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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적 유산

다른 맥락은 제쳐두고라도 문학상이란 우선 수상하는 시인과 작가에게는 '명예'를 주는 일이다. 더욱이 그 문학상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붙인다면 그 명예에 힘입어 더욱 영예로울 수 있다는 보편적 신뢰나 합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미당 서정주는 과연 그 이름으로 상을 줘도 좋을 만큼 보편적으로 명예로운가? 아무도 선뜻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 이름으로 벌써 16회째 시상이 이루어졌고 황동규·정현종·최승호·김기택·문태준·김혜순·문인수·송찬호·김언·장석남·이영광·권혁웅·황병승·나희덕·최정례·김행숙 등 쟁쟁한 시인들이 역대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서정주 전집이 20권 분량으로 완간된 모양이다. 편집위원들과 출판사의 적잖았을 노고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서정주가 세상을 떠난 것이 2000년, 사후 17년 만에 완간됐으니 생각보다 늦은 감도 있다. 문학사적 중요성을 가진 인물일수록 당자의 전기적 행적이 어떠하든, 그로 인한 호오와 포폄이 어떻게 갈리든, 아니 그것이 격렬히 어긋날수록 그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더 깊이 진행돼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려면 그가 남긴 작품들과 기타 자료의 접근이 용이해야 하는데, 수록 자료와 편집 내용에서 신뢰할 만한 전집 간행의 필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생전 시집에 묶이지 않았다는 궁색한 이유로 서정주의 친일 시편들이 누락된 것은 옥에 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만한 전집이 간행됐다는 건 경하할 만하다.

서정주 문학은 곧 그의 삶이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서정주의 삶에 대해서는 호(好)보다는 오(惡)에 가깝고, 그의 문학에 대해서도 포(褒)보다는 폄(貶)에 더 가까운 편이다. 친일과 독재 찬양, 문학권력 남용으로 점철된 삶에 대해선 욕지기가 날 지경이고, 작품에 대해서도 넉넉히 잡아 1960년대까지의 작품만 '문학성'을 거론할 뿐 이후 작품들은 때이른 대가연한 거드름과 무성의한 남작(濫作)으로 인해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를 옹호하는 부류가 흔히 말하는 '문학과 삶을 분리해서 보자'는 변명은 따로 언급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서정주 타계 뒤 1년쯤 지나 어떤 글에서 나는 그를 '비단옷을 입은 노예'라고 부른 적이 있다. 여기서 '노예'가 서정주 삶의 실체라면 '비단옷'은 그의 문학에 해당된다. 그의 과찬받는 언어감각이란 말하자면 노예 같은 비굴한 삶을 숨기기 위해 그가 목숨 걸고 지어낸 비단옷인 것이다. 서정주의 삶은 곧 그의 문학이었고, 문학은 곧 그의 삶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삶, 그런 문학이야말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 전개가 낳은 하나의 기형적 유산으로 생각하며 바로 그런 점에서 그의 문학을 섣불리 신화화해서도, 타매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더 많이 연구·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서정주 전집 완간을 경하할 일이라고 하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서정주의 이름을 걸고 상을 주는 '문학상'은 전집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다른 맥락은 제쳐두고라도 문학상이란 우선 수상하는 시인과 작가에게는 '명예'를 주는 일이다. 더욱이 그 문학상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붙인다면 그 명예에 힘입어 더욱 영예로울 수 있다는 보편적 신뢰나 합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미당 서정주는 과연 그 이름으로 상을 줘도 좋을 만큼 보편적으로 명예로운가? 아무도 선뜻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 이름으로 벌써 16회째 시상이 이루어졌고 황동규·정현종·최승호·김기택·문태준·김혜순·문인수·송찬호·김언·장석남·이영광·권혁웅·황병승·나희덕·최정례·김행숙 등 쟁쟁한 시인들이 역대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상금 3천만원의 족쇄

가난한 시인들에게 이 상의 상금 3천만원은 적은 돈이 아니다. 나는 이 상을 차마 거부하지 못한 시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건, 이 상과 함께 받은 3천만원이 족쇄가되어 수상자들이 미당 서정주라는 하나의 '문학사적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거나 손쉽게 편안한 쪽으로 처리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나아가 혹시 처음엔 궁색한 자기변명이던 것이 점차 대담한 강변으로 바뀌지나 않을까 겁난다. 그로부터 시작해 미당으로 대표되는 한국 근현대사의 다른 상처와 난제에도 같은 태도가 어느결엔가 움직일 수 없는 관습이나 전통이 되지않을까 무섭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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