란 말로 시작하는 뉴스를 지칭하는, 친정부적 언론 보도가 만연한 방송사였다는 것이다. 덕분에 성난 민심으로부터 취재 차량이 돌팔매질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동조합의 탄생은 공정한 방송 보도를 지향하고 국민에게 진정한 알 권리를 제공하고자 하는, MBC 내부자들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 이었다. 흥미로운 건 9월 4일 총파업을 시작한 지금의 MBC가 그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이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 촛불 시위 이후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 올해는 어쩌면 1987년 6월 항쟁에 비견될 역사로 회자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촛불 집회가 열린 광장으로 나서야 했던 일선 기자들은 1987년의 MBC 기자들처럼 치욕을 각오해야만 했다. MBC 취재 차량이나 카메라가 보이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해대고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손찌검을 당하는 경우도 생겼다. 매번 마음에 금이 가는 경험을 하고 방송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경영진이 딱히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뉴스는 망가져도 상관없었다. 어쩌면 망가지길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정권에서 원한 건 MBC를 의미 없는 회사로 만드는 것이었어요.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수많은 매체 중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힘을 빼놓는 것이었죠.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방송 민주화를 실현하고 방송 강령의 정신을 쟁취하려는 이들을 핵심 업무에서 배제시키는 식으로 힘을 빼버리는 거죠. 그래서 노동조합을 탈퇴하면 파격적인 혜택을 준다고 회유했어요. 승진도 보장하고, 해외 연수나 특파원 자격도 우선적으로 보장하고. 두둑하게 인센티브도 챙겨주고." 김철영 PD의 말이다. 덕분에 900명이 넘었던 서울의 노동조합원이 800여 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회사의 노력에 비하면 노동조합을 탈퇴한 이들의 숫자가 그리 많은 것 같진 않다. 많은 이들이 노동조합원의 자격을 저버리지 않은 건 여전히 MBC에서 보고 싶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8월 31일 MBC 본사 1층 로비에는 '김장겸 퇴진'이라고 적힌 피켓을 든 노동조합원들 앞에 뜻밖의 인사들이 찾아와 총파업을 독려했다. 바로 KBS 아나운서들이었다. KBS 아나운서 협회장인 윤일구 아나운서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한때 MBC 채널에 제가 나오는 걸 꿈꿨던 적이 있습니다." 뒤를 이어 마이크를 잡은 KBS 이광용 아나운서 역시 "2002년에 MBC 계열사에서 1년 일하다 MBC 아나운서를 꿈꿨 지만 MBC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KBS의 선택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한때 MBC는 공정 언론의 상징과도 같은 방송사였다. 뉴스 신뢰도 조사에서 항상 1등을 차지했다. MBC 공채 출신들은 실력 있는 인재를 채용하는 방송사에 입사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럴 만했다. MBC의 신입 공채 방식의 엄정함과 까다로움은 익히 유명했다. MBC의 신입 공채에는 서류 면접이 없다. 1차부터 필기시험으로 시작된다. 시작부터 주관적인 요소를 전면 차단해버린 셈이다. 흥미로운 건 2차 시험부터 다시 제로베이스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1차 필기에서 만점을 받아도 2차 시험에서 탈락할 수 있는 구조다. 2차 시험에서 최고득점을 받아도 3차 블라인드 면접에서 역시나 탈락할 수 있다. 최종 단계에서는 3차까지의 모든 성적을 합산해서 다시 평가한다. 애초에 외부 청탁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적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에 보도본부장의 아들이 MBC 공채 기자 시험에 응시했지만 3년 연속 탈락해 끝내 입사가 좌절된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MBC에 입사한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김재철 전 MBC 사장이 부임하면서 시작된 건 경력 공채의 일반화였다. 본래 MBC는 매년 평균 20~30명의 신입 사원을 뽑아서 차근차근 인력을 채워나가는 방식으로 30여 년간의 인력 계획까지 수립해놓은 회사였다. 하지만 2012년 파업 이후로 2016년까지 MBC가 채용한 연봉 계약직이 229명에 달한다. 단기 계약직은 숫자도 파악이 안 될 정도다. 부서에 인원이 필요 없음에도 경영진에선 무조건 사람을 뽑으라고 강요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MBC의 DNA를 바꾸기 위해서. 기존의 공채 인력을 밀어내고 언제나 대체 가능한 인력을 지속적으로 채워가는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간과한 것은 기존에 MBC의 DNA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버틴다는 것이었다. "5년 전에 완벽하게 패해서 처참하게 무너졌는데 지금 이렇게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는 건 서로에 대한 연민이 있기 때문이에요. 해직된 선배들을 보면 가슴 아픈데, 해직된 선배들은 저랑 손정은 아나운서가 한 인터뷰를 보고 오히려 울었대요. 어쩌면 지금까지 쌓아온 MBC 조직원들에 대한 존경과 신뢰 그리고 지난 5년간의 상처에 대한 공감과 미안함이 지금의 연대를 위한 기반이 된 셈이죠. 이런 마음이 모여서 결국 물결이 만들어지는 거 같아요. 저는 이 파업이 5년 만에 새롭게 벌어진 게 아니라 2012년에 끝내지 못한 싸움을 끝내기 위해 다시 시작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우린 계속 이 안에서 싸워왔어요." 허일후 아나운서의 말이다.

