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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바에서 에이즈에 대해 말하기, 그것도 감염인-비감염인 게이의 연애에 대해서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로 연애하고 사랑하고 섹스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관계라고 말하곤 한다. 또 절반은 틀리다. 에이즈에 걸렸다고 바로 죽음을 맞이하는 시대는 지났다. 하루 한 알 간편하게 복용하면 치료가 끝날 정도로 에이즈 치료제는 '완치'를 향해 발전해가고 있다.

STEP 5. 속삭이기 - "PLFM 단‧짠‧매 라디오" 후기

글 | 정욜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인권재단사람 활동가)

일찍 데뷔한 형들에게 물으면 게이바에서 에이즈는 금기어에 가까웠다. 에이즈(AIDS)와 비슷한 발음으로 '아디다스(ADIDAS)'라는 은어를 사용하기도 했고, 아무 말 없이 손으로 A를 만들어 표현했다고 한다. 게이바는 "누가 에이즈에 걸렸다고 하더라" 라는 소문이 도는 곳이었다. 실제 감염되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소문의 중심에 서 있는 이가 술집에 오기라도 하면 모두 침묵하거나 그가 간 뒤에 마신 컵과 먹었던 음식까지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락스로 소독까지 했다는 말까지 들은 적이 있는데, 옛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엔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에이즈에 '걸린' 사람에 대한 적대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런 게이바에서 에이즈를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게이바 모든 곳에서 에이즈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굳게 잠겨 있던 문이 열린 듯하다. 키싱에이즈쌀롱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에이즈에 대해 친숙하게 말하고, 정보를 서로 공유하기 위해 기획된 자리다. 에이즈 확산의 책임을 동성애자들의 문란한 성생활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회를 살다보니 게이바에서 에이즈를 말하는 것에 대해 거북해 할 수 있다. 사실을 인정한 꼴이라고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게이 감염인 사이에서 불만이 제기된 적도 있다. 키싱에이즈쌀롱이 아무리 좋은 기획으로 준비되었다고 하더라도 술집에서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냐고. 인권단체 사무실에서나 하지 왜 게이바에서 이런 행사를 하냐고 화가 났을 수 있다. 두려움이 컸을 거고 의심받기 싫었을 것이다. 키싱에이즈쌀롱에 대해 참석이라도 했다면, 또 그 자리에 있던 모습을 친구가 봤거나 "너 거기 왜 갔어?"라는 질문을 받을 때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게이바를 택했다. 변화를 바랐고, 에이즈에 대해 숨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말하며 부딪혀 보고자 했다. 누군가는 오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는 사람 볼까봐. 또 에이즈를 동성애자의 질병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인권을 흠집내는 혐오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응해야 하지만, 게이 커뮤니티가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데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에이즈에 대해서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게이 감염인들이 HIV 확진이후 친구를 잃을까 걱정하고, 애인을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외로워한다. "쟤가 오늘 (키싱에이즈쌀롱에) 왜 왔지?"라는 의심보다 "그곳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더 궁금해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게이바에서 에이즈를 말해야 하는 건 감염 사실을 말하더라도 친구를 잃지 않고, 애인 사귀는 것이 어렵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게이바는 커뮤니티 그 자체이자, 커뮤니티가 서로 교차하는 곳이다.

달콤하고, 짭짤하고, 맵다.

키싱에이즈쌀롱 다섯 번째 시간에는 감염인, 비감염인 게이 커플의 연애고민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PLFM' 단짠매 라디오'가 프로그램 이름이다. 단짠매는 달콤한 사연, 짭짤한 사랑, 매운 섹스의 줄임말이다. 사연은 달콤할 수 있지만, 둘 사이의 섹스는 맛부터 다를 거라는 생각, 사연을 받기도 전에 어느 정도 예상한 스토리가 있었나보다. 사연을 읽을 주는 라디오 컨셉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한 이유는 여전히 '드러내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둘이 함께 출연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기엔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다. 키싱에이즈쌀롱을 함께 준비하는 이들 중에서도 비감염인-감염인 커플이 있고, 사연으로 소개할 만한 연애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었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문제는 달랐다. 나 역시 긴 시간 감염인을 만나고 상담도 하고 있지만 '연애'에 대한 상담은 손에 꼽을 정도다.

