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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 엄마' 아닌 진혜숙을 만나다

어느 순간 애들 맛있는 거 해먹이겠다고 나는 부엌에 서있고, 애들은 아빠랑 밀린 이야기를 하는 게 부럽고 속상해서 이제 주말에도 외식하자고 했다. 또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사실 어른들 말씀 중에 제일 싫었던 게 '며칠 전부터 준비했다'지 않나. 하시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하는 게 너무 싫었다. 엄마는 그렇게 음식 준비하고 그래도 안 아프다고,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는데, 어떻게 안 아프겠나. 근데 그걸 똑같이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거다. 이런 습관을 우리 대에서 끊어야 한다. 친구들한테도 그러지 말자고 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에 답하기 위해 글을 쓰고 엄마를 만납니다. 모성과 희생, 사랑이라는 흔한 보통 엄마의 조건을 벗어나 '진짜' 엄마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합니다. 엄마라는 단어로 뭉뚱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조금씩 다르고, 독특하며, 때로는 불편할지라도 엄마란 이름 뒤에 가려진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보통엄마'의 이야기입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이 시대 여성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수빈 엄마'란 이름 때문에 잊고 살았던 진혜숙을 만나다

진혜숙 씨(50)는 살림에 있어서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프로 주부다. 매년 150 포기씩 김장을 하면서도 '절인 배추'를 사본 적이 없고, 식구들이 외출할 때면 일인분의 양만 따끈하게 차려냈다. 생선을 여러 마리 구워뒀다가 전자레인지에 데워내는, 그런 행동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그러니 혼자 집에 있을 때도 늘 다른 식구들을 위해 일하느라 바빴다. 뜨개질과 도예를 좋아해서, 막상 자기 공간을 가지면 "도구를 아무 데나 어질러 두고 거기서 잠들고 싶다"면서도.

많은 주부가 살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 진혜숙 씨도 그랬다. 그의 살림 철학을 들으며, 엄마의 노동을 존중하면서도 한편으론 경멸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엄마가 엄마라는 이유로 집안 일을 도맡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거부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또한 타자일 때만 느끼는, 꽤나 폭력적인 시선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거다. 많은 이들이 가사 노동을 '자기 고양'과는 거리가 먼 하찮은 일로 치부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주부가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일한다. 때문에 집의 구조를 비롯한 살림의 변화에 가장 많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도 주부라는 이야기를 <보통엄마>에서도 이미 전한 바 있다.

그 프로 주부 진혜숙 씨가 오히려 처음으로 상처받은 때는 결혼 후 처음으로 동창회에 나갔을 때다. 너무 오랜 시간 사회 생활을 하지 않은 나머지 직장인 친구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 가족 안에서는 차라리 당당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 동창회에 나가기 위해서도 외출을 극구 반대하는 남편과 오랜 전쟁을 치렀다. 그렇게 기대를 품고 나간 자리였는데, 자신은 여전히 집에 갇혀 있단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심정을, 사실 읽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진혜숙. 50살이다. 손으로 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좋아한다. 관심 있는 게 생기면 잘 하지는 못해도 성실하게 하는 타입이다. 잘 하지는 못 하지만, 열심히 시간을 지키고 하다 보면 가랑비에 젖는 것처럼 잘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진혜숙 씨와의 인터뷰는 그가 사는 집에서 진행했다. 거실이며 주방 곳곳에는 그가 직접 만든 도자기와 뜨개질 소품이 전시돼 있었다. 이렇게 직접 만든 소품을 주변에 선물로 주기도 한다고.)

어려서부터 공예에 관심이 많으셨나.

그런 건 아니다. 어렸을 때는 노래를 잘 해서 성악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데 워낙 시골 동네에서 살기도 했고, 집안이 보수적이라 안 된다고 하더라. 레슨도 받고 싶었는데 아버지께서 반대하셨다. 어머니는 좀 열린 편이셨지만, 지금처럼 맞벌이 시대도 아니고 본인은 사회 생활을 하지 않으니까 밀어주시질 못 한 거다.

▲ 진혜숙(50) 씨 부부의 사진 옆으로 전시된 도예 공예품, 바닥에 깔린 자수 보 모두 진 씨의 작품이다.

그때는 어디서 사셨나. 누군가의 딸인 진혜숙도 궁금하다.

