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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고양이의 가출

어느 날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더니 물 반 그릇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나는 얘가 어떤 모험을 겪고 왔는지 너무 궁금해서, 티거가 물을 다 마신 뒤 "이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나?"라며 긴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번은 베란다에 나갔다가 몇 집 건너 있는 한옥 지붕을 천천히 타고 올라가는 티거를 보았다. "티거야!" 불렀더니 녀석은 나를 쓱 돌아보고는 보란 듯이 지붕 꼭대기를 훌쩍 뛰어넘어 사라져버렸다. 왜인지 나는 그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밥과 물과 따뜻한 잠자리가 있는 집을 두고 모험을 찾아 유유히 기와지붕 너머 파란 하늘 쪽으로 사라지던 티거의 모습. 거기엔 경쾌한 박력 같은 게 있었다. 티거는 행복해 보였다.

  • 이옥선
  • 입력 2017.09.22 13:41
  • 수정 2017.09.22 13:44

첫째 고양이 하쿠는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 문이 열려 있어도 마치 투명 울타리가 있는 것처럼 나가질 못했다. 몇 걸음 겨우 나갔다가도 골목에서 바스락 소리만 들리면 혼비백산해서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첫째와 네 살 터울로 들인 둘째 고양이는 사정이 달랐다. 호랑이 줄무늬가 있어 이름이 '티거'인 이 녀석은 역시 겁이 많고 소심하긴 했어도 첫째와는 달리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쳤다. 어느 날 아침 티거는 방충망을 손수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에서 깨어 고양이 하나가 없고 창문이 열린 것을 발견한 나는 너무 놀라 눈물을 글썽이며 티거를 찾으러 다녔다. 몇 시간을 헤매다 오후에 집에 돌아와보니 녀석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첫째의 품에 안겨 자고 있었다. 발에는 흙먼지가 꼬질꼬질 묻은 채로.

여러 번의 가출 사고가 있었고, 그때마다 티거는 꼬박꼬박 돌아왔다. 나중엔 그냥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들락거리게 했다. 하루 종일 밖에서 놀더라도 결코 외박은 하지 않았다. 한번은 우리 집과 옆집 담벼락 사이 좁은 공간에 갇혀서 서럽게 우는 바람에 사다리를 놓고 구출 작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 어느 날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더니 물 반 그릇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나는 얘가 어떤 모험을 겪고 왔는지 너무 궁금해서, 티거가 물을 다 마신 뒤 "이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나?"라며 긴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어느 날 아침에는 일어나 침실 문을 열었더니 날개가 처참히 찢어진 잠자리가 놓여 있어 식겁하면서 '티거가 잠자리를 물어다 놓은 걸 보니 가을이 오는구나' 하고 기묘한 계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한번은 베란다에 나갔다가 몇 집 건너 있는 한옥 지붕을 천천히 타고 올라가는 티거를 보았다. "티거야!" 불렀더니 녀석은 나를 쓱 돌아보고는 보란 듯이 지붕 꼭대기를 훌쩍 뛰어넘어 사라져버렸다. 왜인지 나는 그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밥과 물과 따뜻한 잠자리가 있는 집을 두고 모험을 찾아 유유히 기와지붕 너머 파란 하늘 쪽으로 사라지던 티거의 모습. 거기엔 경쾌한 박력 같은 게 있었다. 티거는 행복해 보였다.

그 무렵 나는 티거의 행복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언젠가 녀석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 날이 올 수도 있었다. 그래도 티거는 더 행복하게 살다 간 것이리라. 모험의 즐거움을 아예 알지 못하기에 불행하지도 않을 첫째 고양이에 비해 티거는, 집 안에만 가둬놓는다면, 너무나 불행해질 터였다. 산책을 다닌 지 수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집에 돌아온 티거의 기색이 심상찮아서 몸을 살펴봤더니 세상에, 옆구리가 7센티미터쯤 찢어져 벌건 생살이 드러나 있었다. 한밤에 눈물을 철철 쏟으며 병원으로 데려가 봉합 수술을 시켜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거의 산책욕은 꺾이지 않았다. 창문 앞에서 숫제 통곡을 했다. 꿰맨 자리가 아물 때까지 핥지 말라고 옷을 입혀두었는데, 그 옷을 입은 채 방충망을 뜯으려 애쓰는 녀석을 보며 나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상처가 아물자 녀석은 기어이 또 나갔다.

그 후로 오랫동안 티거는 평화롭고 규칙적인 산책묘로 지냈다. 그러다 우리는 살던 데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티거는 화장실 창문을 열고 탈출했다. 그런데 이곳은 예전 집과 달리 저 혼자 돌아오기는 힘든 구조였다. 겨우 잡아다 들여놓자 티거는 몇 날 며칠을 울며 나와 기 싸움을 벌였는데 나는 결국 지고 말았다. 두고 온 고양이 애인이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종일 집에 있는 날이면 아침에 티거를 내보냈다가 저녁에 건물 앞에 돌아와 울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어느 날 친구와 집 앞 골목을 걷다가 통통한 길냥이 한 마리를 봤다.

"아유, 저 뚱냥이 좀 봐."

말을 내뱉고 보니 그게 내 고양이였다. 티거는 나를 보더니 예전의 그날처럼 몸을 돌려 휙 사라졌고 그날 밤 처음으로 외박을 했다. 그리고 이틀 밤 사흘 낮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또 눈물을 흘리며 온 동네를 찾으러 다녔다. 티거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래도 그게 더 티거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무너졌다. 생각처럼 담담할 수가 없었다. 날이 찬데 어디서 떨고 있는 걸까, 뭐라도 먹었을까, 이 동넨 길도 모를 텐데, 교통사고가 난 건 아닐까....... 티거는 마침내 돌아왔고, 나는 그동안 지옥을 경험했다. 그 후로 지금껏 나는 티거를 한 번도 내보내지 않았다. 모든 창문을 단단히 잠가버렸다. 통곡을 무시했다. 나는 내 고통을 감내할 자신이 없어서 티거의 행복을 봉쇄한 것이다. 그게 나란 인간의 진짜 크기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자 다행히 울음은 점점 잦아들었는데, 대신 살이 점점 차올라 티거는 뚱뚱보가 되었다. 몸줄을 묶어 동반 산책도 시도해보았으나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괴성을 질러 포기했다. 오늘 아침 티거는 창틀에 앉아 봄 햇살을 쬐면서 가만히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감금된 이 뚱뚱한 도시의 모험가에게 나는 물어보고 싶다. 나가서 뭐가 제일 즐거웠냐고. 보고 싶은 고양이가 있냐고. 지금 행복하냐고. 그러나 나는, 솔직한 답을 들을 자신이 없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힘 빼기의 기술〉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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