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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역지사지'는 굳이 진보가 아니더라도 공동체에서 보편적으로 강조하는 개념이다. 내가 당하지 않았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내 일처럼 느끼는 감수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필수덕목이라고 강조한다. 이재명 시장의 일갈에 시민들이 환호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한 편으로는 당해봐야만 안다는 정 반대의 주장 또한 대중의 환호를 받는다. 어떤 부류의 인간들은 애초부터 역지사지의 공감력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고통의 당사자와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역지사지'와 '너도 당해봐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한다.

  • 이선옥
  • 입력 2017.09.20 10:12
  • 수정 2017.09.20 10:20
ⓒryasick via Getty Images

아래 네 장면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나는 인권과 정의, 진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공유되는 이 익숙함에 대해 말하려 한다.

#1.

오는 9월 퇴임하는 이인복 대법관의 후임을 정해야 할 때다.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는 이제 출신의 다양성을 넘어 생각의 다양성이어야 한다. 중요한 건 누구와 부딪치며 살았느냐, 어떤 가치를 붙들고 싸웠느냐다. 대법원이 달라져야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나마 평평하게 만들 수 있다. 산업현장에서 아들 잃은 어머니, 아버지 잃은 아들딸의 눈물을 닦아줄 저스티스(대법관)를 고대한다.

[권석천의 시시각각. 민법에 갇힌 대법원. 권석천 논설위원. 중앙일보. 2016. 6. 28]

#2.

우선 이들 판사들의 친구 중 노동자, 특히 노조활동을 하는 노동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런 친구가 한 명도 없으니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스산하고 노조활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피부에 와 닿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판사가 맘 편히 가는 동창모임이나 교회모임 등에서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기업가 아니면 관리자일 것이고, 이들 중 노조가 헌법상 보장된 단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이들 판사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성향의 판사들과만 어울릴 것이다. 해서 이들은 다른 판사들도 자신과 동일한 생각을 한다고 믿고 뿌듯해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한 판결을 비판하는 노동자들과 민변 변호사들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로 치부할 것이다.

[판사를 이해하는 방법. 강문대 변호사. 매일노동뉴스. 2016. 3. 14]

#3.

"오히려 모두가 슬퍼하느니 "산 사람이라도 살자"고 주장한다.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생각이 문제의 근인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고기, 가기 싫은 군대, 환경 오염된 미군기지..., 해결할 수 없다면 다 같이 겪어야 한다. 그래야 개선된다. 자기 집에 물난리가 날 때, 기름이 유출될 때, 자식이 군대에서 자살할 때, 세월호에 탔을 때'만' 권력은 움직이게 되어 있다. 불행하지만 이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다.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혹은 다수가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배제된 사람이 없는 사회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 피해를 공유하는 윤리. 정희진 여성학강사. 경향신문 2016. 05. 22]

#4.

2016년 9월. 대선 주자였던 이재명 성남시장이 기자회견 도중 세월호 노란 리본 좀 떼라. 지겹다, 고 말한 시민에게 화를 내며 한 말. "우리 어머님의 자식이 죽어도 그런 말 하실 겁니까?" "그거랑 그거랑 다르죠"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왜 다릅니까, 같은 사람입니다. 어머니 같은 사람이 나라 망치는 거에요.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그런 소리를 합니까. 본인의 자식이 그런 일을 당할 날이 있을 겁니다." 시민들은 이 동영상을 공유하며 사이다라 환호했다.

'역지사지'는 굳이 진보가 아니더라도 공동체에서 보편적으로 강조하는 개념이다. 내가 당하지 않았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내 일처럼 느끼는 감수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필수덕목이라고 강조한다. 이재명 시장의 일갈에 시민들이 환호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한 편으로는 당해봐야만 안다는 정 반대의 주장 또한 대중의 환호를 받는다. 어떤 부류의 인간들은 애초부터 역지사지의 공감력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고통의 당사자와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역지사지'와 '너도 당해봐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한다.

권력자들이 배제된 자와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만 문제를 빨리 해결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언뜻 공정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권력은 물난리가 날 집에 살지 않으며, 기름이 유출되는 환경에 접해 있지 않고, 방사능 오염고기와 환경 오염된 미군기지를 대면할 이유가 없다. 세월호를 타고 여행을 갈 일도, 자식을 군대에 보낼 일도 없다. 그래서 권력이다. 함께 살 수 없다면 모두가 고르게 무간지옥을 겪는 게 차라리 더 정의롭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게 '빠른' 혹은 '바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 맞는 권력은, 저와 제 가족이 겪지 않은 일이라도 공감하고 해결할 줄 아는 건 기본이요, 저와 제 가족이 겪은 일일 때조차 객관화하고 사회적인 해결책을 찾는 존재여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 자기 객관화를 위한 노력,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구성원들의 의지야말로 민주사회의 필수 덕목이다.