많은 사연이 접수되지는 않았다. 5개의 사연이 도착했는데, 접수된 사연이 적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연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남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과 소리(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 '알')가 라디오 DJ를 맡고 사연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이야기손님으로 광서(러브포원)와 명진(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이 함께했다. 라디오하면 음악이 빠질 수 없지 않은가. 게이바에 비치된 좋은 음향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였다. 참여자들에게 추천음악도 받고, DJ가 선곡한 음악도 있었다.

사연을 읽기 전에 질문 하나. 감염인과 비감염인이 서로 연애하고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혹시 비감염인이 HIV에 감염될까 걱정이 되는지 궁금하다. 다큐멘터리 <종로의기적> 출연 이후 극장상영을 한 적이 있는데, 영화 속에서 비감염인과 감염인 게이가 서로 연애하는 것을 보고 가장 많이 접했던 반응은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관계는 '대단함'으로 포장되었고 때론 죽음을 곧 앞둔 사람을 보살피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더러 "괜찮냐"고 질문하는 이들도 있었다. 문란한 항문성교를 하는 게이만 상상하다 영화 속 내 모습은 '사랑' 앞에서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특별한 게이였던 것이다. 감염인 파트너는 사랑의 주체로 등장하지 않았다. 대단하고, 특별하고, 때론 괜찮냐는 질문을 받는 이는 모두 비감염인이었다. 감염인은 애인에게도 감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섹스도 조심해야 하고, 다쳐도 조심해야 하고, 같이 면도기를 써도 안 되는 그런 존재로만 남았다. 절반은 맞다. 우선 비감염인, 감염인 게이가 연애하는 현실이 그렇다.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 이가 더 조심하게 되고, 바이러스 수치가 미검출 상태임을 확인했어도 '혹시나' 하는 가정을 무리하게 가져간다. HIV라는 바이러스가 자신의 몸에 들어왔을 때, 또 그것을 확인했을 때의 절망감을 상대가 느끼지 않길 바라기 때문에 '조심스러움'이 지나칠 정도로 과할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로 연애하고 사랑하고 섹스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관계라고 말하곤 한다. 또 절반은 틀리다. 에이즈에 걸렸다고 바로 죽음을 맞이하는 시대는 지났다. 하루 한 알 간편하게 복용하면 치료가 끝날 정도로 에이즈 치료제는 '완치'를 향해 발전해가고 있다. 기대수명도 비감염인과 비슷해졌고, 3-4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건강도 체크하고 있으니 죽음은 이제 옛말이 됐다. 나 역시 <종로의 기적>에 함께 출연했던 감염인 애인과 아가페적인 사랑을 나눈 적이 없다. 그래서 대단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하지만 감염인을 바라보는 차별적인 시선은 여전하다. 게이 커뮤니티도 비껴 설 수 없다. 불치병, 희귀난치성질환으로 규정된 에이즈는 치료제 개발 속도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죽음의 전염병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감염인의 섹스는 타인에게 '죽음'을 전파할 수 있는 그 무엇이고, 처벌받아 마땅한 행위가 된다. 그래서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19조에 규정된 전파매개행위 금지 조항을 어기면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 감염인과 비감염인과의 연애를 대단하고 특별하게 여기는 건 바로 감염인의 섹스를 '문제'로 규정하고 있는 사회적 시선과 제도 때문이다. 감염인이 누릴 수 있는 사랑을 제한하면서, 성관계로 인해 감염될 수 있다는 질병의 공포가 심해지고 있다 보니 감염인은 연애를 하면서도 조심스럽다. 바이러스 수치가 미검출 일 때 콘돔없이 섹스를 해도 상대를 감염시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지만, 오히려 사랑 앞에서 이 같은 정보가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 같다. HIV 감염은 여전히 아프고, 외롭기도 하며, 세상의 큰 벽과 싸워야 하는 현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는 비감염인 애인이 있는 감염인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연을 소개할 수는 없지만 비감염인, 감염인 커플 사이에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해보면 좋겠다.

