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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판결문에 드러난 황병헌 부장판사의 '무지'

분명 박근혜는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우파의 지원을 받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집권했다. 그리고 대통령 박근혜 역시 한 명의 정치인으로서 보수주의적 신념을 가질 수도 있고 또 그것을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입헌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설사 다수의 지지를 받아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헌법의 지배를 벗어날 순 없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 좌파에 대한 지원 축소와 우파에 대한 지원 확대라는 자신의 보수주의적 소신을 펼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헌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헌정주의의 요구이다.

  • 최성호
  • 입력 2017.08.02 11:02
  • 수정 2017.08.02 12:26
ⓒ뉴스1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국민들은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는 이슈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에 신뢰를 보낸다. 필자 역시 그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급적 판사들의 판결을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이번 블랙리스트 재판에서 김기춘이 3년 징역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받고 조윤선이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보도가 났을 때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재판부가 합리적으로 잘 알아서 판단했으리라 생각하며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국민의 법감정을 언급하며 판결에 불만을 표시하고 황병헌 부장판사를 공격할 때도 사건 내역을 세세하게 파악하지 못한 일반인이 장고 끝에 판결을 내린 재판장을 그렇게 공격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고, 그런 공격은 자칫 여론재판이나 마녀사냥을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런데 며칠 전 공개된 블랙리스트 재판의 판결문은 이런 필자의 신뢰를 산산이 무너뜨렸다.

헌법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와 몰이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 재판의 판결문에 나타나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필자가 "정말 이건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게끔 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대통령은 보수주의를 표방해 당선됐고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을 그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좌파에 대한 지원 축소와 우파에 대한 지원 확대'를 표방한 것 자체가 헌법이나 법령에 위반된다고 볼 수는 없다"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우파의 지원을 받아 집권했으니 좌파와 우파를 차별해서 지원하는 것이 어째서 위법이냐는 것이다. 김기춘, 조윤선 등에 대한 블랙리스트 사건의 재판부가 박근혜의 위법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는 맥락이지만 그건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이번 판결문에 대해서 필자가 정말 실망하고 또 우려하는 바는 그 판결문이 헌법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황병헌 판사의 근본적인 무지와 몰이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법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법관, 그것도 법조계에서 나름 잔뼈가 굵은 부장판사인데 말이다. 모두 잘 알듯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그것은 보통선거제와 다수결의 원리를 통해서 구체화된다. 비록 많은 국가가 민주주의를 최선의 정치제도로 수용하고 있긴 하지만 민주주의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라는 책에서 '다수에 의한 폭정(the tyranny of the majority)'이라 부른 것이다. 다수의 폭정이 민주주의 정치사상가들에게 얼마나 큰 걱정거리였는지는 미국의 정치사를 잠시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미국 헌법의 설계자인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이나 알렉산더 헤밀턴(Alexander Hamilton) 등은 미국에 민주주의를 도입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다수의 폭정 가능성을 너무나 우려한 나머지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간선제로 만들어 버렸다. 대통령에 대한 직접 선거를 도입하면 다수의 표를 획득한 선거의 승자가 공공선이나 타인들의 권리보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정치를 하게 된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이것이 바로 복잡하기로 악명 높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인단 제도가 탄생하게 된 정치사적 배경이다.

엄밀히 말해 대한민국은 그냥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입헌민주주의 국가이다.

롤즈(J. Rawls)나 드워킨(R. Dworkin)과 같은 많은 정치철학자들은 다수의 폭정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소위 헌정주의 혹은 입헌주의(constitutionalism)에서 찾는다. 시민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를 담은 헌법을 최상위법으로 제정하고 모든 법률행위를 그 헌법에 근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시 다수의 폭정이라는 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헌정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이다. 그런 점에서 엄밀히 말해 대한민국은 그냥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입헌민주주의 국가이다. 이러한 입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이상, 설사 어떤 정책이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을 통하여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헌법을 위배하면 불법적인 것이 된다.

대한민국 정치에서 헌정주의적 요소가 등장하는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그 대표적인 것이 헌재의 박근혜 탄핵 심판이다. 박근혜의 파면에 대한 민주주의적 승인 절차는 국회에서 국민을 대의하는 국회의원 2/3이상이 탄핵안에 찬성표를 던지며 탄핵 소추가 의결되는 순간 사실상 완성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이후에 전개된 헌재의 탄핵심판은 민주주의적 절차가 아니라 헌정주의적 절차에 해당한다. 헌재의 재판관들이 대변하는 것은 국민의 민의가 아니라 헌법이 때문이다. 실제 선거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헌법재판관들이 민주적 대표성을 지닌다고 보기도 어렵다. 대통령 파면이라는 국가적 중대사에 대한 최종 판단이 민주적 대표성을 지니지 못하는 헌법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이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함께 헌정주의가 대한민국의 법과 정치의 기본 원리라는 것은 인식할 때 비로소 설명 가능하다.

입헌민주주의의 양대 원리인 민주주의와 헌정주의는 서로 갈등하며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대표적 사례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이다. 민주주의적 절차를 대표하는 국회는 사실상 파면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는 헌정주의적 절차, 즉 헌재의 심판을 통해서 번복되었다. 만일 대한민국이 헌정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수의 폭정을 용인하는 국가였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아마도 박근혜와 같이 파면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황병헌 부장판사는 아마도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만 알았지 입헌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몰랐던 모양이다.

분명 박근혜는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우파의 지원을 받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집권했다. 그리고 대통령 박근혜 역시 한 명의 정치인으로서 보수주의적 신념을 가질 수도 있고 또 그것을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입헌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설사 다수의 지지를 받아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헌법의 지배를 벗어날 순 없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 좌파에 대한 지원 축소와 우파에 대한 지원 확대라는 자신의 보수주의적 소신을 펼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헌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헌정주의의 요구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 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국민들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차별 받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는 취지이다. 보수주의를 표방하며 우파의 지원을 받은 정치인이 아무리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하더라도 보수주의자라는 이유로 혹은 그것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국민들을 차별하면 그것은 명백한 위법이다.

황병헌 부장판사는 아마도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만 알았지 입헌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몰랐던 모양이다. 다수의 지지로 당선된, 민주적 대표성을 지닌 권력자는 일부 영역에서 헌법에 구애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게 필자에겐 너무나 놀랍고 또 개탄스럽다. 전국민적 관심을 받는 블랙리스트 사건의 재판부가 헌법학 개론에나 나올 법한 수준의 헌법적 지식이나 이해도 지니지 못하니 말이다. 2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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