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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특정 성을 문란하다고 느끼는가 - 에이즈 혐오 뒤에 숨은 성적 보수성

섹스와 쾌락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고 문란함과 건전함을 나누며, 문란해보이는 존재들을 선별하고 배제하는 것은, 그들을 동등한 시민이자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따라서 민주의 본의에 어긋난다. 설혹 문란한 감염인이 있다 해도 그 또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주인의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이 민주의 속뜻에 부합한다.

'키싱 에이즈 쌀롱 _ STEP 4 깨물기' 후기

글 | 터울(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소식지팀장)

에이즈 혐오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반응을 의미할 것이다. 나는 에이즈가 싫다. 나는 에이즈 걸린 인간이 싫다. 내 곁의 인간이 에이즈라니 생각도 하기 싫다. 저자들은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나같은 사람이 부디 안심했으면 좋겠다. 수없이 딸려올 문장들 가운데, 아마도 에이즈 혐오에 관한 가장 지독한 문장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와 섹스한 인간이 에이즈라니, 정말로 상상도 하기 싫다.

에이즈의 원인인 HIV는 체액으로 감염되고, 주요 감염경로 중 하나가 성행위다. 에이즈 혐오의 가장 깊은 심연에는 성 문제가 자리해있다. 에이즈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은 비율로 성에 대한 특정한 태도와 낙인을 함께 드러낸다. 에이즈와 관련된 이야기가 질병에 대한 드라이한 정보들로 추스러지지 않는 이유다. 에이즈 혐오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성에 대해 조금 더 꺼내어 논쟁해야만 한다.

지난 3월부터 HIV/AIDS활동가네트워크 주최로 "키씽에이즈살롱"이라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나마 HIV/AIDS 감염인들이 스스로 얼굴을 내보이고, 감염인임을 커밍아웃한 채 청중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뜻깊은 자리가 그 후로 매달 이어지고 있다. 그 중 네 번째 시간의 주제는 다름아닌 "혐오"였다.

패널들은 각각 혐오세력들의 선동 전략(상훈,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상임활동가), 에이즈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갈홍식, 전 장애인언론 비마이너 기자), 게이커뮤니티가 에이즈를 바라보는 시선(터울,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소식지팀장), 이른바 '깨시민'들의 에이즈에 대한 관점(타리,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활동가), 위 네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아래의 글은 네 명의 패널들과 청중들이 나눈 이야기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1. "동성애=에이즈"?

퀴어문화축제에 오는 사람들에게, "동성애=에이즈"의 구호는 차라리 친숙하다. "동성애=에이즈"는 성소수자인권운동이 태동하던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이어져온 낙인이다. 이에 맞서, 당연히 모든 동성애자가 에이즈 감염인일 리가 없고, 콘돔을 쓰면 HIV 감염이 혁신적으로 줄어들며, 동성애자 또한 감염 예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난 세월 동안 활동가들은 열심히 외쳤다. 그 결과 에이즈가 마치 "동성애병"처럼 여겨지던 세간의 인식은 꽤 교정되었다. 혐오세력들의 저 문구는, 십몇 년 전에 하던 얘기를 그럼에도 또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십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변하지 않는 고통은 있다. HIV/AIDS 감염인의 삶이 그렇다. 가령, "동성애=에이즈"가 아니라고 한다면, 에이즈에 걸린 동성애자의 존재는 그럼 무어란 말인가? 게이커뮤니티에 쏟아지는 사회의 낙인에 대응하고 나니, 게이커뮤니티 안의 감염인들이 (동성애는 에이즈가 아니어야 하므로)마치 없는 취급을 당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들의 입장은 과연 무엇인가?

가령 퀴어퍼레이드에 간 HIV/AIDS 감염인의 심정은 어떨까. 실제로 퀴어퍼레이드에 등장한 "동성애=에이즈" 선전물들을 보고,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 감염인 당사자분들이 계셨다. 실제로 그것은 매우 야만적인 구호다. 그런데 그 앞에서 어떤 게이가 만약 "동성애는 절대 에이즈랑 관계없어!" 라고 외친다고 한다면, 그걸 보는 감염인은 또 어떤 생각이 들까. 에이즈랑 관계없는 게이들 사이에서, 감염인 당사자는 어떻게 자신을 가누어야 할까. HIV/AIDS의 문제를 '감염인'의 눈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시도가 중요한 까닭이다.

