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수능 절대평가와 사냥개 죽이기

제대로 된 고교학점제는 교실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내신의 입시변별력, 즉 내신의 줄 세우기 기능을 약화시킨다. 이렇게 되면 내신의 줄 세우기 기능에 크게 의존했던 학생부교과전형과 학생부종합전형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내신이 차지했던 공간을 다른 입시로 채워야 한다.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현실적으로 수능 이외엔 다른 대안이 없다. 수능의 줄 세우기 역할이 커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대학별고사의 역할이 커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저것 다 싫으면? 현재의 내신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고교학점제는 물거품이 되고 교실혁명은 물 건너가게 된다.

ⓒ뉴스1

수능 개편 시점이 1년 유예됐다. 수능 절대평가제에 대한 우려와 반발 때문이다. 1년 후 정부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수능 유죄

최근 몇년 수능시험의 위상이 급격히 추락했다. 절대평가제가 시행되면 더 추락할 것이다. 쌤통이란 생각이 든다. 수능의 폐해가 어디 한둘이던가. 교육의 법정이 존재한다면 수능은 유죄다. 몇년형을 언도해야 속이 시원할까?

수능을 위한 변명

그러나 우리는 수능 하나에만 죄를 물을 수는 없다. 다른 입시는 떳떳한가?

내신, 즉 학교시험은 무죄인가? 학생부교과전형과 학생부종합전형의 주요 요소인 내신은 적어도 다음 두가지 면에서 수능보다 죄가 무겁다. 첫째, 경쟁의 성격이 훨씬 더 비교육적이다. 내신은 경쟁의 대상자가 오로지 학교 친구들이다. 주된 경쟁자가 다른 학교 학생인 수능과 크게 다르다. 학생이 체감하는 고통이 훨씬 더 비인간적이다. 둘째, 주입식·암기식 저차원 학습을 유발하는 정도가 더 심하다. 단편적 암기지식을 묻는 문제가 수능에 비해 훨씬 많다. 수능 국어의 경우엔 암기지식을 묻는 문제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학생들이 국어공부를 암기식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수능이 아닌 학교시험 때문이다.

대학별고사는 어떤가? 대학별고사는 현재 논술고사(논술전형)와 구술면접(학생부종합전형) 등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본고사는 금지됐다. 대학별고사는 다음 두가지 면에서 수능보다 죄가 더 크다. 첫째, 사교육 유발 효과가 매우 크다. 1994~96학년도 입시에 존재했던 본고사가 폐지된 이유가 무엇인가? 사교육 때문이었다. 둘째, 특목고·자사고 등의 학교에 현저히 유리한 입시다. 이것은 최상위권 대학의 논술전형, 그리고 구술면접이 큰 역할을 하는 서울대 학종(일반전형) 등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학종의 비교과활동은 무죄인가? 비교과활동은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두가지 면에서 수능보다 죄가 무겁다. 첫째, 객관성과 공정성이 매우 부족하다. 무엇보다 거짓과 과장과 윤색과 뻔뻔함이 큰 힘을 발휘하는 입시다. 둘째, 학생은 물론 학부모와 교사에게 주는 부담이 매우 크다. 학종 전체가 아니라 학종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는 부담이 거의 전형 하나와 맞먹는다.

교육의 법정이 존재한다면 수능은 유죄다. 그러나 수능이 유죄라면 다른 입시들 또한 유죄여야 한다. 수능이 유죄라 해서 수능을 버리면 수능이 차지했던 공간으로 다른 입시가 밀고 들어온다. 이것은 필연이다. 입시의 세계에 진공은 존재할 수 없다. 수능이 유죄라 하더라도 수능을 섣불리 버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실혁명과 고교학점제

"교실혁명으로 교육혁명을 시작하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발표한 교육공약에 등장하는 말이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장소는 교실이다. 교실이 살아야 학교가 살고, 학교가 살아야 교육이 산다. 그런데 교실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재인 대통령이 방안을 제시했다. 고교학점제 공약이다. 고등학교의 경우 학점제만이 교실혁명을 이룰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에 교육혁명을 일으킬 단 하나의 공약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고교학점제다. 교육선진국에선 보편화된 제도라지만 우리나라에선 이렇게 놀라운 제도다.

