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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감독, 조지 로메로를 추모하며

그의 첫 번째 독립장편영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전설이 되었다. 그는 현대적인 좀비영화의 원형을 제공했다. 조지 로메로가 만들어낸 가장 탁월한 설정은 바로 원인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는 시체가 왜 되살아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공란으로 남겨두었다. 관객의 궁금증이 폭발했다. 그러나 감독은 끝까지 답하지 않았다. 한계를 짓지 않았다는 게 더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사실 감독의 생각에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좀비는 왜?'가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사람은 왜?'였다.

ⓒVittorio Zunino Celotto via Getty Images

좀비보다 못한 인간에 대한 성찰

끝났다! 조지와 루소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춤을 추었다. 이제 막 그들의 첫 번째 장편영화가 완성된 것이다. 몇평 되지 않는 작은 편집실에서 둘은 길길이 날뛰었다. 조지는 TV 프로그램 몇개를 연출한 게 이력의 전부였다. 장편 연출은 이게 처음이었다. 루소는 조지와 함께 각본을 썼다. 작가로서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두 명의 젊은이는 이 풍자적인 호러영화가 큰돈을 벌어다 줄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확실히 논쟁적일 것이라는 대화를 불과 며칠 전에 나눈 바 있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아니 오히려 최종 편집본이 나온 지금에 와서 그런 예감은 더욱 또렷해졌다.

뉴욕에 가자. 지금 당장 뉴욕에 가서 우리 영화를 틀고 싶다는 아무 극장에나 이 필름을 던져주자. 조지의 생각이었다. 둘은 바로 자동차에 올라탔다. 이제 막 완성된 영화는 알루미늄 케이스에 넣어져 트렁크에 쑤셔 박혔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그들은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신이 난다! 고물 자동차의 창문을 내리고 비명을 질러댔다. 기쁨이 넘치는 밤이었다.

루소가 음악을 듣기 위해 라디오를 틀었다. 음악은 나오지 않았다. 뉴스가 방송 중이었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다급했다. 흡사 그들이 만든 영화 속의 뉴스 진행자가 그러했듯이. 진행자는 같은 문장을 연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세 번째로 반복할 때에 이르러서야 조지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했습니다."

조지는 자동차를 갓길에 세웠다. 조지와 루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훗날 그들은 둘 다 마음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이 역사적인 비극이 흑인이 주연을 맡은 그들의 영화(시드니 포이티어가 아닌 이상 흑인 배우가 영화에서 주인공을 연기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관한 생각 말이다. 심지어 이 주인공은 영화에서 이마에 총을 맞고 죽는다. 둘은 말을 잃었다.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만이 자동차 안에 가득했다. 자동차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1968년 4월 4일이었다.

사람은 왜?

2017년 7월 16일, 조지가 세상을 떠났다. "큰돈을 벌어다 줄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확실히 논쟁적일 것"이라 생각했던 그의 첫 번째 독립장편영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전설이 되었다. 그는 현대적인 좀비영화의 원형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영화가 장르의 형식을 빌렸을 때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훨씬 더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는 첫 번째 영화의 성공 이후에도 이를 증명하는 훌륭한 영화들을 계속해서 연출했다. 조지가 만든 영화와 그 자신은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레퍼런스가 되었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영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조지 A. 로메로. 이 글은 그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와 게임 속의 좀비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좀비는 부두교의 주술사에 의해 주문에 걸려 조종당하는 상태를 의미했다. 조지 로메로는 좀비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한 뒤 어떻게 하면 보다 충격적일지에 관해 매일 회의를 열었다. 조지 로메로와 존 루소는 좀비라는 소재에 뱀파이어 신화, 시체를 파먹는 전통적인 악령인 구울의 이미지를 접목했다. 그렇게 몇 가지 설정이 탄생했다. 좀비는 살아난 시체다. 살아난 시체는 살아 있는 사람을 먹는다. 살아난 시체에 의해 공격당한 사람은 그 자신도 좀비가 된다. 살아난 시체는 어디까지나 시체이며 죽는 순간 당시의 트라우마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죽이기 위해서는 뇌를 없애야 한다. 이미 사후경직이 진행된 이후이기 때문에 살아난 시체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한다.

조지 로메로가 만들어낸 가장 탁월한 설정은 바로 원인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는 시체가 왜 되살아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공란으로 남겨두었다(사실 초안에는 위성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방사능의 영향으로 시체가 살아난다는 설정이 있으나 영화를 만들면서 확정짓지 않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관객의 궁금증이 폭발했다. 그러나 감독은 끝까지 답하지 않았다. 한계를 짓지 않았다는 게 더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사실 감독의 생각에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좀비는 왜?'가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사람은 왜?'였다.

