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성소수자인 내가 MBC 제작 중단을 지지하는 이유

성소수자 인권을 다룬 PD수첩 방영분과 MBC의 현주소를 번갈아 보며 저는 공정방송 사수가 소수자 인권 보장의 첫 걸음이자 필수 요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제작 자율성 침해 사례로 거론된 내용 중 하나를 살펴보니 "촛불집회에는 민주노총, 성소수자 등의 단어를 넣어 특정 집단이 주도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리포트 내용 수정"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는 한편 성소수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부추김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려는 강력한 외압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글 | 오승재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전국언론노조 MBC본부가 20일 서울 여의도 율촌빌딩 앞에서 김장겸 MBC사장 및 고영주 이사장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늘(11일) 오전, MBC 보도국 취재기자 80여 명이 제작 중단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전 PD수첩 제작진과 카메라 기자들의 제작 중단 소식을 들었는데, 'MBC 구성원들이 방송 정상화를 위해 연이어 큰 결단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사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MBC 정상화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의 입맛에 맞춰 찍어내듯 뉴스를 생산해내면서 정작 언론으로서의 '직언'은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MBC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시청률과 뉴스 신뢰도, 지난해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목격한 MBC 취재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와 야유는 이러한 사실을 뼈아프게 보여주었습니다. '마봉춘'으로 불리던 예전의 MBC와 같은 위치로 돌아오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MBC 정상화에 대한 희망을 다시금 가지게 된 것은 올해 5월 말 즈음입니다. 그 무렵 저는 한 명의 성소수자로서 육군의 성소수자 군인 색출 수사와 대선 후보들의 무분별한 성소수자 혐오 발언으로 인해 심각한 내적 상처를 입은 상태였습니다. 이어진 일부 언론의 무분별한 억측, 혐오성 보도는 저를 비롯한 많은 성소수자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습니다. 평등을 곡해하고 차별을 공언하는 보도가 범람하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성소수자 당사자는 말 그대로 고통의 순간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연히 MBC PD수첩에서 성소수자 인권을 주제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처음 소식을 듣자마자 저는 '정말 MBC가 맞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는 '혐오 방송으로 짜깁기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만큼 저는 MBC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날선 조롱과 비난이 언론을 통해 확장되는 시기, 성소수자에게 있어 MBC는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언론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송 당일 걱정을 가득 품은 채 MBC로 채널을 설정하고 PD수첩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품고 있던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육군의 성소수자 색출 사건과 군형법 92조6의 문제점, HIV/AIDS에 대한 혐오와 낙인, 차별금지법 제정의 현주소, 다양한 이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의 호소까지. 그동안 성소수자가 목쉬도록 외쳐왔던 간절한 말들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당 방영분 제작을 맡은 이영백 PD가 MBC 정상화를 위한 파업에 참가한 후 복귀했다가 노동인권 탄압 실태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비제작부서로 부당하게 전보당했다는 사실과, 대법원의 '부당전보' 판결을 받아 PD수첩으로 원직 복직한 이후 첫 복귀작 주제로 성소수자 인권을 택했다는 사실은 방송 이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을 알고 나서 무작정 의심만 했던 제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MBC를 외면하는 상황에서도 오로지 공정방송 사수를 위해 여러 갈래의 길 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잊은 채, 무작정 망가진 MBC를 조롱하기 바빴던 지난 날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성소수자 인권을 다룬 PD수첩 방영분과 MBC의 현주소를 번갈아 보며 저는 공정방송 사수가 소수자 인권 보장의 첫 걸음이자 필수 요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제작 자율성 침해 사례로 거론된 내용 중 하나를 살펴보니 "촛불집회에는 민주노총, 성소수자 등의 단어를 넣어 특정 집단이 주도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리포트 내용 수정"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는 한편 성소수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부추김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려는 강력한 외압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공정방송이 부재한 사회에서 열악한 소수자 인권 상황에 대한 건설적인 논의를 기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언론이 성소수자를 비롯한 장애인, 이주민, 여성에 대한 왜곡된 정보와 논조로 구성된 보도를 제공하여 사회적 혐오를 부추긴다면 이들은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MBC 노동자들의 제작 중단을 힘껏 지지합니다. 정부를 비롯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삶을 조명하고 드러내는 작업은 공정방송, 언론자유의 토대에서만 비로소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년간 끈질기게 이어진 방송장악 야욕 속에서도 방송 노동자들은 정론직필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아왔습니다. 성소수자들도 지난 수년간, 혹은 그 이상의 시간동안 불의와 불평등에 맞서 싸우며 평등 세상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아 왔습니다. 자본과 권력, 혐오와 차별에 저항하며 두 주체 모두가 끈질기게 지금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는 곁에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서로가 서로의 동료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맞닿은 길, 서로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힘차게 앞으로 전진하여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얻기를 바랍니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MBC #피디수첩 #방송 #사회 #문화 #성소수자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