첫 번째 사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비감염인 애인이 있는 감염인입니다. 감염 사실은 오라퀵 검사를 통해 처음 알게 됐어요. 그다음 보건소검사를 받고 확진판정을 받았지요. 아마 지금 애인만나기전에 번개 했을 때 감염된 게 아닌가싶어요.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일도 계속 해야 하는데... 이리저리 알아보고 나서는 애인한테 사실대로 말했어요. 오라퀵 검사 결과를 받고 바로 얘기했죠.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더라고요. 그런데 양상판정을 받고난 다음엔 솔직히 어떻게 해야 될지 갈피를 못 잡았어요. 그냥 마지막으로 얼굴 보는 셈 치고 덤덤하게 얘기하기로 했어요. 정리는 해야겠는데, 많이 힘들어서 올해 말까지만 만나달라고 얘기했어요. 그냥 마음 둘 곳만 있게 해달라고 말이죠. 애인은 나한테 술 먹었냐고 말하면서 그냥 자라고 하더라고요. 무뚝뚝한 인간.

애인은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해요. 내가 불쌍하대요, 착하게 산 거 같은 애가 이렇게 된 게 믿기질 안는대요. 우린 만난 지 일 년 조금 넘었어요. 그런데 감염사실을 알린 이후 한 달 동안 섹스를 안 하고 있어요.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애인은 자주 전화하고 위로해줘요. 솔직히 헤어질 마음의 준비는 안됐어요. 그래도 올해까지는 곁에 있어주면 좋겠어요. 휴가를 같이 가기로 해서 예약도 마쳤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섹스하는 게 두려운지 성적인 관계는 아예 없어요. 성관계에 대해서 노력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아직은 잘 지내고 있어요. 이기적인 마음일지 모르지만, 좋은 사람이라서 저는 그 사람을 계속 만나고 싶은데 그게 될지 모르겠네요. 그 사람 역시 절 좋아하고 아껴요. 하지만 현실적으론 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전 지금 30대 후반인데, 더 늙기 전에 좋은 사람만나라고 맘에 없는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이 사연을 접하고 나서 가장 먼저 '착한 애가 왜 걸렸을까' 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사연을 읽어준 DJ 역시 착한 삶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졌다. 착한 삶이 곧 문란하지 않은 삶과 같은 의미로 생각했을 수도 있고, 감염사실을 막 확인했을 때 오게 되는 절망과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게 도움을 주는 말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또 사연처럼 감염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애인과의 이별을 먼저 염두해 두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은 옷이라 생각하고, 섹스를 하지 않아도 감염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핑계삼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두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관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이야기손님들은 우선 사연을 보내준 분이 힘이 없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 상대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둘 사이의 관계가 더 어그러질 수 있음을 우려하며 좀 더 건강한 방식으로 자기의 지금 상황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참여자 중에 한 분은 이런 말로 응원했다. "기본적으로 감염인분이 죄의식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죄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대응이 나오는 거고, 연인인데... 제가 감염인이라고 할지라도 섹스 안 해주면 난 섹스 좋아하는데 왜 안 해 줘?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불안한 사람들이 버스는 어떻게 타고 다니고 자가용은 어떻게 타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감염인분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죄의식을 갖지 말고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고. 그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면 차버리라고. 그리고 새로 구하라고"

두 번째 사연입니다. 저는 HIV감염인이에요. 비감염인 애인이 있었고요. 사귀기 시작한 이후에도 애인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불편했어요. 못 받아들인대도 어쩔 수 없고 헤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얘기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애인은 이미 애인 친구가 내 감염사실을 말해서 알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절망스러웠어요. 내 애인과의 사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관여하는구나 싶었죠.

