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소녀상을 생각한다

위안부의 아이돌화라는 말로 내가 우려했던 건 위안부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앞에 서면 설수록 다른 한편으로 진짜 위안부와 멀어지게 만들 수 있음을 나는 나는 우려했다. 달리 말하면 너무나 가볍게 소비하면서, 아무도 그 안의 진실을 제대로 보려고는 하지 않는.

  • 박유하
  • 입력 2017.09.26 12:04
  • 수정 2017.09.26 12:30

얼마전에, 초청받았던 한 세미나에서 위안부 문제 관련해서 했던 이야기중 일부를 한 언론이 가져다가 나의 취지와는 다르게 보도한 탓에 또다시 세간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미 여러 번 반복된 일이기도 하고, 수정요청을 한다 해도 바뀐 적도 별로 없기 때문에, 나는 그 사태에 대해 따로 해명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 그날 사용했던 발언요지자료를 올리기는 했지만, 아직 문장으로 만들지 않은 채로 방치중이다.

늦었지만, 그 문제에 대해 쓰기로 한 건, 최근에 미국, 영국 그리고 독일의 매체가, 한국의 위안부 운동에 대한 직간접적인 우려가 섞인 기사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 기사를 한국에 전달해 공론화한 매체도 아직은 없어 보이는 것도, 내가 굳이 언급하는 이유중 하나다.

8월 10일에 서울에서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위안부문제와 한일관계 전망>이라는 세미나에서 내가 `위안부의 아이돌화`라는 표현으로 지적하려 했던 것은, 우리사회에서 위안부가 너무나 `가볍게` 소비되는 현상이었다. 많은 이들이, 악의적으로 보도한 기자의 의도대로, 내 발언을 위안부에 대한 마음을 비판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비난했지만, 내가 비판한 건 위안부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위안부가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표현되고 있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의 수용과 표현이 나올 법 한 소녀상의 원제작자(조각가 뿐 아니라 운동단체 포함)들의 조선인 위안부 이해와 표현방식이었다.

나는 그 날 세미나에서, 소녀상 자체에 관해서는 오히려 `철거는 역효과`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소녀상`관련 의견을 전하고 싶었다면 가장 우선시되었어야 할 그 부분은 빼놓고 기자는 `아이돌화`만을 헤드라인으로 뽑아 보도한 것이었다. 심지어, `소녀상을 둘러싼 갈등` 이라는 소제목 아래 몇가지 `갈등`양상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가져와 기자는 `소녀상을 둘러싼 갈등이 위안부의 아이돌화`를 가져왔다고 내가 말한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그건 기자의 해석일 뿐, 나의 생각이 아니다. 이런 식의 단선적이고 탈맥락적인 보도에 접한 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런 기사가 보여주는 성급함과 강퍅함에서 나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위기를 본다.

나는 `소녀상의 피상적인 소비양상에 대한 비판 필요`라고 자료집에 썼다. (기자는 그 날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고 자료집만으로 기사를 썼다) 그리고 `피상적인 소비양상`이란, 바로 여고생들이 그렸다는 순정만화풍 스티커등에 대해 한 말이었다. 그 스티커를 페이스북에 올려 두었더니 `위안부의 모에`현상이라고 지적한 이도 있었는데, 타당한 분석으로 보인다.

밝고 활기차고 앙증맞기까지 한 그 그림 속 캐릭터는, 소녀상을 만든 이들이 환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 노란 나비와 함께 놀고 있는, 글자그대로 때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소녀`였다. 말하자면 그 그림은, 위안부로 동원되기 이전의 천진하고 행복한 시절을 형상화한 그림이었다. 심지어 대사관 앞 소녀처럼 분노나 저항의 눈빛조차 담고 있지 않았다.

