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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택시운전사〉 〈박열〉 그리고 역사적 상상력

결국 역사적 상상력의 문제이다. 기록의 뼈대 위에 어떻게 믿음직하고 생생한 허구를 덧씌우는가. 〈군함도〉는 너무 나갔고 〈택시운전사〉는 지나치게 무난한 길을 택했으며 〈박열〉은 그런 것을 꺼낼 여유도 없이 실화에 끌려다닌다. 결국 자신이 다루는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통제한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던 셈이다. 이 정도면 날 잡아 역사적 상상력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가 된 게 아닐까.

  • 듀나
  • 입력 2017.08.08 06:49
  • 수정 2017.08.08 07:01

올해 여름엔 20세기 한국 역사를 소재로 삼은 야심작 세 편이 나왔다. 이준익의 〈박열〉이 가장 먼저였고 그 다음이 류승완의 〈군함도〉와 장훈의 〈택시운전사〉였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들 중 걸작은 없다. 모두 성취도가 고만고만한 수준이고 정도차는 있지만 소재를 생각하면 다들 아쉽다.

영화 〈군함도〉. © 씨제이이앤엠

가장 논란이 되었고 문제가 심각한 영화는 류승완의 〈군함도〉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군함도에서 탈출한다는 설정부터 문제였다. 모두가 결말을 아는 참혹한 실제 역사에 허구의 해피엔딩을 부여하는 것은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개봉 이후의 반응을 보면 〈군함도〉를 만든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한 것 같지 않다.

더 나쁜 것은 〈군함도〉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들이 불러온 인물들이 모두 극단적으로 장르화되었다는 것이다. 오에스에스(OSS) 요원, 종로를 주름잡던 조폭, 위장한 친일파, 기타등등. 이들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개연성 있는 허구엔 어울릴 수 있어도 군함도의 실제 역사에서는 주제 자체를 갉아먹는다. 장르적 상상력이 실제 역사와 아주 나쁜 방식으로 만난 것이다.

영화 〈택시운전사〉. © 쇼박스

장훈의 〈택시운전사〉는 〈군함도〉보다 역사에 대해 예의바른 영화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카메라로 담은 독일 저널리스트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광주까지 데려간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실화를 소재로 삼은 이 영화에는 과격한 역사의 변형이나 과장된 장르장치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영화가 이상할 정도로 무난하다. 실제 역사를 많이 비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여전히 실화에 기반을 둔 허구이고 힌츠페터와는 달리 자료가 남아있지 않는 김사복은 전적으로 재창조된 허구의 인물이다. 당연히 상상력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한다.

문제는 그 상상력이 진부하다는 것이다. 김사복을 포함한 이 영화의 주요인물들에겐 강한 데자뷔가 느껴진다. 중심이 되는 인물은 비정치적인 소시민 중년 남자이고 그의 정치적 각성이 스토리이며 주변의 조역들은 단 한 명의 예외없이 순박한 민초이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이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는 게 그렇게 힘이 든 것이다. 상상력으로 역사책이 다룰 수 없는 빈 칸을 생명력으로 채우는 것이 이런 영화의 의무일 텐데 말이다.

영화 〈박열〉. © 메가박스㈜플러스엠

세 편의 영화들 중 가장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지는 작품은 이준익의 〈박열〉이다. 이 영화에는 개성 넘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그들이 뛰어다닐 수 있는 흥미로운 사건들이 있다. 단지 여기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이 캐릭터들은 이준익의 역사적 상상력을 거쳐 재창조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사의 상당부분은 실제 기록에서 따왔고 캐릭터 묘사 역시 수동적으로 그 뒤를 따른다. 보다보면 오래 전에 죽은 실존인물들에게 영화가 끌려다닌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것만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하는 관객들도 있겠지만 영화가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선 이 이상이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결국 역사적 상상력의 문제이다. 기록의 뼈대 위에 어떻게 믿음직하고 생생한 허구를 덧씌우는가. 〈군함도〉는 너무 나갔고 〈택시운전사〉는 지나치게 무난한 길을 택했으며 〈박열〉은 그런 것을 꺼낼 여유도 없이 실화에 끌려다닌다. 결국 자신이 다루는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통제한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던 셈이다. 이 정도면 날 잡아 역사적 상상력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가 된 게 아닐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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