전라북도 정읍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다. 소설 같은 이야기인데, 우리 집이 5만 평이 넘는 과수원을 하다가 망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가출도 하셨었다. 불화가 이어져서 나는 17살 때 고등학교를 자퇴했고, 연고도 없는 구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돈 벌어서 동생들을 가르치고,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며 공부하고 그랬다.

5만 평이면 엄청난 규모다. 가세가 기울기 전까지는 꽤 유복하게 사셨을 것 같다.

그렇지. 어린 시절에는 파출부도 있었고, 집에서 기거하는 일꾼만 5-6명이 있었다. 일 도와주러 오는 사람을 다 따지면 하루에 100명 정도였다. 아버지가 원양어선을 타다가 자수성가 하신 분이다. 외국을 일찍 경험해서 나보다 영어를 더 잘했을 정도로 유식했다. 과수원도 잘 됐다고 하더라. 1년이면 집을 2채 살 정도였다고. 그러다 유기농 사업에 도전했는데, 지금 말로는 너무 앞서 나간 거다. 당시는 유기농을 알아주던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 벌써 수십 년 전 이야기다. 말도 안 되지. 그때 서울대 농대에서 우리 농장으로 실습도 오고 그랬었다.

집안이 무너지고 힘든 시절을 보내셨겠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학교에 다시 가기까지 2년이 걸렸다. 6남매 중에 딸로는 막내인데, 사실상 가장 역할을 했다. 나보다 위인 언니들은 시집을 가서 일을 못 했거든. 지금처럼 여자도 사회 생활을 했다면 동생들을 뒷받침할 수 있었을 거다. 힘든 기억이 많아선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도 한 20년 동안은 용서하지를 못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너무 많이 고생시킨 기억도 있고, 어머니가 가출한 뒤로는 내가 부인 역할도 하고 엄마 역할도 했으니.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으면서도 왜 (내) 뒷바라지를 안 해줬을까 하는 원망도 컸다.

어렵게 학교는 마치셨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있었나보다.

늦게라도 학교를 마치고 싶었다. 그런데 야간고에 갔더니 거의 다 나보다 나이가 많더라. 그마저 집안이 어렵다는 이유로, 맞이라는 이유로 야간 학교도 그만두고 일하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거기 가보니까 나는 참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연고(가족)도 없이 공부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적어도 나는 힘들 때 떠올릴 수 있는 가족이라도 있지 않았나. 학교 생활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줄 알았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성악 공부에 대한 미련도 있으셨겠다.

그렇다. 혼자서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구미는 꽤 큰 도시였으니까 성악 학원이 있었다. 야간고 3학년 때 번 돈으로 그 학원에 다녔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다. 동생들에 대한 책임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지.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 가는 걸 1년 정도 하다가, 직장을 안산으로 옮기며 그마저 못 했다.

그 직장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고 들었다. 남편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 궁금하다.

그렇다. 사실 결혼을 일찍한 편이다. 너무 일찍 사회 생활을 시작해서,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소속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남편을 만났을 때는, 돈도 뭐도 필요 없고 그저 착한 사람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때 눈이 정확했는지는 모르겠다. 23살 때니까 정확해봐야 얼마나 정확했겠나(웃음). 그래도, 지금 고르라고 해도 같은 사람 고를 것 같다.

결혼하고 나서 바로 직장을 그만두신 건가.

24살에 첫째 딸 수빈이를 낳았다. 띠동갑이다. 임신하고도 약 9개월 동안은 사내 커플로 직장에 다녔다. 임신 부종 때문에 몸도 퉁퉁 붓고, 아침에 서너 번씩 토하고 그랬다. 남편이 그런 모습을 보더니 바깥 일은 자신이 열심히 할 테니까, 가정을 지키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 사실 나도 좀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어렸을 때부터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계속 일을 했으니까 좀 쉬고 싶었던 거다.

건강 상태는 어떠셨나.

혼자 집을 떠나 학교 생활하고 그럴 때는 말랐었다. 집을 떠나있었지만 늘 집을 걱정하다 보니 그랬다. 늘 아버지가 어머니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잇몸이 다 흔들릴 정도로 심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불안했다. 아버지의 폭력을 계속 지켜봤기 때문에 그랬을 거다. 지금도 그 여파로 불면증이 약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고, 그럴 때마다 늘 긴장을 하던 습관 때문이다. 지금은 작년부터 한 10kg 정도 살이 쪘다.

