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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공약 파기 1호, 고교학점제?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마지막해인 2022년에야 외고·국제고·자사고가 일반고로 전환되어 첫 고1이 입학 가능하고, 그제서야 내신 절대평가제가 실시 가능하고, 그제서야 고교학점제가 실시 가능하다. 그런데 고1은 공통과목을 이수하므로 실질적으로는 이들이 고2가 되는 2023년(차기 대통령 2년차)에야 고교학점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듯 2022년에야 ①고교체계 정비 가능→ ②그제서야 내신 절대평가 도입 가능→ ③그제서야 고교학점제 도입 가능 이라는 논리적 흐름을 들여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이같은 논리적 흐름에는 두가지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 이범
  • 입력 2017.08.23 10:34
  • 수정 2017.08.24 15:20
ⓒ뉴스1

8월 10일 수능 개편안(1,2안)을 발표한 자리에서 교육부 담당자는 "고교학점제는 단기간 실행하기보다 내년도부터 연구학교를 지정해 시범적용 하고 2022년 고교학점제 도입에 필요한 제도개선을 거쳐 전면적으로 도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뉴시스 8월 10일자 [일문일답] 기사에서 인용) 이것은 사실상 공약 파기 선언이다. 2022년이면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이다. 그런데 2022년 고1부터 도입해도 사실상 다음해인 2023년에야 실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과정상 고등학교 1학년은 공통과목을 이수하게 되므로 실질적으로 고교학점제의 대상은 2,3학년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즉 문재인 대통령 임기 중에 일부 연구학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은 고교학점제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대선 공약이 잘못된 게 아닐까? 대선 캠프의 정책팀이 무능했거나 계산을 잘못 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만이 아니라 5대 후보 가운데 홍준표 후보를 제외한 4명이 거의 동일한 내용의 공약을 내놓았는데, 그렇다면 이들이 하나같이 비현실적인 공약을 제시한 것일까?

교육부의 입장은 ①고교체계 정비→ ②내신 절대평가 도입→ ③고교학점제 도입 이라는 논리적 순서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입장을 내 나름대로 풀어서 설명해 보자면 이렇다.

고교학점제를 시행하려면 내신 상대평가가 절대평가로 전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상대평가 하에서는 선택과목에 따른 유불리 편차가 심하여 학생들의 과목 선택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상대평가는 응시자 석차를 기준으로 '제로섬' 경쟁을 해야 하므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선호하는 과목은 나머지 학생에게 기피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물리나 경제 같은 과목은 영원히 기피과목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내신 절대평가를 하려고 보니 그랬다간 중3 학생들이 특목고·자사고로 더욱 쏠리게 생겼다. 상대평가 내신제도 하에서는 특목고·자사고의 경우 학력수준이 높은 학생들끼리 경쟁해야 하므로 내신성적상 불이익이 있는데, 절대평가로 전환되면 이러한 불이익이 사라져서 대입에 유리해진다. 이러면 중3 학생들의 특목고·자사고 지원경쟁률이 치솟을 것이다.

그러면 대선 공약대로 외고·국제고·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면 되지 않는가? 법적으로는 쉽다. 특목고·자사고와 관련된 모든 규정은 법률이 아니라 시행령(대통령령)에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 의결만 거치면 외고·국제고·자사고를 하루아침에 일반고로 전환할 수 있다. 이때 '일교 이제', 즉 한 학교에 두 체제가 공존하는 과도기를 2년간 거치게 된다. 이를테면 첫 해에는 2,3학년은 자사고인데 1학년은 일반고, 둘째 해에는 3학년은 자사고인데 1,2학년은 일반고... 이런 식으로.

