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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 일을 잘 나가던 여성시인의 철없는 해프닝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나는 이 일을 한국의 비혼 중년여성들의 형편없이 열악한 삶의 질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오죽하면 천하의 최영미가 근로장려금 수급사실을 밝히고 월셋방을 전전하는 게 끔찍해 자신을 호텔홍보요원으로 '판매할' 생각까지 했을까 싶다. 그것은 한 부황기 든 여성시인의 헛소리가 아니다. 내겐 그 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헬조선의 최저점을 통과하고 있는 이 땅의 거의 모든 여성들이 타전하는 SOS 신호로 들린다.

저명한 여성시인(이라고 쓰고 그냥 '최영미'라고 읽자)이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모고급호텔에 홍보를 대가로 장기투숙을 제안했대서 항간이 소요스러운 모양이다.

다수 여론은 부정적인 것 같다. 그를 마치 노력 없이 공짜나 바라는 'OO녀' 수준으로 폄하하거나, 잘 봐줘서 물정 모르는 철부지쯤으로 치부하는 듯하다. 또 어떤 이는 가난 속에서도 성실한 밥벌이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다른 시인들과 비교해서 그를 질타하기도 한다. 긍정적인 여론이라야 시인으로서 가능한 상상력이라거나 역시 시인적 위트의 소산으로 '어여삐' 여겨주자는 정도인 것 같다.

하지만 긍정, 부정 어느 쪽이든 그의 이런 파격적 제안의 이면과 근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모습은 그리 찾아보기 힘들다. 최영미 시인은 얼마 전에도 월 50만원 남짓의 근로장려금 수급대상이 되었음을 밝혀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비록 한때는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시인이었으나 이제 그녀는 시인이라는 돈 안 되는 타이틀을 가진, 의식주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50대 중반 빈민 독신여성인 것이다.

나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최근 〈반지하 엘리스〉라는 시집을 낸 역시 싱글이자 엄마이기도 한 신현림 시인의 지지리도 힘겨웠던(아니 여전히 힘겨운) 삶이 떠올랐다. 나는 이 일을 잘 나가던 여성시인의 철없는 해프닝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나는 이 일을 한국의 비혼 중년여성들의 형편없이 열악한 삶의 질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둘 다 고학력의 전문성을 갖춘(최시인은 미술사 전공의 박사이고, 신시인은 사진 전공의 석사이다) 여러 권의 시집과 저술을 간행한 시인이자 문필가들이다. 과연 같은 수준의 남성 문인들에게도 이들과 같은 일종의 절대적 빈곤상태에 놓여있는 경우가 흔할까?

이들 말고도 나는 소셜네트워크를 통해서 빈곤선에서 허덕이는 수많은 비혼 여성문필가들의 삶을 많이 접한다. 이것은 최영미, 혹은 신현림만의 문제가 아니고 결국은 한계노동시장에서 생계선 아래 위를 부침할 수밖에 없는 고학력 비혼여성들의 기울어진 고용 운동장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문필업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문필가는 극소수이다. 그 중에서도 여성은 아마 공지영이나 신경숙 급을 제외하곤 전무할 것이다. 그래도 남성들이라면 학교건 출판사건 또 다른 대안적 선택지가 비교적 쉽게 다가온다. 하지만 여성들은 그조차 쉽지 않다. 제도권에 어떤 특별한 인맥이라도 갖지 않는 한 그들이 생계가 보장되는 일자리를 얻는 건 하늘의 별따기다.

이런 그들에게 성실하게 노동하지 않고 허황한 소리나 한다고 질타하는 것은 젠더적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폭력적인 것이다. 그들은 훌륭한 시인이자 전문가로서 합당한 사회적 역할을 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들에게 출판사 번역일이나 시키고 심지어 이를테면 곰인형 눈알붙이기 같은 수준의 막노동일 같은 거라도 하며 '성실하게' 먹고 살라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오죽하면 천하의 최영미가 근로장려금 수급사실을 밝히고 월셋방을 전전하는 게 끔찍해 자신을 호텔홍보요원으로 '판매할' 생각까지 했을까 싶다. 그것은 한 부황기 든 여성시인의 헛소리가 아니다. 내겐 그 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헬조선의 최저점을 통과하고 있는 이 땅의 거의 모든 여성들이 타전하는 SOS 신호로 들린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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