다시 "동성애=에이즈"로 돌아가보자. HIV 바이러스에 눈이 있어 동성애자만 골라 감염시킬 리는 없다. 그러나 HIV 감염 경로의 상당수가 MSM(남성과 섹스하는 남성)의 성관계이고, 그 MSM 중 적지 않은 수가 게이인 것은 슬프지만 사실이다. 그렇다면 "동성애=에이즈"는 일말의 진실을 내포하는가? 일견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선동은 일부분'만' 맞는 말을 차용한다는 점이다.

설령 그 말이 일정하게 사실을 반영한다 해도, "동성애자는 에이즈 환자"와 같은 선동은, "에이즈 환자 중에 왜 동성애자가 많을까", "왜 그들은 아직도 지독한 낙인에 시달리는가" 등, 그 뒤에 자연스레 따라붙을 이야기를 은폐한다. 그들의 선동에 따르면, 동성애와 에이즈는 필연적으로 망조어린 관계이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는 데 다른 이유가 필요치 않다. 그런 그들이 묻지 않는, 에이즈에 대한 정작 중요한 것들을 우리는 다시 캐물어야 한다.

2. 혐오세력들의 에이즈 혐오 선동과 청소년

혐오세력들이 자신들의 사이트와 댓글에서 에이즈에 떠드는 바는 대략 다음과 같다. 에이즈 환자는 문란하다. 동성애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들은 마약섹스도 즐긴다. 섹스에 미쳐 인생을 방기하다보니 자살률도 높다. 그런 그들을 치료하느라 국가가 에이즈 약값을 대준다. 약값이 만만치 않게 비싸다. 국고 낭비요 세금 낭비다. 그런 그들이 군대에 가서 남자랑 섹스하며 에이즈를 퍼뜨린다. 더구나 청소년들이 요새 동성애에 물들어 바텀알바를 하고 다니고, 그 와중에 에이즈가 감염된다. 자라나는 청소년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에이즈를 몰고 다니는 동성애자는 용납해서는 안된다.

위 진술에 대한 진실은 다음과 같다. 문란은 커녕 생애 첫 섹스가 HIV 감염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섹스를 자주 하지 않는 동성애자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마약섹스를 하는 게이가 없지는 않지만 그들 모두가 감염인인 것은 아니다. 방기는 커녕 동성애자들은 대개 섹스와 관련된 인생의 문제에 있어 이성애자들보다 한층 더 깊게 고민한다. 자살률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섹스에 미쳐서" 그렇다기보단 다른 사회적 이유들이 있다. 국가가 HIV 감염인에게 약값을 지원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 약값이 비싼 것도 맞지만, 약값은 제약회사가 매기는 것이지 감염인이 매기는 것이 아니다. 감염인 약값을 세금 낭비라 하기에 한국은 성소수자에게 배정하는 예산이 티끌만큼 부족하다. HIV 감염인은 징집 전, 혹은 징집 후 신체검사에서 감염 사실이 드러날 경우 '절대' 군대에 갈 수 없다. 게이 청소년들 일부가 바텀알바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성애를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이 HIV/AIDS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한마디로 사회로부터 에이즈를 고립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에이즈에 대해 더욱더 낙인을 더해 찍어누르고 아무쪼록 말살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HIV/AIDS에 대한 낙인이 높은 곳일수록 HIV/AIDS 확산률은 높게 나타난다. 감염 사실은 물론 검진조차도 마음편히 받기 힘든 사회적 분위기야말로 HIV/AIDS의 음성적 확산을 부추기는 기폭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대안은 번짓수를 대단히 잘못 짚은 것이다.

헌데 이 논리는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 있다. 바로 청소년 성교육이 그것이다. 청소년 성에 얽힌 여러 문제들을 대하는 국가·사회의 논리는 종종, 청소년 성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청소년에게 성에 대해 모쪼록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청소년은 콘돔에 대해서 몰라야 하고, 피임에 대해서 몰라야 하고, 성에 대해서 몰라야 하고, 성행위는 애초에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방침은 청소년 성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임과 동시에, 이 문제에 가장 나쁘게 개입하는 방식이 된다.

제도적으로 조장된 무지는 나쁘다. 당연히 청소년들도 성에 대해 두루 배우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얻은 지식들 가운데 자신의 입장을 스스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 때 일절 얘기 않았다가 성인이 됐다고 별다른 성윤리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HIV/AIDS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HIV/AIDS에 대해 되도록 모르게끔 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알아서 그 질병과 관계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도리어 그 질병과 가장 나쁜 방식으로 관계맺고 있는 셈이다.