두말 할 것 없이, 그 그림은, 위안부의 불행했던 과거--현실이 아니라 있을 수 있었던(존재하지 않았던) 행복했던 시절, 즉 위안부 이전의 시간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물론 그림을 그린 여고생들은 위안부 할머니에게 사라지고 만 행복한 소녀시절을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담았겠지만(실제로 많은 이들이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일본을 향해 외쳤다), 그림 속의 시간이 위안부체험 자체와 괴리된 시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한, 그 그림은 참혹한 위안부생활은 망각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소녀의 의식은, 타자의 위안부 체험을 마주하기보다, 가급적 마주하지 않는 쪽에 서 있다. 본인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그리고 아마도, 한 학자가 아이러니하게도 지적했듯 자신을 투영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실의 위안부란, 이미 모두가 아는 것처럼 끔찍한 신체적 고통을 수반한 체험이었다. 또 그 후유증으로 인해, 돌아와서도 대부분은 `병`과 함께 해야 했으니 위안부란 대부분 훼손된 신체의 주인공들이다. 더구나, 현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대상--노쇠한 신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그림을 그렸다는 여고생에게 그런 할머니를 방문해 목욕 서비스라도 해 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초등학생을 죽이고 타교학생이나 동급생에 대한 구타/폭행도 마다 하지 않는, `타자의 몸`의 존귀함과 고통에 무감해진 오늘의 한국의 10대들중에, 위안부할머니의 현실의 ` 늙은 `몸--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상처로 가득한 몸` 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보여줄 소녀들은, 없지 않겠지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봉사점수를 따기 위한 것이든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든, 그들은 할머니를 위한 시위에 참석하고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줄 수는 있겠지만, 그런 행위는 일정부분, 위안부할머니의 그 옛날 진짜 체험과 오늘의 현실을 마주하지 않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말하자면 위안부 `동상`이나 `그림`에 대한 `기림`이 현재의 소비방식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그와 마주하는 시간은 오히려 과거의 위안부와 등신대로 마주하는 일에서 ``효과적으로 `멀어지게 하는 일일 수 있다.

위안부의 아이돌화라는 말로 내가 우려했던 건 위안부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앞에 서면 설수록 다른 한편으로 진짜 위안부와 멀어지게 만들 수 있음을 나는 우려했다. 달리 말하면 너무나 가볍게 소비하면서, 아무도 그 안의 진실을 제대로 보려고는 하지 않는.

여고생들이 그린 천진난만한 그림에야 죄가 없지만, 위안부들이 겪은 고통을 <여성의 보편체험>으로서 이해하고 `노인`의 고독과 진정으로 마주하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한단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표현들이 공유되고 확산되는 현상에 대해 나는 우려를 표했을 뿐이다. 그저 일본에 대한 단죄를 요구하는 상으로만 기능하는 한, 소녀상 역시 언젠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동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나는 우려했다. 이승복소년상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말한 `위안부의 아이돌화`란, 얼마전에 군함도 영화에 대해 썼던 글에서 `군함도에는 피해자가 없다`고 썼던 맥락과 다르지 않다.

여고생이 그린 그저 `귀여운` 소녀, 한번도 능욕당한 적이 없는 천진한 소녀캐릭터는, 굳이 말하자면 한번도 식민지화되지 않은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조선이 그랬듯, 위안부로 가야 했던 소녀/처녀들은 대부분 가기 전에도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예외도 없지 않지만, 그들은 대부분,가난한 집에 태어나 남의 집에 양녀로 가야 했거나, 남편이나 오빠, 혹은 아버지의 박대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위안부의 아이돌화>란, 위안부할머니에 대한 마음과 존중을 비판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과거를 회피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직면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그 때문에 이제 오히려 외부사람들에 의해 마주하기를 요구받게 된 우리의 모습에 대해, 우리 먼저 나서서 생각해 보자고 나는 말하려 했다.

가볍게 소비되든 진심으로 모셔지든, 과다표현은 대부분, 대상자체보다는 자기자신을 위한 것이기 마련이다. 버스 안 플라스틱 소녀상을 향해 ``아이고 여기 계시구나``라고 말했다는 서울시장의 한마디가 그것을 증명한다. 오늘의 한국인, 특히 남성들은, 그 옛날 소녀에 대한 오늘의 자신의 배려를 확인하는 일로, 오늘에 대한 자기만족은 물론, 과거로 돌아가 `지켜주지 못했던(않았던) 나`까지 무의식 속에 면죄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극복하는 방법은, 실제와는 다른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마주하는 일에 있다. 실재한 과거에 대한 직시와 분석만이,과거와 다른 내일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고향에 돌아와 깨끗하고 아름다운, 독립한 내 나라의 수도를 구경했어야 할 소녀들이 없지는 않다. 전쟁당시, 칠십 몇년전에 위안소와 전쟁터에서 병사, 자살, 폭사, 혹은 옥쇄라는 이름의 집단자살의 희생양이 된 이들이 그들이다.

따라서, 하얀 저고리/까만 치마모습의 플라스틱 소녀상이 누군가를 상징한다면 그런 이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었어야 한다 . 제작자들은 의식하지 않았겠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소녀상은 돌아온 `귀신`이었고. 버스 소녀상을 처음 본 이들이 으스스하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는 사실 올바른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산 자로 소환되었기에(대사관 앞 소녀상 뒷면에는, 동상이 (운동에 참여한 노인과 운동단체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조형물이라고 쓰여 있다),그녀들은 모처럼 소환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국제 #위안부 #역사 #소녀상 #위안부 할머니 #아이돌 #스티커 #보이스 #여성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