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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시민이 되자!

탈원전 문제를 시민과 전문가의 대립으로 몰고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탈원전', '전문가', '시민'을 묶어서 검색해보니, '탈원전은 시민이 아니라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식의 기사가 눈에 꽤 띄더군요.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분리돼선 안 되리라 여겼던 까닭입니다. 탈원전엔 과학적, 공학적, 사회경제적, 윤리적 문제 등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 사람이 모든 문제의 전문가일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원자핵발전 전문가와 탈핵 활동가 가운데 누가 원전 없는 세상을 더 많이 상상해왔는지 헤아리면, 탈원전의 전문성이 어느 쪽에 더 있는지 따지기도 그리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 윤태웅
  • 입력 2017.08.02 07:36
  • 수정 2017.08.02 07:51
ⓒ뉴스1

"과학자이기 전에 먼저 인간이 돼라!" 200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마스카와 도시히데(1940~ )에게 그의 스승인 사카타 쇼이치(1911~1970)가 남긴 말입니다. 사카타는 과학의 진보가 전쟁을 더 비참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였음을 성찰하며, 연구조직을 민주적으로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카타의 소립자 이론에 이끌려 나고야대학에 들어간 마스카와는 자유롭게 토론하는 연구실의 평등한 분위기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사카타는 물리 연구와 평화 운동의 가치가 같다며, 이 둘을 더불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정신은 제자인 마스카와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마스카와는 지금 헌법 9조를 지키려는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9조 과학자 모임'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지요. 전쟁 포기 선언을 담은 헌법 9조는 시민인 마스카와뿐 아니라 과학자인 마스카와에게도 잃어선 안 될 소중한 가치입니다. 전쟁할 수 없는 나라에선 과학자의 연구가 군사적으로 응용될 가능성도 줄어들 테니까요.

상황이 녹록진 않습니다. 과학은 갈수록 거대해지고 블랙박스화하여,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과학자들 스스로도 전모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소외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스카와는 사카타의 가르침에 기댑니다. 인간이 아닌 과학자는 있을 수 없으므로, '인간이 돼라'는 사카타의 말은 '시민이 돼라'는 뜻이었겠지요. 마스카와가 보기에 과학자들은 좀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폐쇄적인 공간에서 연구할 때 가장 행복해하는 생물이기 때문이랍니다. 그 결과가 가져올 잠재적 위험을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연구에만 몰두한다는 것이지요. 과학자가 자신의 시민적 정체성을 인식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탈원전 문제를 시민과 전문가의 대립으로 몰고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탈원전', '전문가', '시민'을 묶어서 검색해보니, '탈원전은 시민이 아니라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식의 기사가 눈에 꽤 띄더군요.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분리돼선 안 되리라 여겼던 까닭입니다. 탈원전엔 과학적, 공학적, 사회경제적, 윤리적 문제 등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 사람이 모든 문제의 전문가일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원자핵발전 전문가와 탈핵 활동가 가운데 누가 원전 없는 세상을 더 많이 상상해왔는지 헤아리면, 탈원전의 전문성이 어느 쪽에 더 있는지 따지기도 그리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사카타와 마스카와처럼 과학기술자들이 우선 스스로 시민임을 인식해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전문성이라는 좁은 테두리 안으로 자신들의 시야를 가두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울러 전문가 사회의 성찰도 필요해 보입니다. 4대강 사업과 관련해 자기반성의 목소리를 낸 토목공학자 단체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탈원전 정책을 정부가 이끌면 안 된다 하는 원자핵공학자들 중에서 과거의 정부 주도 원전 정책을 비판한 이들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천안함 침몰 원인을 둘러싸고 논쟁적 상황이 전개되었을 때 그걸 해소하겠다고 나선 물리학자 단체가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전문가는 시민을 존중하고, 시민은 전문가를 신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문가 사회가 성찰하고 시민적 정체성을 인식한다면, 시민들은 전문가들의 견해를 바탕으로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문제는 복잡다기하여 보통은 유일한 정답이 존재하기 어렵겠지요. 여러 해법 가운데 하나를 시민들이 잘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전문가의 소임이라 여깁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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