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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에 던져진 아이들

저는 저를 향한 수많은 악성댓글을 접하면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댓글을 쓴 사람 중 다수는 제가 불쾌감을 느끼고 제 가족들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저를 좀더 불행하게 만들기 위한 단어와 표현에 열중한다는 걸 느꼈죠. 그래서 저는 이게 단지 디지털 세대의 문제라고 보기도 힘들고, 그들이 공감하지 못해서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아니라 주장을 관철하는 방식입니다.

[장하나의 엄마정치] ⑬ 혐오에 던져진 아이들

지금은 엄마아빠가 모든 것을 챙겨줄 수 있다지만 두리가 이 세상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성장하고 홀로 설 수 있을까 늘 염려된다. 뒷모습만 봐도 애잔해지는 순간순간이 많다. 지난 5월 휴양림에서 엄마 등에 업힌 두리. 두리 아빠 사진가 점좀빼

국회의원 임기 중에 온갖 혐오표현과 사이버 폭력에 시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제 의정활동이 탐탁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상에서 저를 '○○년'이라든가 '종북좌빨'이라고 불렀고, '쳐 죽이겠다'거나 '입을 찢어 버리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죠. 제가 느끼는 모욕감과 불쾌감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댓글을 하나하나 읽고 계실 친정엄마를 생각하면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의원실은 매일 새로운 일에 착수할 정도로 늘 바빴기에 악성댓글에 대응할 여력은 전혀 없었죠.

'혐오표현금지법' 입법운동

임기가 끝난 뒤에는 '장하나'에 대한 사이버 폭력을 당할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요새는 단지 '애엄마'라는 이유로 '맘충'이라 불릴 뿐이죠. 의원 시절 제 의정활동은 순전히 제 선택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누군가는 지지를, 다른 누군가는 비난을 보낼 수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지만, 맘충이라 불리는 건 납득도 적응도 안 되네요.

오스트리아, 독일, 벨기에, 프랑스, 핀란드, 그리스, 헝가리, 체코, 덴마크, 영국, 포르투갈, 스웨덴, 폴란드, 브라질, 캐나다, 우루과이, 뉴질랜드, 러시아, 터키 등 여러 나라에서 이미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하는엄마들'은 '혐오표현금지법'을 만들기 위한 입법운동을 시작했는데요. 아이에게 가난을 물려주는 건 별로 두렵지 않지만, 폭력적인 세상을 이대로 전해주는 것은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거든요.

혐오표현 등 언어폭력, 사이버 폭력뿐 아니라 학교폭력, 청소년 강력범죄가 점점 더 잔인한 모습으로 우리 일상을 잠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3월 인천에서는 17살 청소년이 8살 어린이를 살해하고 시체를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5월에는 충남 아산시, 7월에는 서울과 강원 강릉시, 이달 1일에는 부산 사상구에서 무자비한 청소년 집단폭력 범죄가 발생했죠. 이 사건들을 이렇게 건조한 단어로 나열하는 것조차 괴롭습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모두 누군가의 딸이라는 사실은, 딸아이의 엄마인 제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죠.

이미 정치권은 재빠르게 소년법 폐지 또는 개정 논의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요. 우리 사회가 정의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죄질에 따른 적절한 형량을 법으로 정하고 집행해야겠죠. 그러나 저는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진 이유가 미성년자에 대한 가벼운 처벌 때문이라는 점에 동의되진 않더군요. 그런 방식으로는 세상이 변하진 않을 것이란 확신이 오히려 강해질 뿐.

커뮤니케이션 이론 중에 '머레이비언의 법칙'이란 게 있는데요. 첫인상을 결정하는 데 자세·복장·몸짓 등 시각적 요소가 미치는 영향이 55%, 말투·음색과 같은 청각적 요소의 영향이 38%, 언어 즉 말의 내용은 단지 7%밖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론입니다. 대화와 소통은 사실 말보다는 93%의 비언어적 요소로 이뤄진다는 놀라운 주장이죠.

