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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림돌'

100미터 남짓한 이 아담한 거리에 유태인을 추모하는 황동판이 무려 36개나 심어져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이 아름답고 평온한 거리가 아우슈비츠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일상에 불현듯 틈입한 역사에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매일 집 앞에서 아우슈비츠를 만나야 하는 독일인의 심정이 궁금해 한 중년 여성에게 걸림돌이 주는 심리적 부담감에 대해 물었다.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부담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와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 마르크그라프 알브레히트가 8번지에 살았고,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유태인을 숨겨줬던 가수이자 배우 에르네스티나 갈라르도(1912~1982)를 추모하며". 이번 여름 독일 베를린에 묵었던 집의 현관 복도에 놓인 작은 액자에 담긴 글귀다.

역사학자 이동기 교수가 알려준 독일의 새로운 '기억문화'는 충격적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자 바로 문 앞에 손바닥만한 크기의 황동판 세 개가 눈에 잡혔다. "이 집에 1943년 5월19일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송되어 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 게르트루트 카우프만(1887년생)이 살았다." "이 집에 1943년 3월3일 이송되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 율리우스 바어(1899년생)가 살았다." "이 집에 1943년 3월3일 이송되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 에르네스티네 바어(1895년생)가 살았다."

추모액자와 황동판은 하나의 서사를 전하고 있었다. 마르크그라프 알브레히트가 8번지에서만 세 명의 유태인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고, 한 명의 의인이 목숨을 걸고 유태인을 숨겨줬던 것이다.

마르크그라프 알브레히트가는 베를린의 번화가인 쿠어퓌어스텐담과 맞닿아 있는 중산층 거주지역이다. 100미터 남짓한 이 아담한 거리에 유태인을 추모하는 황동판이 무려 36개나 심어져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이 아름답고 평온한 거리가 아우슈비츠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일상에 불현듯 틈입한 역사에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거리에 황동판을 심는 일을 시작한 이는 군터 뎀니히라는 예술가다. 그의 목적은 "번호로 불리며 살해당한 희생자들이 자유인으로 살았던 마지막 거처에 그들의 '이름'을 되돌려놓는" 것이다. 가로, 세로, 높이 10센티미터의 돌 위에 황동판을 붙여놓은 이 작은 추모석을 그는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이라고 명명했다. 우리말로는 '걸림돌'이다. 아직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는 사람은 없다. 땅을 파고 박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은 독일인도 없으리라. 그들의 끔직한 과거를 매일 마주쳐야 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허리를 굽히고 앉아 '걸림돌'을 보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름답지 않아요? 이렇게 과거를 불러내는 것이. 더욱이 희생자의 과거를 잊지 않고 매일같이 만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에요."

홀로코스트의 비극적 과거를 떠올리는 일을 그녀는 '아름답다'고 했다. 생뚱맞다 싶었지만, 한편으론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헤겔은 아름다움이란 "감각적으로 표현된 이념"이라고 했다. 이 조그마한 돌덩이가 우리의 눈과 가슴에 닿아 인류 평화와 인간 존엄의 이념을 환기시킨다면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매일 집 앞에서 아우슈비츠를 만나야 하는 독일인의 심정이 궁금해 한 중년 여성에게 걸림돌이 주는 심리적 부담감에 대해 물었다.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부담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와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걸림돌'은 이제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에 6만5천개 넘게 심어졌다. 공적 역사에 묻혀온 개인적 역사가 '집 앞'에 되살아나고, 익명의 희생자들이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고 있다. 독일인들은 아침마다 과거의 '걸림돌'에 걸려 비틀거릴 테지만, 바로 그렇게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새롭게 배우고, 결국 과거를 넘어설 것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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