문제는 다음부터였어요. 내가 약 먹는 걸 확인한 뒤부터는 건강관리에 대한 여러 간섭들이 시작됐어요. 때론 그 간섭이 과하다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이런 감정을 애인에게 말했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 부분에 대해 더 이상 간섭 안했으면 좋겠다고 말이에요. 애인도 받아들이는 듯 했어요. 하지만 그 이후 서로 감정이 이전 같지는 않아진 것 같아요. 어느 순간 sexless 커플이 자연스럽게 된 것 같고요. 애인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같이 있으면서 스킨십도 없어지고 당연히 섹스도 안하게 됐네요.

비감염인을 만날 때 감염인의 섹스는 더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감염사실을 알고 난 뒤에 서로 더 조심하게 되다가 결국은 sexless가 되고 저절로 멀어지게 된 것 같아요. 지금은 헤어졌네요.

첫 번째 사연처럼 섹스리스 커플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아웃팅 문제가 등장한다. "누가 에이즈래" 하는 말. 비난하는 뉘앙스가 아니더라도 당사자에게 치명적인 결과로 다가갈 수 있고 이는 게이커뮤니티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야기손님으로 참여한 광서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비감염인들은 그 고통에 대해 어림짐작을 잘 못하시더라고요 그냥 그거예요 직장에 내가 게이라는 걸 들켰는데, 그것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시면 될 것 같아요. 저도 비감염인 애인에게 감염인이란 사실을 고백했는데, (고백하기 전까지) 헤어지면 어떡하지? 소문나면 어떡하지? 걱정이란 걱정은 다 했는데 웬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 사실은 이미 나의 감염사실이 이미 누군가에게 퍼지고 있다는 거고, 그 때 가지는 감염인들의 심정은 아마 엄청난 비참하고 절망감을 느끼는 심정일 거예요" 만약 누군가의 HIV감염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자. 연애하는데 조심하라고 충고를 해야 할까. 아니면 조용히 있어야 할까. 우리가 정체성을 말할 때 본인이 동의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때로 더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음을 익히 알고 있다. 에이즈와 같은 경우 커뮤니티에서 좀 더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다. 사랑은 주위의 충고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지랖을 떨 필요도 없다. 결국 둘이 해결해나갈 문제지, 그것을 충고랍시고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사연을 보내주신 분은 '건강관리'에 대한 간섭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자상한 애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지나치면 관계에 있어 역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비슷한 경험을 한 분의 증언도 있었다. " 약 먹었는지 매시간 체크를 해주는 거예요 몇 시에 약을 먹어라. 비타민 챙겨 먹어라 제가 보기에는 그냥 약 챙겨주는구나 했는데 그렇게 여기지 않더라고요. 내가 알아서 먹을 수 있고 손이 발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알아서 챙겨먹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그렇게까지 챙김을 받아야 되는 사람인가 상기시켜주는 상황이 되더라고요. 상대방이 물론 좋은 의도로 그랬겠지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적당함이라는 기준은 없다. 지나치다는 기준도 상대적이다. 누군가는 무관심한 행동에 서운할 수도 있다. 다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너처럼 가슴에 보이지 않는 레드리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기 시작했어"

이 자리를 빌어 전 남친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요.

"우리가 사귀던 중에 네가 HIV 양성 판정을 받았다고 말할 때 난 너무 당황스러웠어. 마치 내가 처음으로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 라고 고민했던 마음처럼 앞으로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됐지. 하지만 너는 감염되기 이전이나 판정을 받을 때나 똑같더라. 너의 밝은 두 눈망울, 깨물고 싶게 생긴 오똑한 콧날, 앵두도 체리도 아닌 것 같은 입술을 가진 네가 HIV 감염인이 되었다니 내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았어.

많이 당황스러웠겠지. 많이 힘들었겠지. 그렇잖아. 너도 몰랐던 사실을 갑자기 알게 되었고 당황스러운 와중에 네가 감염되었다는 것을 네가 사랑하는 파트너가 알게 됐는데. 얼마나 절망감이 들지 나는 감히 그 기분과 분위기를 상상할 수가 없어.

