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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가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피폐하게 변하는지, 나는 똑똑히 목격했다. 기후변화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단지 우리가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지구 반대편에서 그 모든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파리기후협약 탈퇴는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나부터 돌아보자.

  • 임하영
  • 입력 2017.08.24 12:53
  • 수정 2017.08.31 13:46

케냐에 가다 3)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케냐에 도착한 지 어느덧 사흘째. 해는 어김없이 밝아왔고, 우리는 또다시 여정에 나섰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삼부루(Samburu)는 케냐의 47개 주 가운데 하나로, 나이로비에서 300km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삼부루 족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마사이 족과 형제지간. 삼부루와 마사이는 15세기 무렵까지 마(Maa)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부족이었으나 케냐 산(Mount Kenya)을 기준으로 한 무리는 북쪽에, 다른 무리는 남쪽에 정착하면서 서로 갈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름만 빼면 두 부족의 차이는 크지 않다. 아직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비슷한 옷을 입는다. 소, 양, 염소, 당나귀와 같은 가축들을 치며 생계를 이어간다는 점도 똑같다. 마사이 족이 많이 걷는 이유는 바로 목초지를 찾아 가축들에게 풀을 먹여야하기 때문. 그런데 가뭄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가까운 곳에선 녹음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멀리, 아주 멀리 떠나야만 가축들을 살릴 수 있다.

▲ 시필리와 무테이아이

경기도의 2배에 이르는 삼부루 주의 동쪽 끝에서 우리는 두 남자를 만났다. 시필리와 무테이아이. 절친한 친구 사이로, 여태 함께 가축을 치며 정답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가뭄으로 두 사람의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테이아이는 말했다. "저희는 원래 서쪽에 사는데, 목초지를 찾아 걷고 또 걷다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갈 데도 없어요. 조금만 동쪽으로 가면 보라나 족의 영토거든요."

▲ 몇 달 전 숨을 거둔 소. 이런 시체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두 사람에겐 원래 양 200마리, 염소 170마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염소 30마리, 양 10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정말 걱정이에요. 그래도 대학까지는 나왔으면 좋겠거든요. 저희처럼 가축을 치지 않고, 비가 오든 안 오든 걱정 없는 전문직에 종사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두 사람의 꿈은 요원하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가축은 전년대비 1/10로 줄었고, 설상가상으로 시장에 팔 수 있는 가격도 1/3로 떨어졌다.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상태가 형편없기 때문이란다. 반면 곡식 가격은 2배 이상 급등하고 있다.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하루에 한 끼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케냐 정부는 지난 2월 국가재난사태를 선포했다. "비가 왜 오지 않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네요." 회색 옷을 입은 시필리가 말했다.

▲ 바닥을 드러낸 조로-기로 강

두 사람은 우리를 조로-기로 강으로 인도했다. 강은 마르고 닳아 마치 사막처럼 변한 지 오래였다. 이 메마른 강바닥을 파고 또 파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물로 사람들과 가축들이 연명하고 있었다. 지금은 사람 3명이 들어가면 닿을 수 있는 깊이지만, 가뭄이 더 오래 지속된다면 5명이 들어갈 정도로 파야 물이 나올 거라고 했다.

▲ 위에 한 사람, 중간에 한 사람, 그리고 밑에 한 사람

강이 부족 간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보니, 종종 물을 차지하려는 분쟁이 일어난다. 3월에 한번 크게 싸움이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삼부루족 수백 명과 보라나족 수백 명의 맞대결이었다고 한다. 양 부족을 통틀어서 8명이나 목숨을 잃었다고. 한쪽이 도망가면 다른 쪽이 이기는 것인데, 여기서 승리하는 편이 상대방의 가축도 가져가고 물도 차지한다. 가혹한 현실이다.