그럼 첫째 수빈 씨 출산 후에는 사회 생활을 하신 적이 없는 건가.

중간에 보험 회사를 잠깐 다니기도 했다. 아주 잠깐. 그때 빼곤 남편도 나도 일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아이도 하나만 낳으려고 했다. 하나만 낳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다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런데 수빈이가 밖에서 놀다 오면 '나는 왜 동생이 없냐'고 묻더라. 어느 날은 동생을 사겠다고 슈퍼에 가 있는 걸 찾은 적도 있다. 그때 수빈이를 위해서 하나 더 낳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 몇 년 전에 찍은 진혜숙 씨 가족의 사진. 첫 딸 수빈 씨가 어린 시절 그렇게 '사고 싶어'하던 동생도 있다.

지금 쉰이시니까, 한 절반을 전업주부로 살아오신 거다. 전업 주부인 분들을 만나보니 생활 반경이 동네를 잘 벗어나지 않더라.

한 2~3년 전까지만 해도 쳇바퀴처럼 목욕탕이랑 교회만 갔다. 주말에도 나가는 일이 없고, 다섯 시 이후에도 나가본 적이 없다. 남편한테도 '내가 집에 없으면 교회나 목욕탕에 있을 거'라고 말하면서 살았다. 그때는 그게 일상 생활의 전부였으니 불편한 줄도 몰랐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면 안 했을 거다. 지금은 음식도 많이 사먹는 편인데, 그 전에는 고추장이며 된장이며 다 직접 담가 먹었다. 막내 딸이지만 늘 맞이처럼 살았던 경험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줄였지만, 예전에는 김장도 150포기 정도 해서 언니들에게 나눠줬다. 사람을 불러서 해보기도 했는데, 꺼낼 때 먹어 보니 내가 직접 만든 거랑 다르더라.

목욕탕과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사회 생활의 전부였겠다.

목욕탕에서는 목욕만 했다. 인사 정도할 뿐이지 사생활 이야기는 잘 나누지 않았다. 교회에서는 구역장을 맡으니 조금 더 가족 같은 느낌은 있었다. 그래도 언니 동생하면서 어울려 지내진 않았다. 아무리 친해도 언니라고 부른 적은 없다. 그런 호칭을 듣는 것도 좀 싫다. 이건 내 성향인데, 누가 나를 부를 때도 '누구 엄마' 아니면 차라리 '아줌마'라고 불렀으면 좋겠다. 이웃 아이들이 '이모' 하고 불러도 "나 네 이모 아니야"하고 대꾸한 적도 있다. 그런 식으로 얽히는 게 영 불편하다.

쳇바퀴처럼 지내셨다니, 그럼 혼자 계실 때는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내셨겠다. 그런데 살림에도 철학이 확고하셔서, 집에서도 항상 일 하느라 바빴을 것 같은데.

그렇다. 늘 혼자 집에 있었지만, 사실 ('보통엄마'가 묻는) 혼자만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그런 걸 만드는 게 소원이다. 나는 공방 하나 만들고 싶다. 도구나 재료들이 널부러져 있어도 치우지 않아도 되는. 그런 데서 뜨개질도 하고 안 치우고 잠도 자고 싶다. 남편한테 이야기했더니 아이들이 조금 더 커서 완전히 독립하면 그때는 당신 공간을 만들 수 있지 않겠냐고 하더라. 맞는 말이다. 살림이 많으면 공간을 내기가 어렵다. 여기 이사 오기 전에는 피아노도 있고, 냉장고도 세대나 있다 보니 더 그랬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랑 전업 주부는 살림살이의 규모도 다르다.

전업주부의 '남다른 살림 규모'는 베란다에 빼곡한 장독에서도 드러났다. 고추장이며 된장을 모두 담갔던 진 씨의 장독이다.

그래도 요즘에는 동창회도 나가시고, 여행도 다니신다고 들었다.