머레이비언의 법칙을 전제로 보면, 인터넷 메신저로 소통하는 것에 더 익숙한 디지털 세대의 커뮤니케이션에는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표정 없는 활자에 의존하다 보니 말의 의도는 점차 중요하지 않게 되고, 상대의 감정과 의도를 읽는 능력은 떨어지고, 주고받는 말이 아닌 각자 내뱉는 말들이 대화가 되는 거고, 그러다 보니 공감능력이 퇴화한다는 거죠. 그래서 상대방의 고통에 점점 둔감해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사람들로부터 스마트폰과 와이파이를 빼앗을 수도 없고, 사람들에게 문자메시지 대신 전화 통화를 하거나 가급적이면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라고 시킬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요. 저는 저를 향한 수많은 악성댓글을 접하면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댓글을 쓴 사람 중 다수는 제가 불쾌감을 느끼고 제 가족들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저를 좀더 불행하게 만들기 위한 단어와 표현에 열중한다는 걸 느꼈죠. 그래서 저는 이게 단지 디지털 세대의 문제라고 보기도 힘들고, 그들이 공감하지 못해서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최근 한 초등학교 교사가 온라인상에서 자신이 페미니스트이며, 페미니즘 교육을 실천한 사실을 밝힌 뒤에 온·오프라인에서 허위 비방과 인신공격에 시달리고 있는데요. 지난 5일에는 강동송파교육지원청 앞에서 학생인권조례'폐지'운동본부가 주관한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기자회견에 참가한 이들은 페미니즘 교육이 동성애와 남성혐오를 가르치기 때문에 해당 교사를 파면하고, 페미니스트 교사 동호회를 해체하고, 학생 전원에 대한 심리치료를 실시하라고 주장했는데요.

우리 아이들을 진짜 위협하는 것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아니라 주장을 관철하는 방식입니다. 해당 교사의 에스엔에스(SNS) 계정을 털어서 과거의 발언과 행적을 왜곡하고 유포하는 방식으로 사이버 폭력과 인격 살인을 서슴지 않고 있죠. 예컨대 해당 교사가 '한남충'이라는 남성비하 표현을 썼다고 알려졌지만, 실제 이 교사는 한남충이라는 내용이 담긴 트위터 글을 리트위트하면서 "한남충도 혐오표현이다"라는 본인의 의견을 남겼고, 교실에서도 혐오표현을 쓰지 말라는 교육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권교사는 하루아침에 '남혐 교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정치하는엄마들은 초등성평등연구회 선생님들을 직접 만났고, 페미니즘 교육과 페미니스트 교사를 지키기 위한 기자회견에도 함께했습니다. 내 아이를 지킨다는 마음으로 말이죠.

특정 세대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1997년 아이엠에프(IMF) 이후 한국은 한마디로 '양극화 사회'가 되었습니다. 부의 양극화, 노동의 양극화, 교육의 양극화, 기회의 양극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죠.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것은 팍팍한 오늘의 삶이 아닙니다. 변화의 가능성이 희박할 때, 나의 노력으로 나의 삶을 바꿀 수 없다고 여길 때, 즉 희망을 잃어버린 삶은 더디고 힘들고 지칠 수밖에요. 그래서 우린 모두 화가 난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공격적이 되고 쉽게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희망 없는 청춘이란 어떤 걸까요? 희망 없는 10대는 무얼 먹고 자라야 하나요? 차별과 폭력 밑에는 분노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가난과 범죄의 상관관계를 따지는 것은 고전적인 발상입니다. 가난의 문제에 더해서 한부모 가정이나 조손 가정과 같이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하는(못한다고 여겨지는) 경우나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주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적이라서 틀렸다는 게 아니라 한계에 부딪혔다는 거죠. 이제 가난하지 않아도, 부모의 관심을 충분히 받아도 가해자가 되고 범죄자가 됩니다. 거꾸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고 피해자가 되는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왜 먹고살 걱정이 없는 아이들까지 저렇게 화가 났을까? 무엇이 모든 아이들을 화나게 만들었을까?

저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놀권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가난하건, 부자건, 가족의 충분한 관심과 애정을 받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놀지 못한 아이들은 화가 나고 화병이 납니다. 체벌만이 아동학대가 아닙니다. 저는 조기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놀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동학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눈으로 보면 한국은 아동학대국가이고 한국 아이들은 모두 학대받고 있습니다. 미세먼지, 지엠오(GMO) 라면, 살충제 계란, 일회용 기저귀, 전자파보다 더 아이들을 위협하는 것은 '놀지 못하게 하는 어른들'입니다.

처벌을 안 해서 벌어진 일들이 아니기에 처벌을 통해 바로잡을 수는 없습니다. 용서한다고 세상이 바뀌지도 않습니다. 5년 뒤에는 제 딸도 초등학교에 가겠죠. 가난한 내 딸 두리가 '거지'라고 놀림받는 게 저는 싫습니다. 두리가 누군가를 놀리는 건 더 싫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오늘도 정치를 합니다. 충분히 놀 시간과 안전하게 놀 장소를 제공하는 교육, 친구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혁명을 위해 정치하는엄마들이 싸웁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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