가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피폐하게 변하는지, 나는 똑똑히 목격했다. 기후변화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단지 우리가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지구 반대편에서 그 모든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파리기후협약 탈퇴는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나부터 돌아보자. 나는 그동안 얼마나 인류를 생각하며 살아왔는가. 나의 일상이 다른 이들의 일상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가. 알면서도 그리 살아왔던가... 물을 긷는 할아버지에게 물어봤다. 왜 비가 오지 않는 것 같은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저 비가 오기를 바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죠."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월드비전 직원 조세핀과 가뭄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덧 연애와 결혼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조세핀은 삼부루에서 나고 자라 이곳의 제도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삼부루에서는 남자가 여자한테 소 7마리, 양 2마리를 내야 결혼할 수 있어. 지참금 중 양 한 마리는 신부 어머니 소유고 다른 한 마리는 아버지에게 돌아가지. 소도 부모님이 각각 한 마리씩. 그리고 나머지는 신부의 친척들이 나눠 가져." 그렇다면 남자가 가난할 경우 결혼을 못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니, 그럴 경우에는 친척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줘야 하지. 결혼을 못한다는 것은 마치 인생의 수치와도 같아. 삼부루에서 싱글은 사람 취급을 안 하거든. 죽었을 때도 가족들과 함께 묻히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어디 구석탱이에 시체가 버려져." 음, 모태솔로에게 너무도 가혹한 삼부루 족이다. "그렇게 결혼을 하면 이혼은 절대 불가능해. 그리고 남자는 바람을 피워도 되지만 여자는 절대 안 되지. 그리고 남자는 꼭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여자랑 결혼해야 해. 왜냐하면 여자가 나이가 더 많은 경우에는 남자의 말은 고분고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아이는 3~4명을 기본으로 낳고, 10명을 넘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어. 그래서 언제는 자기 자식만 90명인 남자를 본 적도 있다니까!"

▲ 월드비전 케냐의 조세핀과 로로주

한 대목 한 대목 어안이 벙벙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럼 주로 몇 살 때 결혼을 해요?" "여자는 대부분 고등학교를 마치면 결혼하고 남자는 전사로 복무하는 기간이 끝나면 결혼할 수 있어." 잠깐, 그런데 전사는 또 뭐지? 우리나라의 군대 같은 건가? "음... 전사는 다른 종족의 침략에 대비해 공동체를 지키는 역할을 해. 삼부루의 남자 아이들은 15살 무렵에 할례를 받는데 그때부터 전사로 복무해야 하지. 복무기간은 15년인데, 시작 시점이 딱 정해져 있어. 지난번은 2005년이었고 이번에는 2020년이야. 그러니까 2006~2019년에 태어난 남자 아이들은 다함께 2020년까지 전사로 복무한 뒤 한꺼번에 졸업식을 하는 거지. 사람에 따라서 전사로 복무한 기간은 천차만별이야."

▲ 삼부루의 흔한 전사

나는 생각했다. 전사로 복무하는 기간에는 결혼도 못 한다는데, 그럼 남자들이 전사 되기를 싫어할 것 같은데? 그런데 아니란다. 모두 전사가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공동체 안에서의 대우도 굉장히 좋다고 한다. 대신 몇 가지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고 했다. 첫째, 여자가 쳐다보는데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 둘째, 그리고 혼자 밥을 먹으면 안 되고 꼭 다른 전사들과 같이 먹어야 한다. 음, 이게 다인가? 실망이다. 하긴, 내가 본 전사들은 거들먹거리기만 하지 공동체에 기여하는 바가 별로 없어 보였다. 싸움을 한다고 하긴 하지만, 침략이 그리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전사 복무 기간이 끝났다 해도 일을 하는 남자는 거의 없다. 그늘에 앉아서 '마을의 미래'를 논의할 뿐. 결국 가사와 살림, 육아, 목축업 등 생계를 꾸려나가는데 필요한 거의 모든 일은 여자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조세핀에게 따져 물었다. "여기는 남자가 하는 일이 거의 없네요!" 조세핀은 별다른 감응 없이 미소를 지으며 "맞아, 그렇긴 해"라고 이야기했다.

마음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화가 나면서도, 이 동네에 마약이나 담배, 알코올이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의문이 들었다. 문화란 무엇일까? 전통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문명이란 과연 무엇일까? 과연 서구사회의 '침략' 내지 '개화'를 통해서만 인권의 가치가 전파될 수 있는 것일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갔다. 결국 한국에 돌아와서 답을 찾기로 하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덧, 동아프리카 기근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면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시길! wv.or.kr/eastaf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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