유배지에서도, 갖은 회유에도 노동조합원들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고, 회사를 쉽게 떠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때를 기다리며 나름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지 못한 싸움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건 MBC에서 방송을 하는 것이 자부심이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정한 공영방송으로서의 가치를 드높인다는 명예가 드높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을 잊지 못하고,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이 MBC에 남아 자신들의 DNA로 다시 MBC라는 공영 방송의 자존심을 세울 날을 고대하는 것이다. "MBC를 국민의 품으로"라는 구호는 MBC 파업의 지향점이 공영방송의 주인인 국민의 여론에 다시 주파수를 맞추겠다는 의지의 천명과도 같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공영방송은 정말 국민의 것인가? 국민이 주인인가? 정권의 변화 속에서 정부의 입맛에 맞춰 방송사를 운영하고 장악할 부역자를 경영자로 선출하는 건 이번 정권에서도, 다음 정권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역설적이지만 지난 7년간 MBC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에서는 이번 파업이 성공한다 해도 과연 그런 상황을 막아낼 방안이 있는 것일까? "솔직히 말하면 순진했어요. 경영진이 이렇게 의미 없는 회사로 만들어버리고 사람들을 쉽게 쫓아내버리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죠. 사실 MBC 노동조합원들이 하나의 주의를 지향하는 강성 집단일 거라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상 보수적인 사람과 진보적인 사람이 뒤섞인 리버럴한 영역이에요. 우리는 그 영역에서 활발한 토론이 가능하다면 충분히 괜찮을 거라 생각했죠. 그래서 더욱 강력한 단체협약이 필요할 거 같아요. 다행인 건 아직 노사 협의로 만든 편성 규약도 살아 있고, 방송 강령도 살아 있어요. 그리고 MBC의 방송 강령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방송의 주인이 국민임을 명심하고...." 이런 내용을 디테일하게 사규로 포함시키고 이를 기반에 둔 단협을 구성해야죠. 정권이 바뀌어도 해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단협 말입니다." 김철영 PD의 답이다.

'방송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건 어쩌면 공영방송사가 아니고서야 찾을 수 있는 명분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국민 역시 공영방송사에 대한 주인 의식을 쉽게 포기해선 안 될 일이다. 광장에서 MBC 라는 이름 석 자에 모욕감을 안기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시도해야 한다. 현재 공영방송사가 정권 교체에 가장 크게 휘둘리는 원인은 사장 선임을 결정할 수 있는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임원의 선정 방식에 있다. 총 9명으로 구성된 방문진은 청와대와 여당에서 추천한 인사 6명과 야당 측 추천 인사 3명으로 구성된다. 현 정권의 입장에 따라 사장 교체가 용이한 구조다. 지난 9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교육, 사회, 문화 분야를 대상으로 열린 대정부 질문에선 1년 넘게 국회에서 계류 중인 방송법 개정안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여야가 7명과 6명씩 방문진 인원을 추천하고 이 가운데 3분의 2 이상 찬성을 통해 공영방송사의 사장을 선출하는 '특별다수제' 원칙이다. 가능하다면 정부와 여당 추천 인사가 야당에 비해 2배 수에 달하는 기존 원칙보다 더 공정한 입장이 견지될 만한 변화다. 하지만 이를 두고 문재인 대통령은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사람을 공영방송 사장으로 뽑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언급했다. 그 이후로 여당의 개정안 추진도 미진해진 상황이다. 어쩌면 우린 여전히 공영방송사의 사장 선출이 정치공학적 논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일관성 있게 경험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MBC는 지금 파업 중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의 노조원 중 93.2%가 파업에 찬성하며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MBC 안팎에서도 많은 지지가 모이고 있다. 물론 야당의 일각에선 공영 방송사의 파업이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다며 의혹을 제기한다. 서는 곳이 달라져도 하는 짓은 변하지 않는다. 지난 5년간 공영방송이 정치적 의도 아래 끝없이 침몰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정말 그들의 말대로 현명한 정치적 의도가 필요한 때일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대통령이 공영방송사 사장의 선임 문제에 직접 발언할 필요가 없도록 공정해 보이는 제도를 확립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건 MBC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영방송사의 가치가 상실되면, 멀쩡히 돌아가던 언론의 시계가 멈춰버리면, 혹은 과거로 퇴보해버리면 진실이 얼마나 왜곡되고 세상이 침몰할 수 있는지,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명확히 지켜봤다. 그렇다면 이건 MBC만의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에 맞선 미국 CBS 앵커 에드워드 머로는 이렇게 말했다. "TV 는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계몽하고 영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그런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은 한 TV는 바보상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 이젠 당신이 선택할 차례다.

<에스콰이어> 10월호에 실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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