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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덕, 한승주가 안 보인다

절망한 북한의 핵 개발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행보와 유사하다. 전승국들이 패전국 독일을 재기불능 상태에 빠뜨리기 위해 과도한 전쟁배상금을 물리자 히틀러가 좌절한 독일 국민을 선동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북한이 전쟁 불사의 말폭탄을 쏟아내고 있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주민이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비공식 소득이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0%, 무역의존도는 50%를 넘는다. 한 가구당 허락된 텃밭도 2004년 100㎡에서 지금은 3300㎡로 확대됐다. 이쯤 되면 국가의 통제력에 시장의 힘이 밀리지 않는 형세가 아닐까.

  • 이하경
  • 입력 2017.08.29 10:28
  • 수정 2017.08.29 10:29
ⓒKim Hong-Ji / Reuters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 전 "내가 전쟁만은 막겠다고 말하면 대북제재나 국제 공조에 어긋난다고 하고, 외국 정상이 하면 좋은 말이 되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는 대통령의 기본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남북대화를 주도하겠다는데 왜 시비를 거느냐는 불만인 것이다.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능력이 있으면 우리 운명은 우리 주도로 헤쳐나가는 게 백번 맞다. 그러나 보수야당의 불신과 남남갈등이 계속되는 한 '한반도 운전석'에 앉는 일은 쉽지 않다. 미국·중국과 북한도 우리를 우습게 생각한다.

내부 갈등은 전쟁과 망국을 촉발하는 뇌관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중부유럽의 강국이었던 폴란드는 강대국인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에 세 차례에 걸쳐 영토가 찢겨나간 끝에 1795년부터 123년 동안 지도에서 사라졌다. 내부 분열이 문제였다. 보수파가 내부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러시아 군대를 끌어들이자 프로이센 군대가 들어와 의회를 포위하는 장면은 청일전쟁을 자초하고 일제의 노예가 된 구한말 치욕의 역사와 판박이다. 이걸 다시 되풀이할 순 없다.

이전 진보정부의 인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중앙정보부 국장 출신의 보수 인사 강인덕을 첫 통일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그는 집권 초부터 쌀 무상지원, 금강산 관광, 남북한 고위급 회담으로 드라이브를 걸어 남북 정상회담의 길을 열었다. 김대중은 평생 고난을 함께한 동지들을 요직에서 배제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구여권·보수인 김종필 국무총리, 김중권 비서실장, 이종찬 국정원장이 아니었으면 진보 대통령의 연착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반미주의자라고 공격받았던 노무현 대통령은 외무부 장관을 지낸 미국통 한승주를 첫 주미 대사로 임명했다. 그는 노무현이 미국에서 반미라고 공격받을 때마다 "정치적 기반이 친미적이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미국에 협조적인 정책을 펼치기가 더 낫다"라고 안심시켰다. 한승주 카드는 국내 보수를 안심시키는 효과도 컸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진용 인사에서는 야당과 보수세력을 포용하는 파격과 실용이 보이지 않는다.

한반도의 안보 상황은 대통령이 "전쟁만은 막겠다"고 외쳐야 할 정도로 위중하다. 안타까운 것은 1989년 독일 통일로 신호탄을 올린 냉전 해체의 지각변동에 우리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일이다. 한국이 90년 소련, 92년 중국과 수교할 때 고립감으로 불안했던 북한이 미국·일본과 수교하는 것을 도와 개혁·개방을 지원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핵 개발이라는 극단적 선택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은 북한의 핵 사찰 수용을 조건으로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시켰고,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끌어낼 정도로 큰 역량을 발휘했다. 절망한 북한의 핵 개발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행보와 유사하다. 전승국들이 패전국 독일을 재기불능 상태에 빠뜨리기 위해 과도한 전쟁배상금을 물리자 히틀러가 좌절한 독일 국민을 선동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북한이 전쟁 불사의 말폭탄을 쏟아내고 있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주민이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비공식 소득이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0%, 무역의존도는 50%를 넘는다. 한 가구당 허락된 텃밭도 2004년 100㎡에서 지금은 3300㎡로 확대됐다. 이쯤 되면 국가의 통제력에 시장의 힘이 밀리지 않는 형세가 아닐까.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은 저서 『외교의 시대』에서 리비아의 핵 개발 포기 과정에 주목했다. 석유 수출로 대외경제 의존도가 컸기 때문에 카다피가 제재로 인한 비용이 핵 개발로 인한 이득보다 커졌다고 판단해 2003년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바깥세계와 경제적 상호 의존의 네트워크 안에 깊이 엮이도록 해서 어느 순간에는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을 지키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리비아식 해법도 가능하다"고 했다.

지금 최우선 과제는 우리가 북한 핵 위협에 미국·중국과 함께 단호하고 강력한 제재로 맞서는 것이다. 물론 튼튼한 안보 태세도 필수다. 그래서 북한이 못 견디고 협상의 길로 나오게 해야 한다. 이때는 북한이 핵무기의 해체가 큰 이익이 된다는 인식을 갖도록 꾸준한 대화와 교류를 통해 시장 통합을 촉진해야 한다. 비핵화에만 집착하는 기존의 미국식 접근법으로는 한계가 있다. 북한을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 통합시키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포용이다.

이런 새롭고 창의적인 방법은 국내의 보수를 납득시키고 미국·중국을 설득해야 실행이 가능하다. 내 편이 아닌 또 다른 강인덕, 한승주를 기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주도로 전쟁을 막고 평화를 가져오려면 내부 통합이 절실하다. 그러려면 먼저 대통령이 달라져야 한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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