아이들이 큰 이후로 그런 여유가 생겼지만, 그것도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남편에게 동창회 간다고 했다가 트러블이 생겼었다. 남편이 사업을 하느라 새벽 2시에 들어오던 때였는데 그 시간에 가족 회의까지 열렸다. 이혼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오더라고. 사실 겁을 줬던 거 같다. 이혼하자고 이야기하면 안 나가겠지하고. 실제로 평소에는 큰 싸움이 나겠다 싶을 때 내가 항상 굽혔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큰 소리를 냈던 기억이 커서, 우리 애들한테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왜 그렇게 반대하신 건가.

글쎄. 사회 생활 하면서 동창회의 폐해를 많이 봐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안 좋은 얘기가 워낙 많으니까.

결국 잘 해결하셨다.

딸들이 큰 도움이 됐다. 남편과 냉전 중에 딸들한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밖에 나가봤자 일 년에 네 번 정도 될 텐데, 너희가 크게 불편하겠냐고. 그랬더니 애들이 얼마든지 나가도 좋다고 이야기를 하더라. 아무래도 큰 딸 수빈이가 현명하게 이야기해줬다. 지금까지 집안을 이렇게 돌봤는데, 이제는 엄마 시간을 가져도 되지 않겠냐고. 그 말에 용기를 얻어서 남편한테도 이야기했다. 아이들이 괜찮다고 하는데, 당신은 용납을 못 하냐 물었다. 수빈이가 아빠 옆에서 '엄마가 나가는 게 싫으면 (엄마가 집에) 혼자 있지 않게끔 아빠가 일찍 퇴근해야 한다'고 해줬다.

사실 수빈 씨도 그 이야기를 꺼냈었다. 꽤 힘들게 그 자리에 나가게 되셨다고, 본인에게도 두 분이 '동창회 참석'을 두고 다투시는 모습을 보는 게 꽤 힘들었다고 했다. 어머님 말씀 들어보면, 그럼에도 당시에 수빈 씨가 큰 힘이 되셨나보다. 아무래도 큰 딸이라 많이 의지하신 건가.

그렇다. 그 즈음 친정 엄마도 아팠는데, 수빈이와 둘이 관악산에 갔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 이 녀석은 내 마음을 알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런 생각했다. 아들한테 이런 얘기를 했으면 아빠 편을 들었을까. 수빈이가 엄마를 잘 아니까 이해하는 부분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수빈이는 애교가 많지는 않지만, 묵묵히 곁에 있는 타입이다. 그래서 힘이 많이 됐다.

평소에 엄마가 일하는 모습을 봐왔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아무래도 딸들은 엄마의 모습이 자신의 미래가 될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딸들이 본 엄마의 모습은 어땠을까.

애들이 학교 다닐 때, 아침에 밥상을 꼭 세 번씩 차렸다. 첫째 나갈 때, 둘째 나갈 때, 그리고 남편이랑 나 먹을 때. 남들은 생선도 한번에 여러 마리 구웠다가, 나중에 데워서 먹으라고 하던데 그렇게 안 했다. 싫었다. 꼭 밥상을 차릴 때마다 한 마리씩 구웠다. 생각해보면 미련한 일인데, 그때는 지치는 지도 몰랐다. 보통 엄마 마음이 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관절도 아프고 몸이 탈이 났다. 그래서 이제야 많이 사 먹는다. 막상 사 먹기 시작하니까, 사 먹어도 괜찮더라고. 안 죽어(웃음).

그러면 투쟁 끝에 어렵사리 나간 동창회는 어땠나.

내가 통 친구들과 왕래를 안 하다 보니 군인이 됐다는 소문까지 돌았더라. 어디서는 목사랑 결혼했다하고. (웃음) 처음에는 사회 생활을 오래한 친구들 옆에서 작아지는 느낌이 컸다. 친구들이 말하는 용어도 못 알아듣고, 동창회 일을 도와주고 싶어도 경리로 일했던 친구들 옆에서 컴맹이 뭘 해줄 수 있었겠나. 차라리 집에서는 존재감이 있었다. 가정 주부도 프로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변에 얘기할 만큼, 그 자부심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동창회에선 설 자리가 없더라. 속상했다.

가장 최근에 동창들을 만났던 때가 언젠가.

어제 동창 모임이 있었다. 5명 정도가 마음이 잘 맞아서 따로 연락을 하는데, 나 빼고는 다 직장 생활 중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서, 근처에 사는데도 2년 만에 만났다. 그렇다고 늦게까지 있을 수 있나. 저녁쯤에 구리에서 만났는데, 5명이 돌아가며 근황을 전하다 보니까 집 갈 시간이 되버리더라.