아무튼 원인을 미상으로 남겨둔 덕분에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로 만들어진, 그 별처럼 많은 수의 좀비영화들이 저마다 서로 다른 기발한 방식으로 설정을 지어낼 수 있었다. 바이러스 때문에, 미친 과학자의 연구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해충 방지기 때문에, 인구수를 조절하려는 대자연의 결정으로, 심지어 특정 단어를 발음하면 좀비로 변한다는 설정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좀비영화의 유일한 표준이 되다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시체들이 살아나 사람을 공격하고 생존자들이 작은 오두막에 모인다. 이들은 좀비에 저항하면서 힘겨운 하룻밤을 보낸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데 성공한 단 한명의 생존자는 이튿날 당도한 민병대에 의해 좀비로 오인되어 사살당한다.

희생자와 좀비를 연기하는 데 200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스탭이나 영화를 찍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여든 구경꾼들이었다. 영화는 매우 적은 돈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투자자는 세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동네 푸줏간 사장이었다. 그는 소를 도축하고 남은 부속품을 촬영현장에 제공했다. 좀비들이 들고 다니는 사람의 내장은 전부 소의 것이었다. 좀비를 연기한 배우들이 먹는 건 초콜릿을 입힌 구운 햄이었다. 음악은 1959년 작품 〈외계에서 온 10대들〉의 음악을 EMI 뮤직 라이브러리에서 가져다 썼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11만달러를 들여 제작되었다. 영화가 공개된 이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처음에는 드라이브인 극장을 위주로 배급되었으나 곧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을 보지 말 것을 강력하게 권하면서 이 영화가 결국 식인 풍습을 조장할 것이라 경고했다. 영화는 3천만달러를 벌어들였다. 결과적으로 제작비 대비 263배에 이르는 수익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돈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이후 좀비와 디스토피아를 다룬 영화들에 있어서 가장 빼어나고 유일한 표준이 되었다.

인종 갈등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두안 존스가 연기한 주인공 벤은 단연 언론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 벤의 죽음을 보면서 마틴 루터 킹의 암살 장면을 연상했다. 인종 갈등에 관련한 모든 종류의 질문에 관해 조지 로메로는 의도한 게 없다고 밝혔다. 각본 속의 벤은 그저 트럭을 운전하는 노동자 남성일 뿐 딱히 인종이 설정되어 있지 않으며, 두안 존스가 이 역할을 연기하게 된 건 그가 흑인이라서가 아니라 오디션에서 가장 연기를 잘한 배우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영화의 진짜 관심사인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성은 당대의 갈등 양상과 주인공이 흑인이라는 사실에 힘입어 더욱 효과적으로 두드러졌다.

이와 같이 좀비를 풍경에 두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민낯을 통렬하게 고발하는 감독의 의지는 〈시체들의 새벽〉 〈시체들의 날〉을 거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2005년에 만들어진 〈랜드 오브 데드〉에서는 지상에서 좀비와 싸우며 고단하게 살아가는 빈민들과 고층빌딩에서 안전하고 쾌적하게 살아가는 부자들의 모습을 대비하며 계급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에 이른다.

이후 〈다이어리 오브 데드〉와 〈서바이벌 오브 데드〉를 내놓았으나 큰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세상에는 어느덧 너무 많은 좀비영화가 존재했다. 그는 쇠락한 듯 보였다. 새로운 관객에게 그는 그저 옛날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한번 더, 를 열망하며 같은 소재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노장에 지나지 않았다.

결코 시시하지 않은 사람

나는 고인의 모든 것이 좋았다고 대충 눙치는 방식으로 이 훌륭한 사람의 인생을 능욕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어떤 것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결코 시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영화를 그저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는 살아난 시체들보다 우리가 나은 게 대체 무엇인지 반문하며 매번 그에 걸맞은 성찰을 보여주었다. 제발 우리 자신을 돌아볼 것을, 우리가 무관심과 이기심, 그리고 무엇보다 부족한 관용으로 인해 스스로를 좀비보다 못한 무언가로 망치고 있음을 오랫동안 외쳐왔다.

조지 로메로는 절대 멈추지 않았다. 조지 로메로는 신작 〈로드 오브 데드〉를 준비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이 영화는 남은 사람들에 의해 완성돼 공개될 예정이다. 그는 늘 제목에 'dead'가 들어간 영화를 만들면서도 한결같이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큰별이 졌다. 그는 위대한 감독이었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 이 글은 씨네21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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