3. 에이즈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

그럼 좀더 눈을 넓혀서, 혐오세력이 아닌 일반 언론들이 이 문제를 '혐오적으로' 바라보는 사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소나무재선충이라는 벌레가 있다. 소나무를 말려죽이는 벌레로, 언론은 이 벌레가 확산되는 것을 일컬어 "소나무에이즈 확산"이라고 헤드라인을 걸었다. HIV/AIDS 감염이 높은 확률로 사람을 말려죽이던 것은 1980년대 초중반의 이야기다. 설사 에이즈 감염으로 소나무처럼 말라가는 감염인이 있다 하더라도, HIV/AIDS와 전혀 상관없는 현상을 "소나무에이즈"라 부르는 것은 감염인 당사자의 인격권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다. 이는 언론이 저지르는 대표적인 에이즈 혐오의 형식으로, 질병을 경험하는 당사자를 조금도 떠올리지 않은 채 그 질병을 다른 좋지 못한 일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는 행태다.

또는 좀더 적극적인 형태도 있다. 모 일간지에 어느날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기사가 실린다. 성적으로 문란했던 그 감염인은 감염 사실을 깨달은 후,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잠복하였다. 그는 자신의 감염 사실을 숨긴 채 사람들과 여전히 문란한 성행위를 가졌다. 지금도 그는 우리 주위 어딘가에 있으면서, 그의 병을 퍼뜨릴 새로운 희생자를 물색 중이다. 언론의 핵심은 읽히는 것이므로, 언론에 선정적인 기사가 걸리는 것은 그것을 널리 읽히기 위함이다. 감염인 한 사람과 감염인 그룹을 통째 천인공노할 쓰레기로 만드는 일은 종종 그 읽히고 싶다는 욕망에 희생된다. 또는 그런 기사를 쓰는 데에 언론인 나름의 정의감도 있을 것이다. 성에 대해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가 신실하게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앞서 보았듯이, HIV/AIDS에 대한 낙인을 덧씌우고 덧씌우면 마침내 그것이 통제된 채 말살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셈이다.

끝으로 다음과 같은 접근도 가능하다. 에이즈 이슈가 이런저런 어려운 맥락이 있고 자칫하면 어느 쪽에게 욕먹기가 쉬우므로, 아예 다루기를 기피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문제에 대응할 때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기 쉽다. 골치아픈 것은 아예 언급을 마는 것이 상책이고,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책임을 면한 것이다. 그러나 특히 한국에서는, 그것이 남사스럽든 이야깃거리가 못된다고 생각하든, 성소수자나 HIV/AIDS 이슈를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형태 그 자체가 억압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것은 존재가 지워지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든 다루는 것은 필요하다. 단, HIV/AIDS 감염의 문제를 감염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인생사에 제대로 접근하는 기사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더불어 특정한 기념일이나 이벤트로서가 아니라, 감염인의 삶에 대한 일상적인 관심을 쏟는 기사,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기사들이 더 생산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감염인들이 실제로 체감하는 삶의 모습에 근접할 것이기 때문이다.

4. '깨시민'들의 에이즈에 대한 관점

그렇다면 이른바 '깨시민'이라 불리는, 소위 양식있는 시민들의 에이즈에 대한 인식은 어떨까.

현재 사회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동성애와 에이즈 관련 교양 상식은 대개 다음과 같다. 모든 동성애자가 에이즈 감염인은 아니며, 에이즈 감염 원리는 동성애 자체와는 무관하다. 동성애자를 보고 곧바로 에이즈 환자 등 '병자'를 떠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보통의 동성애자들은 대개 건강하고 평범하며, 그들 역시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범시민들이다.

위의 진술은 일견 매끈하고 바람직해보인다. 특히 앞에서 본 혐오세력들의 희한한 구호들에 비하면, 위의 문장들은 너무나 신사적으로 보이며, 사회의 여론을 그 구호들에서 이런 신사적인 교양으로 옮겨놓는 것 또한 중요한 과업일 수 있다. 그러나 감염

인 당사자의 눈으로 봤을 때, 이러한 교양 상식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물어올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럼 건강하지 않은, 실제로 아픈 성소수자들은? 그들이 "건강하고 평범"하지 않고,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없다면, 그들은 시민이자 인간일 수 없는 것인가?