그런데 고교학점제는 반드시 내신 절대평가제와 함께해야 한다. 제대로 된 온전한 형태의 내신 절대평가제를 토대로 해야 한다. 고교학점제의 시행에 있어서 내신 절대평가제는 볼링의 킹핀(kingpin)에 해당하는 것이다.

내신 절대평가제가 있어야 고교학점제에 필요한 다른 중요한 제도들을 쉽게 도입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교사별 평가제이다. 교사들로 하여금 개성과 창의력을 살린 수업을 할 수 있게 하려면 교사 개개인에게 평가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래야 수업의 질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수업이 존재하게 되어 학생의 교과 선택권이 실질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이원목적분류표, 평가규정 등 디테일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악마들도 내신 절대평가제가 있어야 쉽게 제거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내신 절대평가제가 있어야 학생의 과목 선택권이 힘을 발휘한다. 현재의 상대평가제에서는 학생에게 선택권이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렵다. 아무리 자신에게 필요한 과목이라도 내신경쟁에서 불리하면 피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상대평가제하에서의 학점제는 자칫 교실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 내신경쟁이 소수의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경쟁의 고통과 잔인성이 크게 증가한다.

고교학점제와 수능

제대로 된 고교학점제는 교실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내신의 입시변별력, 즉 내신의 줄 세우기 기능을 약화시킨다. 이렇게 되면 내신의 줄 세우기 기능에 크게 의존했던 학생부교과전형과 학생부종합전형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내신이 차지했던 공간을 다른 입시로 채워야 한다.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현실적으로 수능 이외엔 다른 대안이 없다. 수능의 줄 세우기 역할이 커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대학별고사의 역할이 커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저것 다 싫으면? 현재의 내신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고교학점제는 물거품이 되고 교실혁명은 물 건너가게 된다.

수능의 역할이 커져도 고교학점제가 성공할 수 있을까? 교실혁명의 과정을 낮은 단계, 높은 단계로 구분하면 낮은 단계에서는 수능의 역할이 커져도 고교학점제가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

첫째, 학생의 교과 선택권을 확대할 수 있다. 수능은 학생의 교과 선택을 폭넓게 인정하는 입시이다. 수능전형에선 영어와 수학을 전부 버려도 갈 수 있는 대학이 널려 있다. 대학을 버린 학생부터 서울대에 가려는 학생까지, 이들에게 똑같은 교육과정을 강요한 것은 수능이 아니다. 그것은 학교시험이고, 학교시험에 기반을 둔 학교교육과정이다. 둘째, 수업의 질이 향상될 수 있다. 학생들에게 주입식·암기식 학습을 강요하는 주범은 내신, 즉 학교시험이다. 획일적 저차원 수업을 만든 주범도 현재의 내신이다. 수능도 범인이지만 종범에 불과하다.

사냥개 죽이기

물론 교실혁명의 높은 단계에서는 수능이 질곡으로 작용할 것이다. 무엇보다 수능은 객관식 시험이란 한계가 뚜렷하다. 더 높은 발전을 위해선 현재의 수능을 폐기하거나 개선해야 한다. 아예 폐기해버릴까? 아니면 논술식 시험을 도입할까? 절대평가를 할까?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 형태의 수능과는 이별해야 한다. 수능을 토사구팽(兎死狗烹)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고교학점제가 충분히 뿌리를 내리고 교실혁명이 일정한 성공을 거둔 이후에나 할 일이다. 무엇보다 다른 대안을 마련한 이후에 할 일이다.

그러나 문재인정부는 교실혁명을 이룰 최선의 방안인 고교학점제에 대해선 아직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내년부터 시범적으로 실시할 계획이라지만 내신 절대평가제와 교사별 평가제가 없는 고교학점제는 고교학점제가 아니다. 교실혁명이 아닌 교실지옥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제도다.

수능 절대평가제는 수능의 입시기능을 약화시키는 제도다. 그러나 고교학점제의 시행과정에서 수능은 유용하게 활용해야 할 입시다. 그런데 정부는 제대로 된 고교학점제는 엄두도 못 내면서 수능의 입시기능부터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나의 눈엔 이것이 사냥은 시작도 못 해놓고 사냥개부터 죽이는 어리석은 일로만 보인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수능 #사회 #절대평가 #교육 #이기정 #고교학점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