역지사지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개념은 약자와 고통 받는 이에 대한 특별한 공감력을 강요하는 데에 쓰면 힘이 떨어진다. 가치 지향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상력과 동정심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에 동의를 강요하는 주장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상대방에게 상상력과 동정심이 없다고 비난하는 데 머물기 쉬우며, 오히려 갈등의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 대한 대중들의 반격은 이를 잘 드러낸다.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탄압을 받는다고 할 때, 당신이 그 종교의 신자여도 그런 박해를 용인하겠느냐는 말은 효과가 없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역관계를 이해하고 약자인 동성애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말, 너의 아내나 딸이 성범죄의 희생양이 되어도 태연할 수 있겠느냐는 말, 세월호 사건에서 피해자의 끔찍한 죽음과 유가족의 고통에 공감하라고 요구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역지사지는 본래 보편적 관점을 획득하라는 촉구의 개념이다. 그런데 지금은 애초의 의미가 퇴색하고 동의할 수 없는 특별한 관점이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우리가 다시 복원해야 할 지점은 보편규범의 회복으로서 역지사지의 필요성이다.

종교전쟁에 반대했던 계몽주의자들은 종교의 자유에 동의하는가를 기준으로 삼았지 핍박 받는 종교 편에 서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핍박 받는 편에 서라는 호소는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가톨릭이 틀렸다는 신호만 줄 뿐이다. 이성애자에게는 타인(국가)이 나의 성적 지향과 다른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만을 강요할 때 이 규제에 동의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공통 범주는 '성적 자기결정권과 자율성'이라는 기준이다. 세월호 사건도 마찬가지. 우리는 이와 같은 사고가 일어났을 때 진상조사조차 하지 않고 넘어가는 일을 사회적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공통으로 인정할 수 있는 범주를 찾아내는 일, 그래서 보편의 규범을 회복하는 일이 역지사지를 제대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논리는 오늘 날 흔하게 쓰인다. 특히 진보진영에서는 진정한 사회정의를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개념으로 등장했다. 위 장면 1. 2에서 다루는 내용도 이것이다.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 그래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논리는 설득력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만일 판사들이 노동자 친구를 많이 사귄다면 사법부 안의 강자편향이 해결될 수 있을까?

친구를 사귀는 일은 사적인 영역이다. 누구와 어떻게 부딪히고 살 것인가는 어차피 개별 인간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르고 통제할 수도 없다. 내가 아는 훌륭한 법관들은 장면 1. 2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들은 그 글을 읽지 않아도 이미 그런 삶을 사는 분들이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백혈병과 특수질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산재소송 같은 경우, 노동자들은 증거조사를 하고 싶어도 이를 실시할 법적 수단이 없다. 해고무효 확인소송도 사용자측이 노동자에게 불리한 동료들의 증언이나 진술서를 받아내 소송의 근거로 쓰는 일이 다반사다. 부당노동행위를 고소하면 노동자가 사용자의 부당한 의사를 입증해야 한다.

이 시대에 사법의 영역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해결하려면 시스템 안에서 판사가 노동자를 만나도록 하는 일, 노동법원을 만든다거나, 외국의 사례처럼 분쟁의 당사자들이 시스템 안에서 공정한 만남을 가지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불공정하고 부당한 기울어짐에 대해 노동자에게 증거조사를 할 수 있는 법적 도구를 주거나, 사용자의 지배영역에 있는 증거의 신빙성을 부정해 인정하지 않거나, 모든 증거와 자료를 확보하고 통제권을 가진 사용자가 부당노동행위의 의사가 없었음을 입증할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사법부답게 바로잡는 행위다.

중동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가 중동이 되어야 하고,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모두 장애인이 되어야 할까? 여성 살인이 해결되려면 더 많은 사람이 사건의 당사자가 되도록 여성을 죽이는 방식이 해결책이 될 수 있나? 당연히 그럴 수 없다.

겪어봐야 안다거나, 겪은 사람과 관계를 맺어본 사람일수록 사안을 정의롭게 판단하는 데 우월하다는 생각은,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상상력과 공감의 한계 안에, 정의의 원칙과 해결의 범위를 협소하게 가두게 된다. 서로 다른 가치관에 기반한 당위의 주장은 보편의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근대 민주주의 사회는 '같음'이 아닌 '다름'을 기준으로 설계되었다. 고도로 복잡하고 모든 사람이 지인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실상 대부분이 타인인 사회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길은 무엇일까?

모든 사안에서 자신의 이타심과 동정심,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력,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이 가능할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이 우리를 보호해 줄 수는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들이 구성한 사회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작동하는 원리, 그것이 결국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역지사지란 바로 그 '보편적 관점'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요 촉구다.

* 이 글은 필자의 홈페이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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