너의 감염사실을 알고 난 뒤 너는 나에게 해어지자고 말했어. 하지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고 답했지. 물론 나는 맹세를 어기고 다른 사람과 바람을 펴서 너와 헤어지게 됐지만. 너를 통해서 나는 거리에 수많은 성소수자들 가운데,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도 포함해서 이 사회에 너처럼 가슴에 보이지 않는 레드리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기 시작했어.

고마워. 난 내가 네 감염사실을 알려준 첫 번째 사람이라는 게 정말 고마워. 내가 너에게 말한 적이 있었지. 너는 커밍아웃을 두 번 해야 한다고. 성소수자로써 커밍아웃하는 건 너에게 쉬울 수도 있어. 하지만 두 번째 커밍아웃은 처음보다 더 고민을 해야 할 거야. 그건 아직 우리 사회에 에이즈 혐오가 넘실대고 있다는 증거니까. 말이 많이 길어졌네. 약 잘 챙겨먹고,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정말 복 받은 거야. 네가 그 사람의 시야를 틔워준 거니까.

잘 지내길 바란다. 나의 첫 번째 감염인 전 애인 ㅇㅇ아"

마지막 사연은 유일하게 비감염인이 보내 준 내용이었다. 취지에 가장 잘 맞는 달달한 사연이기도 했고,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감염인 애인을 통해 '보이지 않는 레드리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기 시작했다는 부분에서 뭉클한 감정마저 느끼게 해 주었다. 여기서는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상대가 이야기했을 때, 내가 지금 위로를 해야 하는지, 별거 아니라는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웃어야 하는지, 잘 몰라 고민이 많았다고 말한다. 오롯이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될 수 있겠지만 에이즈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에 무슨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말문이 막힌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커뮤니티에서 에이즈를 말하는 건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말하기 시작했다는 건 좋은 징조다. 상대가 믿을만 했다는 거니까. 무언가 해주고 싶은데 그 방법을 찾기 못한 것뿐 크게 문제될 건 없다. 그래서 사연을 보내준 분의 전 남친도 분명히 사연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연애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편지가 마음으로라도 잘 전달되었길 바래본다.

사연의 흔적들

마지막으로 사연으로 접수되지 않았지만 참석자 중에 한 분이 이런 글을 남겨주셨다. "깊은 관계로 발전할 무렵, 애인이 HIV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사실을 알기 전과 후. 우리의 연애는 달라졌지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평소처럼 '너 까불다 죽어~' 라고 농담했다가 문득, 당신이 '진짜 죽는다'는 생각에 서로 부둥껴 안고 엉엉 울었던 일. 농담 한마디도 조심스럽고 가려야 하는 음식이 생기고 병원 앞 데이트가 잦아지는 것과 같은 일상 속에서 계속해서 마주하는 '감염'이라는 현실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 결과로 따라온 애인의 중중 우울증은 자살 시도로 이어졌고, 결국 제가 도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지켜주기로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저버린 것 같아 죄책감 때문에 아직까지 힘이 드네요. 우리가 HIV에 대해서 좀 더 알았더라면. 그때 키싱에이즈쌀롱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많은 사연을 안고 산다. 연애와 사랑에 있어서 특히 더 그렇다. 감염인 분들을 만나면 흔히 듣는 말 중에 하나가 "감염인끼리 만나면 편하지"라는 말이다. 누군가 감염시킬 수 있는 존재로 남고 싶지 않고, 조심스러움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사실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피해'를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된다는 것이. 그래서 감염인, 비감염인 게이들의 연애는 어쩌면 특별하고 대단할지 모르겠다. 사연을 통해 여전히 많은 감염인이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사랑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 비감염인의 입장에서 상대의 커밍아웃을 어떤 표정과 태도로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하거나 고민하는 흔적들도 보였다. 쉽지 않다. 다만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고, 상대에게 솔직하기 위해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만약 당신이 HIV감염인(비감염인)을 만난다면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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