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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을 위한 변명

있는 그대로의 한국 사회는 사실상 돈과 학벌이 지배하는 신분사회다. 하지만 그 신분 위계의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도 감히 공식적으론 그걸 긍정할 수 없다. 그 위계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를 공개적으로 할 수도 없다. 속마음을 숨기는 위선을 저질러야만 한다. 그런 위선은 필요악이다.

  • 강준만
  • 입력 2017.09.25 11:57
  • 수정 2017.09.25 12:02

위선은 적을수록 좋으며, 따라서 위선에 대한 비판은 왕성하게 하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나 타인의 위선을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기적 욕망 실현의 면죄부로 삼아선 안 된다. 트럼프는 성찰을 위한 극복의 대상이지 모방을 위한 긍정의 대상이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의 공화당 경선은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성토장이 되었다. '정치적 올바름'은 다문화주의를 주창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 사용이나 활동에 저항해 그걸 바로잡으려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1980년대부터 미국 정치의 한복판에 들어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대체로 공화당은 반대, 민주당은 찬성하는 입장을 보여왔다. 그런 충돌이 반복된 2016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들 중 가장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 인물은 현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였다.

트럼프는 미국인들이 '정치적 올바름'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음에도 감히 그걸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며, 자신이 그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올바른 당위를 역설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제도화된 사기행각으로 간주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말하는'(telling it like it is) 것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다.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그런 '솔직함'에 열광했고, 그 덕분에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자면, 미국 사회엔 인종차별이 엄연히 존재한다. 차별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사회적 차원에선 인종차별은 해선 안 되는 금기로 간주된다. 이런 경우에 솔직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존 제도와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거나 그 파괴를 꿈꾸면서 차별을 수반하는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유인가?

그런 자유를 추악하다고 본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유세 중 "극히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를 지지하는 절반을 개탄할 만한 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 힐러리는 회고록을 통해 그 발언을 자신의 패인 중 하나로 꼽으면서 후회했지만, 이 사건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개탄할 만한 집단'의 심리 상태다.

트럼프가 1970년대에 도박사업에 뛰어들면서 자신을 정당화한 논변을 보자. 그는 도박에 대한 반대 의견을 위선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로 "뉴욕 증권거래소야말로 세계 최대의 도박장"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카지노 도박이 주식 투자(투기)와 다를 게 없다는 주장은 견강부회의 냄새가 풍기지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말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말이 안 될 것도 없다.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논란은 사실상 위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다. 보수파가 보기에 힐러리는 윤리적 논란의 소지가 있는 재산 축적 등의 문제로 위선적 진보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진보파의 입장에선 그런 위선은 비교적 작은 문제지만, 보수파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자신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충실히 살아가면서 대중을 향해선 그런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강한 반감을 갖는다. 더 나아가 자신들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말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자기 정당화의 근거로까지 삼는다.

한국은 어떤가? 있는 그대로의 한국 사회는 사실상 돈과 학벌이 지배하는 신분사회다. 하지만 그 신분 위계의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도 감히 공식적으론 그걸 긍정할 수 없다. 그 위계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를 공개적으로 할 수도 없다. 속마음을 숨기는 위선을 저질러야만 한다. 그런 위선은 필요악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위선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듯,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말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

이대로 좋은가? 아니다. 위선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규범의 가치를 재확인시켜주는 순기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위선 없는 인간과 위선 없는 사회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신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라인홀드 니부어가 잘 지적했듯이, 국가의 가장 현저한 도덕적 특징은 위선이다. 국가 없는 세상을 살겠다면 모를까, 위선 없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조직이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위선이 좋다는 게 아니다. 위선은 적을수록 좋으며, 따라서 위선에 대한 비판은 왕성하게 하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나 타인의 위선을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기적 욕망 실현의 면죄부로 삼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성찰을 위한 극복의 대상이지 모방을 위한 긍정의 대상이 아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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