그 질문에 도장을 찍을 만한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문란한 성'에 대한 낙인이다. 건강하고 평범한 시민들은, 대개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된다. 동성애자 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에이즈 감염인이 성적으로 문란했다면, 그건 어쨌든 자신의 문란함으로 인한 응분의 댓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기서 동성애자 에이즈 감염인에게 당차게 손뻗었던 "시민"으로서의 연대는 끊어진다. 시민인 나와 문란한 저 사람은 왠지 한 그룹일 수가 없다. 이런 사고는 의외로 뿌리깊은 계보를 지닌다. HIV 발견 이전에도, 국가와 사회가 어떤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자체를 질병으로, 비정상적인 것으로 낙인찍어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좀처럼 성적 쾌락과 민주시민의 권리를 엮어서 생각하지 못한다. 성은 왠지 협소한 주제 같고, 특정한 성에 일정한 낙인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정치적 의제가 아니고 민주의 원리와도 별반 관련이 없는 것만 같다. 그러나 섹스와 쾌락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고 문란함과 건전함을 나누며, 문란해보이는 존재들을 선별하고 배제하는 것은, 그들을 동등한 시민이자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따라서 민주의 본의에 어긋난다. 설혹 문란한 감염인이 있다 해도 그 또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주인의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이 민주의 속뜻에 부합한다.

국가가 개인의 성을 통제하고 그것으로 그 개인의 권리를 달리 부여했던 시도에 맞선 성해방의 움직임들이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68혁명이 그것이고, 한국에서는 1990년대에 유사한 흐름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 역사는 비교적 짧은 편이고, 아직도 성적 자유는 어떤 종류의 공포와 쉽게 연결되며, 쾌락에 대해 사회적으로 긍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짙게 남아있다.

성적으로 보수적인 사회 여론이 실제로 어떤 사람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 체감되기 위해서는, 섹스와 쾌락이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지금보다 좀더 많이 논의되는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 다양한 성정체성과 성행위가 포함된 성교육은 필수적이다. 실제로 HIV/AIDS 감염 경로로 모자감염이 많은 아프리카의 경우, HIV/AIDS 관련 교육을 계기로 여성의 콘돔 선택력, 협상력이 중요한 이슈로 자리잡았고, 대만의 경우 시민사회와 여성계에서 했던 성교육들이 동성결혼 법제화를 이끌어낸 토양이 되기도 했다. 각자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성에는 이처럼 성을 비롯한 다른 정치적인 것들이 엮여있음을, 우리가 '진보'를 말할 때 한번쯤 되짚어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5. 게이커뮤니티가 에이즈를 바라보는 시선

끝으로 에이즈 관련 게이커뮤니티의 시선은 어떨까. 많은 동성애자 감염인들이 살붙일 법한 곳이 게이커뮤니티이지만, 슬프게도 게이커뮤니티 내의 에이즈 낙인은 일반 사회보다 오히려 정도가 심한 편이다. 아래에서는 그 양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몇몇 게이 사이트들의 문의글과 댓글을 통해 본 게이커뮤니티의 에이즈 낙인은, 마치 일반 사회의 에이즈에 대한 시선과 성에 대한 시선을 증폭시켜놓은 모양새다. 가령 에이즈가 몸을 함부로 굴린 댓가라는 식의 시선은 게이커뮤니티 안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더불어 커뮤니티 내에서 감염인과 성적으로 얽힐 가능성에 대한 신경증적인 거부감이 한층 도드라지는데, 이에 따라 감염인을 '감별'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문의글들이 올라오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글 첫머리에 썼던 가장 지독한 문장을 옮겨오고자 한다. "나와 섹스한 인간이 에이즈라니, 정말로 상상도 하기 싫다."

내지는 게이커뮤니티의 맥락 안에서 생성되는 혐오의 양상도 있다. 특정 성행위에 대한 낙인, 즉 항문섹스에 대한 공포가 그것인데, 에이즈가 항문섹스로 걸린다던데 그럼 오럴섹스는 괜찮느냐는 질문글이 많이 보인다. 더불어 항문섹스를 하더라도 바텀이 더 걸리기 쉽지 않느냐는 질문 등, 이른바 한층 더 남자답지 못한 "성향"에 대한 낙인도 HIV/AIDS 공포와 연결된다. 이는 급기야 변도 정액도 애초에 더러운 것이므로, 그런 성행위를 하다 에이즈가 생기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며, 따라서 에이즈가 자연발생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까지 치닫는다. 실제로 비감염인 게이들끼리 섹스를 했는데 에이즈가 걸릴 수 있느냐는 질문이 다수 엿보인다. 물론 의학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염려이지만, 사실과 다른 이런 공포들은 곧 커뮤니티 내에서 감염인들에게 실질적인 억압으로 작동한다.

