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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셋이냐 폭탄이냐

흥미롭게도 이제 보수적인 논자들이나 언론도 보편적인 증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원래 세금을 많이 내던 부자들만 세금을 더 내는 것은 불공평하고 세수도 얼마 안 되니 더 많은 사람이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장 근로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 사람들이 47%에 이른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진심이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오랫동안 감세를 지지하고 증세에 반대해온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

ⓒEtiAmmos via Getty Images

한국인들은 이름도 잘 붙인다. 명목세율을 올리지 않겠다던 정부가 초고소득자와 거대기업에만 증세를 하겠다니 '핀셋 증세'라 부른다. 3억원 이상을 버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소득세의 증세 대상은 9만3천명, 경제활동인구의 약 0.3%다. 핀셋처럼 이들만 콕 집어서 세금을 올리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

정치인들이 호환마마처럼 무서워하는 증세의 물꼬를 텄다는 것은 일단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핀셋 증세로 얻을 수 있는 5년 동안의 세수 증가는 23조6천억원에 불과하다. 정부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은 5년간 178조원이 소요되는데 세입 확충으로 약 83조원, 세출 절감으로 약 95조원을 조달할 계획이었다. 이번 증세는 초과 세수 61조원이 대부분이었던 세입 확충 계획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세수 증가분 예측이 낙관적이며 재량적 지출의 축소는 쉽지 않으니 나중에 계산서가 날아올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흥미롭게도 이제 보수적인 논자들이나 언론도 보편적인 증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원래 세금을 많이 내던 부자들만 세금을 더 내는 것은 불공평하고 세수도 얼마 안 되니 더 많은 사람이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장 근로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 사람들이 47%에 이른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진심이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오랫동안 감세를 지지하고 증세에 반대해온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

물론 증세 이야기만 꺼내도 세금폭탄이라는 비판에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정치적 부담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필요한 것은 역시 더 많은 복지와 증세일 것이다. 촛불로 세웠다는 정부가 이런저런 눈치를 보며 핀셋 증세에 그쳐서야 될 일인가.

정부의 국정운영 계획도 그런 점에서 보면 아쉬움이 크다. 예를 들어 기초생활보장제도 부양의무자 기준은 폐지되지 않았고 가장 가난한 노인들에게 줬다 뺏는 기초연금 문제도 그대로다. 복지재정의 목표치가 제시되지 않았는데 이대로면 오이시디(OECD) 평균의 절반에 불과한 사회복지 지출 비중이 얼마나 높아질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또한 정부는 지출을 약 60조원 줄이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연간 정부 지출 증가율은 원래 공약했던 7%보다 꽤 낮아진다.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개선되던 소득 분배도 작년에는 크게 악화되었고 고령화는 빠르게 진행 중이다. 이러한 현실은 소득 재분배와 증세를 위한 정부의 더욱 적극적인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소득세는 면세자 비율을 줄이는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상위 10%나 20%로 그 대상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한국은 소득 상위 10%의 소득 집중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상위 20% 가구의 소득 중 조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오이시디 평균에 비해 약 4분의 1에 불과한 실정이다. 대통령은 중산층과 서민의 증세는 없다고 말했지만, 근로소득 기준으로 중산층 위의 고소득층 비중도 30%에 달한다. 물론 이와 함께 정부는 세금을 제대로 쓰기 위해 더 노력하고 불로소득이나 부동산에 대한 증세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소득 상위계층이 정부의 주된 지지자이며 조세 저항이 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이들을 설득하고 합의를 만들어내 나라를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 아닌가. 세금폭탄이라는 비판도 터져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에 맞서서 그 폭탄으로 아무도 다치지 않으며 오히려 불평등한 경제구조를 박살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지도자를 보고 싶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핀셋이 아니라 폭탄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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