문제는 정부가 5년에 한번씩 특목고·자사고에 대한 재지정 심사를 하며, 대부분의 특목고·자사고는 2014년과 2015년에 재지정 심사를 받아 향후 5년간 운영을 보장받았다는 점이다. 5년이 지나기 전에 일반고로 전환시키면 행정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정부가 패소할 수 있다. 그러니 외고·국제고·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은 2019-2020년에야 가능하다. 그런데 2020년 재지정 심사 시기에 맞추어 일반고로 전환 결정이 이루어져도 이 학교들이 2020년에 일반고로서 중3을 배정받지 못한다. 고입전형은 매년 3월에 공지한 내용대로 실시하게 되어있는데, 재지정 심사 시기는 3월 이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020년에는 여전히 외고·국제고·자사고로서 중3을 선발하고, 2021년에야 일반고로서 중3을 배정받아 이들이 다음해인 2022년에 고1로 입학한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이다.

정리해 보자.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마지막해인 2022년에야 외고·국제고·자사고가 일반고로 전환되어 첫 고1이 입학 가능하고, 그제서야 내신 절대평가제가 실시 가능하고, 그제서야 고교학점제가 실시 가능하다. 그런데 고1은 공통과목을 이수하므로 실질적으로는 이들이 고2가 되는 2023년(차기 대통령 2년차)에야 고교학점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듯 2022년에야 ①고교체계 정비 가능→ ②그제서야 내신 절대평가 도입 가능→ ③그제서야 고교학점제 도입 가능 이라는 논리적 흐름을 들여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이같은 논리적 흐름에는 두가지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교육부 논리의 첫 번째 문제는 '문이과를 없앤다'는 정책 목표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5명의 후보 가운데 4명이 고교학점제 또는 이와 유사한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년 고1부터 적용되는 새 교육과정(2015 개정교육과정)에 의하면 문이과가 없어지는데, 그러려면 고교학점제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새 교육과정의 핵심은 고1에 모든 학생이 통합사회·통합과학을 배우도록 하는 것, 그리고 2학년 이후에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수 과목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1에 통합사회·통합과학을 배우는 것은 문이과를 없애는 데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미 6차교육과정(대입 기준 1999~2004학년도)에서 고1에게 모두 공통사회·공통과학을 배우도록 한 전례도 있고, 어차피 문이과는 고2에 진입하면서 나눠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이과를 없애는 것의 핵심은 고1의 통합사회·통합과학이 아니라 고2,3 학생에게 과목 선택권을 주는 것, 즉 고교학점제이다. 교육부는 새 교육과정의 〈교육과정 총론〉에서 아예 "학교는 일정 규모 이상의 학생이 이 교육과정에 제시된 선택 과목의 개설을 요청할 경우 해당 과목을 개설해야 한다"(24쪽)고 명시하고 있다.

흔히 '선진국에는 문이과가 없다더라'는 이야기의 핵심이 바로 고교학점제이다. 유럽 대륙 국가들(독일·프랑스·스웨덴·핀란드 등)은 우리처럼 문과/이과 2개의 계열 중에 선택하지 않고 4~6개로 좀더 세분된 계열을 선택한 다음 각 계열별로 이수과목을 선택한다. 즉 '계열선택 후 과목선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천 신현고(자연이공/수리과학/인문사회/외국어 4개계열중 선택후 과목선택)와 아산 충남삼성고(공학/IT/자연과학/생명과학/국제인문/사회과학/경영경제/예술체육 8개과정중 선택후 과목선택)에서 시행중이다. 영미 계열 국가들(미국·영국·호주 등)은 계열 선택을 전혀 하지 않고 완전히 자유롭게 이수과목을 선택한다. 즉 '무계열 과목선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도봉고에서 시행중이다. 새 교육과정에 상응하는 고교학점제는 후자의 모델이다.

그런데 고교학점제가 포기되면 새 교육과정의 핵심이 포기되는 것이다. 고질적인 문과/이과 분리 반편성이 지속될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정책목표보다 후퇴하는 셈이다. 무엇보다 이 정책을 지지한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다. EBS가 대선 직전인 4월 29-30일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조사에서 고교학점제에 대한 찬성(63.8%)이 반대(27.2%)의 두 배를 훌쩍 넘긴 바 있다.