왜 이런 혐오들이 발생할까. 먼저 게이와 항문섹스에 대한 일반 사회의 혐오를 게이 스스로 받아안고 그것을 그대로 반복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게이의 특정 성행위가 더럽다는 내부 혐오는 아직도 게이커뮤니티 일부에서 뿌리깊은 편이다. 또는 게이커뮤니티라는 것이 강제적인 이성애로부터 도망온 결과, 당사자에게는 그래도 여기서만큼은 자신의 성적 지향에 맞는, 상대적으로 유토피아적인 섹스 실천을 하는 공간이 되기 때문에 거꾸로 섹스에 대한 혐오가 촉발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렇게 도망온 이 곳에서만큼은 내 섹스에 불순물이 없으면 좋겠고, 무언가 불운한 것이 없으면 좋겠다는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내 섹스에 어떤 타자도 없었으면 좋겠는 마음이야말로, 일반 사회가 게이커뮤니티에 쏟아놓은 사회적 낙인의 변주다.

가령, 에이즈가 두려운 게이라면 콘돔을 써서 그것을 예방하면 된다. 그러나 어떤 날은 그런 것들이 잘 챙겨지지 않는다. 어떤 날은 다름아닌 콘돔이 내 섹스의 불순물이 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성적 지향 때문에 불행했던 나는, 오늘만큼은 그다지 안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콘돔은 중요한 HIV 예방 도구지만, 이처럼 "콘돔을 쓰라"는 말은 성소수자에게 때때로 무력하다. 성소수자의 건강은 그런 도구와 지침으로만 지켜지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성소수자의 건강은 그가 겪는 사회적 낙인의 정도와 반드시 함께 사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HIV/AIDS 감염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한국에는 실제로 자신이 감염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추정되는 감염인의 숫자가 제법 높다. 그것은 언론에서 가끔 떠드는 대로 그들이 앙심을 품고 남에게 에이즈를 옮기려 그런 것이 아니라, HIV/AIDS 검진 자체에 심리적, 사회적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감염인을 실제로 더 많이 죽게 하는 것은 카포시 육종 등으로 알려진 에이즈 합병증이 아니라, 다름아닌 자살이다. 사회적 낙인이 웬만큼 높지 않고서는 사람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만큼 HIV/AIDS에 대한 사회의 낙인과 게이커뮤니티의 낙인은 심각한 상태다.

감염인에 대한 이러한 낙인은 교정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성적 낙인이 재고되어야 한다. 실제로 치료약을 주기적으로 복용하는 HIV/AIDS 감염인의 경우, 체액 속 HIV의 농도가 현저히 낮아져 사실상 감염가능성이 0으로 수렴한다. 그러나 이런 의학적 상식을 상회하는 것이 사회적 낙인임은 앞에서 줄곧 보았다. 문란한 성, 더러운 성, 에이즈에 걸리기 쉬운 성에 대한 낙인이 지워지지 않고서는, 앞으로 더 나은 HIV 억제제가 만들어진다 한들, 감염인들이 감각하는 사회적 처우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게이커뮤니티 안에서 "내 주변인이 감염인인데 문제없이 섹스하고 다니더라"라고 말할 수 있고, 감염인 스스로 "나 섹스 많이 해서 HIV 걸렸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감염인들이 보다 성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고, 타자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건강한 섹스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처럼 사람의 성적 권리란, 때로 인권이란 말로 대접해야 할 만큼 사람의 목숨을 다투는 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와 섹스한 인간이 에이즈라니, 정말로 상상도 하기 싫다"고 말하는 세상이 나에게 가망없을 것이라고, 쓸쓸히 제 목숨을 거둔 적지 않은 감염인들을 떠올려본다면 말이다.

퀴어퍼레이드의 혐오세력들이 즐겨 내거는 "항문 섹스도 인권이냐"는 말은, 역설적으로 참으로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다. 항문 섹스야말로 인권이다. 그것은 특정 성행위를 하거나 특정한 질병에 감염돼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권이 유보되어서는 안된다는 선언과 같다. 마찬가지로 같은 장소의 부스행사장에서 욕을 먹은 "똥꼬팬티", "보지쿠키" 또한 괜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앞에서 본 성에 얽힌 수많은 편견과 낙인과 오해를 생각했을 때, 이 자리의 똥꼬팬티와 보지쿠키는 최소한 그것들보단 훨씬 더 섹슈얼리티에 대해 제대로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성에 대해 부디 제대로 논쟁하는 것, 그것은 HIV/AIDS 감염인의 인권과 성적 권리를 위한 중요한 출발점임과 동시에, 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억압이 거미줄처럼 드리워진 이 사회를 위해서도 간절히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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