2년 만의 만남인데 더 오래 만날 수 없었나.

남편이랑 꼭 자정까지는 들어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남편이 그렇게 요구한 적은 없는데, 나한텐 그게 부부 간의 예의처럼 보였다. 그래야 남편도 나를 믿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신데렐라로 통한다. (웃음) 그래도 예전엔 남편이 아이들 시켜서 전화도 했다. 자정까지는 들어올 테니 연락 좀 하지 말라고 했더니 아이들 시켜서 했던 거다. 다행히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집에서 음식하는 대신 조금씩 사먹고, 친구들도 만나고. 행동 반경이 이제서야 조금씩 넓어지는 것 같다.

예전에는 내가 없음 집안이 안 돌아갈 줄 알았는데, 나 없이도 잘 돌아가더라. 나는 여행 가도 애들 보고 싶고, 남편 보고 싶고 그랬다. 음식이 안 맞으니까 밥 먹을 때만 되면 눈물이 나고 집에 가고 싶어하고. 애들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일주일 만에 전화했더니 태연하더라. (웃음) 처음 여행 갔을 때는 음식도 바리바리 해놓고 갔는데, 돌아오니 하나도 안 먹었다. 지금은 그래서 여행을 가도 편하게 간다.

조금 더 일찍 그렇게 하셨어도 좋지 않았을까. 편하게 지내보니 어떻던가.

작년에 처음으로 절임 배추를 사서 김장을 했더니 그렇게 쉬울 수가 없더라. 앞으로는 좀 편하게 살려고 한다. 오늘도 남편과 콩나물 국밥을 사먹고 왔다. 예전 같으면 주말에 애들이 집에 오니까 꼭 애들 좋아할 반찬을 미리 해놓고 그랬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애들 맛있는 거 해먹이겠다고 나는 부엌에 서있고, 애들은 아빠랑 밀린 이야기를 하는 게 부럽고 속상해서 이제 주말에도 외식하자고 했다. 또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사실 어른들 말씀 중에 제일 싫었던 게 '며칠 전부터 준비했다'지 않나. 하시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하는 게 너무 싫었다. 엄마는 그렇게 음식 준비하고 그래도 안 아프다고,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는데, 어떻게 안 아프겠나. 근데 그걸 똑같이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거다. 이런 습관을 우리 대에서 끊어야 한다. 친구들한테도 그러지 말자고 했다.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좀 생기셨겠다. 그렇게 남은 시간 동안 더 해보고 싶은 것은 없나.

영어울렁증을 극복하고 싶다. 사실 좀 해보다 포기했다. 손으로 만드는 일에는 결과물이 있고 성취감이 있는데, 공부는 나날이 늘지가 않더라. 10개를 열심히 외워도 다음날이면 다 잊어버렸다. 공부가 참 어려운 일이란 걸 느끼면서 애들 생각도 했다. 애들은 '엄마, 자유여행 다니려면 영어 공부해야지' 그러더라. 그래서 그냥 너희랑 같이 패키지로 다니겠다고 말했다.

손으로 만드는 건 다 좋아한다는 진혜숙 씨의 작품들.

노래는 여전히 좋아하시나.

그렇다. 수요일마다 노래 교실에 가는데, 모르는 사람은 노래를 못 해서 배우러 다니는 줄 알더라. 아니다. 노래가 좋아서 가는 거다. 교회에서도 예배를 가면 늘 지휘자 뒤에 앉는다. 내 목소리가 들리는지, 실제로 성가대를 하라는 제안도 계속 있다.

왜 안 하시나.

노래하는 것도 좋고 중요하지만, 내가 종교가 있는 사람이니까 남편이 나와 함께 종교 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남편은 내가 옆에 없으면 교회에 안 나갈 사람인 걸 잘 안다. 성가대 하면 시간도 많이 빼앗길테고 지금처럼 함께 교회에 가지는 못 할 거다. 사실 남편은 말리지 않는다. 해보라고 하기는 하는데, 내가 그래서 꺼리는 거다. 사회 생활을 안 해봐서 그런 활동 자체가 겁나는 점도 있고.