교육부 논리의 두 번째 문제는 특목고·자사고생이 받는 내신상 불이익을 유지하는 것이 '교육적 당위'라기보다 '정치적 당위'에 가깝다는 점이다.

내신 상대평가는 치명적인 단점들을 가지고 있다. ①학생의 객관적 성취수준을 보여주지 못하며(집단의 학력수준이 높든 낮든 무조건 일정 비율의 학생에게 1등급 또는 A를 부여하므로) ②교권의 핵심 중 하나인 평가권 침해이고 ③제로섬 무한경쟁을 강제하여 경쟁강도를 불합리하게 높이며(전국적 경쟁인 수능 상대평가보다 학교내 경쟁인 내신 상대평가의 체감 경쟁강도가 높다) ④협력적 인성의 형성을 방해하고(심지어 경쟁자의 학습을 방해하는 행위가 나타나기도 한다) ⑤선택과목에 따른 유불리가 극심하여 '다양한 교육'을 방해한다(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수한 학생들이 선호하는 물리, 경제, 중국어 등을 다른 학생들은 기피하게 되는 '선택의 왜곡'이 발생). 서구 선진국의 내신성적이 모두 절대평가(점수제 또는 등급제)인 것은 상대평가가 워낙 말이 안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일부 국가에서 얼핏 상대평가적 요소로 보이는 것들(평균성적 등)이 기재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참고사항 수준의 기능을 할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내신 상대평가를 하는가? ①변별력이 높아 선발 도구로서 유용하고 ②지역별·학교별 균형 선발에 도움이 되며(특목고·자사고가 불리함) ③절대평가를 도입하면 온정주의와 실적주의 때문에 '성적 부풀리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중 ③은 보완책이 있다. 교육부는 고등학교 내신 절대평가안(이른바 '성취평가제')을 처음 내놓은 2011년부터 줄곧 점수와 더불어 '평균'과 '표준편차'를 함께 기재하는 방안을 제시해 왔다. 나는 여기에 더하여 등급별 비율(이수자 중 A는 몇%, B는 몇%...)도 기재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성적 부풀리기는 충분히 제어될 수 있다. 대학 측에서 통계학적인 'Z점수'나 A의 비율 등을 활용하여 성적이 부풀려진 경우 성적을 하향 보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①변별력의 문제도 일정 수준 해결된다.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②일 것이다. 내신 절대평가가 도입되면 특목고·자사고 쏠림 현상이 심화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내신 절대평가로의 전환을 반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적 가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한다면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 내신 상대평가의 그 모든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특목고·자사고 학생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의 가치를 최우선시한다면, 그것이 과연 '교육적'으로 정당한 주장일까?

2018년 시행될 새 교육과정부터 고교학점제를 도입한다면 너무 촉박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실상 그리 다급하지 않다. 고1에는 공통과목을 이수하게 되므로 고교학점제의 실질적 시작은 이들이 2학년에 진입하는 2019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1년 반 가량 준비할 기간이 있다.

고교학점제를 거창하게 생각하면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고등학교 교과목은 의외로 광범위해서 심리학도 있고 과학사(史)도 있고 '영미 문학 읽기' 등등 별의별 과목이 다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국영수사과 주요 과목의 경우 '선택 보장'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국영수의 경우 공통과목 및 일반선택과목이 사실상 모든 학교에서 개설되고 있으니 별달리 추가할 것이 없고, 사회 일반선택 9과목 및 과학 일반선택 4과목에 물화생지2(새 교육과정에서 '진로선택'으로 분류)를 더한 8과목 정도를 '선택 보장'의 범위로 잡고 이 과목들에 대해서는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특히 일반고·자공고)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제나 물리2를 매학년(또는 매학기) 개설하고 이수희망자가 적으면 고2와 고3을 구분하지 않고 이수하도록 한다. 일부 과목에서 담당할 교사가 부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므로 이에 대비해서 순회교사, 강사, 거점학교(도시지역의 경우), 온라인학점취득 등을 겹겹이 배치하여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향후 '선택 보장'의 범위를 점진적으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교학점제에 대해서는 교사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해보니 반대가 찬성보다 조금 더 많은데(7월4일 교총 발표 여론조사 반대 47.4% 찬성 42.6%), 교사들이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대입에 유리한 교과목 위주로 쏠릴 우려'(반대자의 43.2%)였다. 그런데 이는 국영수를 이수단위의 절반 이하로 제한해 놓은 현행 규정만으로도 충분히 해결된다. 국영수 이수단위 제한을 '학교' 단위가 아니라 '학생 개인' 단위로 적용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국영수사과 영역별 최소이수단위가 국가 교육과정에 규정되어 있으므로, 지나친 편식을 막을 장치는 충분하다.