젊었을 때 결혼했고, 오랜 시간 가정에서 시간을 보낸 만큼 딸들의 결혼, 결혼 이후의 직장 생활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남편은 능력이 있으면 (결혼을) 안 해도 된다는데, 나는 딸들에게 결혼은 꼭 하라고 이야기 한다. 능력이 있어서 결혼을 안 해도, 주변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 문제가 있다. 성격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내 자식이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할까봐 걱정인 거다. 그런 문제를 떠나서도 자식을 낳아서 키워 보고 결혼 생활도 해야 한다. 물론 쉽진 않다. 전에는 나만 참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동창회 때문에 이야기를 해보면서 남편도 엄청 참았다는 걸 알았다. 결혼은 인내의 과정이다. 하지만 겪어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이가 주는 기쁨도 있고.

그럼 두 딸이 어떤 결혼 생활을 하면 좋겠나.

결혼해서 자기 일은 꼭 했으면 한다. 친정 부모에게 해주고 싶은 부분이 있을 때 물질적으로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울 때도 그렇다. 딸들한테도 이야기 한 적 있는데,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능력이 있어야 나갈 수 있다. 엄마처럼 참고 살란 말은 안 한다. 답답한 모습이 딸들에게도 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나의 엄마를 보면서 우리 엄마는 왜 저렇게 살까 생각했었다. 나는 겁이 많이 난다. 이 나이에 내가 갑자기 일해야 한다면 나를 써줄 곳도 없고, 세상을 모르고 지냈다는 두려움도 크고. 두 딸은 자신의 앞길을 자유롭게 꿈꾸며 살았으면 좋겠다. 넓은 가능성을 가지고.

진혜숙 씨를 만나기 전 만난 그의 큰 딸 이수빈(26) 씨는 기억 속의 한 장면을 꺼냈다. 진 씨가 "나라고 목욕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전부인 게 안 답답하겠냐"고 묻던 모습이었다. 수빈 씨는, 끼 많은 당신이 그렇게 제한된 관계 속에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안타깝다고도 했다.

진 씨와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그는 20년이 넘은 베테랑 주부이자 살림꾼이다. 요리 잘하는 당신의 음식을 당연하게, 맛있게 먹고 성장하면서 '엄마는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이니까 엄마에겐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왔다는 이 씨. 지금은 그게 당신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을 알아채고는 그 요리 비법을 하나씩 어깨 너머로 배우고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오히려 '요리'보다 '발 매트'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서서 요리하는 사람들에게 발 매트와 실내 슬리퍼의 쿠션이 얼마나 중요한지, 왜 엄마가 장 볼 때 발매트와 실내 슬리퍼를 그렇게 까다롭게 고르는지 여태 몰랐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낯을 좀 가린다"면서, 쉽지 않았을 지난 시간을 되짚은 진 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 우리에게 "우연히라도 근처에 들를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라"며, "거창한 것은 못 해줘도 된장찌개에 밥 차려주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진 씨의 '된장찌개에 밥 한 끼'는, 삶의 반을 '프로' 주부로 살아온 당신의 어떤 자부심이고 정체성일지 몰랐다.

두 번째 인터뷰가 끝났다. <보통엄마>의 인터뷰는 어떤 면에선 아주 게으르다. 엄마들을 만나고, 엄마들에게 질문을 던져놓거나 혹은 맞장구를 치고, 그저 귀를 쫑긋 세울 뿐이다. 인터뷰를 완성하는 것은 전적으로 엄마들의 입담이다. 이런 시간을 가져보지 않아서 어색할 것이란 짐작은 틀렸다.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타고난 이야기꾼이 많았다. 자신의 지난 시간을 누군가 묻길 기다려온 사람들같기도 했다.

오히려 늦은 쪽은 우리다. 미루고 미루다 엄마 도움이 필요 없는 지금에서야 엄마의 삶을 위로하다. 게으름의 다른 이름은, 그래서 잔인함이다. 인터뷰 말미, 진혜숙 씨는 자신이 만든 도자기와 뜨개질 작품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자신만의 공간이 생긴다면 작은 공방으로 꾸미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애착이 큰 작품들이다. 늦더라도 그 바람을 꼭 이루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때 마치 그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만 같은 행복을, 엄마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서다.

글 | 곽민해 〈보통엄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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