교사들이 반대한 두 번째 이유는 '교사·학교시설 등 부족'(반대자의 34.8%)이다. 그런데 공간 부족 및 교사 부족 문제는 상당 부분 저절로(?) 해결 가능하다. 때마침 고등학생 입학자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올해 고2인 2000년생이 63만명인데 고1인 2001년생이 55만명으로 감소했고, 중3인 2002년생이 49만명이다. 이후 계속 감소하여 현재 초6인 2005년생은 43만명까지로 감소한다. 지금 중학생 전후 구간이 바로 인구절벽 구간인 것이다. 이들이 고등학교로 진입함에 따라 고등학교 공간에 여유가 생긴다. 게다가 정부가 교사 증원 계획을 내놓고 있다. 공간과 교사의 부족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교사들이 반대한 세 번째 이유는 '학교간 격차 심화'(반대자의 13.6%)인데, 이것은 앞에 언급한 것처럼 순회교사, 강사, 거점학교, 온라인학점취득 등을 통해 국영수사과 주요과목 선택권을 '보편적으로 보장'하는 적극적 정책을 통해 해결 가능하다. 고교학점제를 '학교 여건에 따라 자율적으로' 도입하면 된다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고교별 편차가 심해져서 기회 균등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즉 고교학점제는 자율적/단계적/부분적으로 도입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도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교학점제를 '자율적으로'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도입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학종(학생부종합전형)에서 비교과 비중을 낮추고 교과 비중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학종 개편이 수능 개편보다 먼저다〉에서 언급했듯이, '교과'보다 '비교과'에서 부모의 영향력이 더 크게 드러난다. 그런데 학종(입학사정관제)의 원조인 미국의 경우, 역사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역사과목을 더 많이 이수하고 부차적으로 비교과를 활용한다. 여행에 관심이 많은 학생은 지리, 문화, 외국어 관련 과목을 더 많이 이수하고 지구온난화에 관심이 많은 학생은 경제, 윤리, 화학, 지구과학을 동시에 이수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교과가 획일적이므로 교과를 통해 본인의 관심이나 지향을 드러낼 수 없고 이를 모두 비교과로 입증해야 한다. 미국보다 오히려 비교과를 통한 입증 부담이 심한 것이다. 학종에서 비교과 비중을 낮추고 교과 비중을 높이는 데 고교학점제가 큰 도움이 된다.

교육처럼 기회균등이 중요한 분야에서는 자율이나 자치가 꼭 좋은 것이 아니다. 핵심적인 인권일수록 자율이나 자치에 맡겨놓지 않고 '국가' 수준에서 보장하고 제도화하는 것처럼, 과목선택권을 '보편적' 권리로 자리매김 하려면 일정한 '국가' 수준의 보장이 꼭 필요하다.

대안은 두가지이다. 1안은 강한 안이고 2안은 약한 안이다.

1안은 내년 고1에 도입되는 새 교육과정부터 내신 절대평가와 고교학점제를 동시에 시작하는 것이다. 특목고·자사고가 유리해진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외고·국제고·자사고가 일반고로 전환되는 2022년 전에는 이를 감수하는 것이다. 특목고·자사고 학생에 불이익을 주는 것이 '교육적 가치'는 아니므로.

2안은 내신 상대평가를 유지하더라도 고교학점제를 일부 연구학교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고교(특히 일반고·자공고)에서 '보편적으로' 실시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선택 보장' 개념을 국영수사과 주요과목에 적용하여, 이 과목들은 매학년(또는 매학기)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 일부 과목 교사가 모자라는 경우에는 순회교사, 강사, 거점학교(도시지역 학교의 경우), 온라인학점취득 등을 적절히 병행 활용하여 학생의 선택권을 소속 학교에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육부의 '연구학교부터 시범 도입' 입장은 고교학점제를 포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망쳐버릴' 우려가 있음을 경고한다. 교육부 관계자들은 내신 상대평가를 유지하면서 고교학점제를 연구학교에 시범도입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뉴시스 8월10일자 [일문일답] 기사) 그런데 이럴 경우 연구학교에 재앙이 닥친다. 내신성적을 이른바 '깔아주던' 하위권 학생이 이탈하여 나머지 학생들의 내신성적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고교학점제의 백미 중 하나는 수포자를 구출하는 것이다. 의무교육인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수포자를 예방하고 없애는 것이 중요한 목표이지만, 고등학교에서는 수포자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것이 당연하다. 서구 선진국의 경우 우리나라처럼 누구에게나 미적분을 배우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물론 이공계 진학 희망자에게는 우리나라 수학 못지않은 수준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고등학교때 미적분을 안 배우더라'는 속설은 잘못된 정보이다.) 하지만 본인의 적성과 진로에 따라 수학을 어느 정도까지 배울지를 여러 단계로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적어도 누구나 고3까지 누구나 수학을 이수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고교학점제가 시행되면 우리도 서구 선진국들처럼 수학을 필수이수단위(10단위)만 이수하고 더 이상 이수하지 않아도 된다.

내신 상대평가 하에서는 수포자들이 교실에서 잠을 자면서 수학 하위권을 점유해 줘야 나머지 학생들의 내신성적이 일정수준 이상으로 확보된다. 하지만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에서는 수포자들이 필수 이수단위만 이수하고 더 이상 수학을 이수하지 않게 될 것이다.(참고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2015년 5월 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 중 수포자 비율은 59.7%에 달한다.) 내신성적을 이른바 '깔아주던' 이들이 빠져나가면, 나머지 학생들의 내신성적은 평균적으로 하향되게 된다. 따라서 이 학교 학생들은 대입에 불리해진다. 수학보다는 덜할지라도 다른 교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진다.

현재 수시(학생부 전형) 비중이 높아진 상황이므로 내신성적의 불이익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미 서울의 구현고등학교가 학생들에게 교과목 선택권을 부여했다가 선택권을 상당 수준 회수해 버렸다. 내신성적의 불리함을 의식해 이러한 조처가 이뤄졌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바로 2016년에 벌어진 일이다.

내신 상대평가가 유지된다면 고교학점제 연구학교로 지정된 학교는 곧바로 기피학교가 될 것이다. 대입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 학교에 배정되면 전학과 자퇴가 속출할 가능성도 있다. 대입 실적에 민감한 서울 강남, 목동, 중계동, 대구 수성구, 부산 해운대구 등지에는 연구학교를 지정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고, 교육열이 낮은 지역에 국한하여 겨우겨우 지정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내신 절대평가로 전환하면 발생하지 않을 문제이다. 하지만 만약 내신 상대평가가 유지된다면 고교학점제는 더더욱 '연구학교부터 시범 도입'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도입'되어야 한다.

고교학점제는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핵심 교육공약이었다. 그런데 취임 100일이 갓 지난 지금 대선 공약 파기 1호가 될 조짐이 뚜렷이 보인다. 교육부 관료들은 뒷걸음치고, 김상곤 장관은 아무 발언을 하지 않으며, 전교조는 반대한다(7월 28일자 논평). 민주당에도 동력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이제 고교학점제를 회생시켜 명실상부한 '대선 공약'으로 복원할 수 있는 곳은 청와대뿐이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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