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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세논쟁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세 가지 질문

증세로 불평등을 해소하고 복지를 확대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는 극도로 불안하고 활력 없는 상태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미래가 자명한데도 여야 모두 진정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니 큰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슈퍼리치 과세는 세수 증가가 연 3.8조원밖에 안 되는, 그야말로 제스처 증세에 지나지 않는다. 세수 증가액으로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인 '기초연금 연 10만원 인상' 소요 재원(연 4.6조원)조차 조달하지 못하니 말이다.

ⓒGajus via Getty Images

마침내 증세논쟁에 불이 붙었다. 문재인 정부가 슈퍼리치 소득자와 대기업을 대상으로 증세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민주당은 "명예과세다", "사랑과세다"라며 지원에 나서고 자유한국당은 "세금폭탄이다", "가렴주구식 도미노 증세가 될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기 싸움에 돌입했다. 피할 수 없는 정책 의제가 본격 등장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핵심을 건드리지 않은 채 프레이밍(framing)에 올인하는 분위기여서 걱정스럽다.

정치공학이야 정치인들이 늘 신경 써야 하는 문제이겠지만, 그렇다고 정치의 이상을 방기(放棄)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혁명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상(理想)은 절대적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촛불혁명의 과제를 실천한다는 관점에서 증세문제에 접근할 경우 어떤 점을 중요하게 취급해야 할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금 증세가 필요한가?

지금 우리 사회에 증세가 필요한가?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관계없이, 국민 대부분은 필요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한국은 저부담-저복지 상태에서 갈수록 심해지는 소득불평등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2015년에는 소득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14.2%를 차지하고 소득 상위 10%가 48.5%를 차지하여, 소득집중도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OECD 최고 불평등 국가인 미국의 수준(50%)에 육박할 정도다.

2015년 한국의 조세 부담률은 18.5%로 OECD 평균 26.1%에 비해 7.6% 낮은 수준이며, 국민 부담률은 25.3%로 OECD 평균 34.3%에 비해 9% 낮은 수준이다. 같은 해 사회 지출도 GDP 대비 10.4%로 OECD 평균 21.6%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니 사회 안전망이 취약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조세 부담률이 낮고 복지 지출 비중도 낮으니 재정의 소득 재분배 기능도 미약할 수밖에 없다. 2011년 한국 재정의 소득 재분배 효과(지니계수 개선도)는 9%로 OECD 국가 평균 34%에 크게 미달하며, OECD 34개국 중 33위를 기록했다.

증세로 불평등을 해소하고 복지를 확대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는 극도로 불안하고 활력 없는 상태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미래가 자명한데도 여야 모두 진정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니 큰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슈퍼리치 과세는 세수 증가가 연 3.8조원밖에 안 되는, 그야말로 제스처 증세에 지나지 않는다. 세수 증가액으로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인 '기초연금 연 10만원 인상' 소요 재원(연 4.6조원)조차 조달하지 못하니 말이다.

이 정도의 방안을 두고 세금폭탄이니 가렴주구니 반박하다가 재정 보완책도 없이 스스로 올렸던 담뱃세를 내리겠다는 자유한국당의 태도는 시대착오 그 자체다. 이처럼 비현실적인 제안과 시대착오적인 반발이 오고간다는 것은 청와대와 자유한국당 양쪽 모두 문제 해결보다는 정치공학에 매여 있다는 증거다.

얼마를 증세해야 할까?

증세가 당연하다면 얼마를 증세해야 할까? 일단 연 3.8조원은 말이 안 된다. OECD 평균 조세 부담률을 실현할 경우 걷힐 세수와 현재 세수와의 차액은 연 119조원 정도다. OECD 평균치가 절대 기준은 될 수 없겠지만, 저부담-저복지 상태에서 중부담-중복지로 나아가려면 이 정도는 장기 목표로 삼을 필요가 있다.

한편, 지난 대선 때 본격적인 증세와 기본소득 도입으로 주목을 받았던 이재명 성남시장의 제안은 단기 목표로 참고할 만하다. 이재명 시장은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국토보유세 도입으로 15.5조원, 재벌·대기업 법인세 강화로 15조원, 초고액 소득자 소득세 강화로 2.4조원, 조세감면 제도 개선으로 5조원, 합해서 연 37.9조원을 임기 내에 더 걷겠다고 공약했다. 해가 가면 증세액은 자연적으로 늘어나겠지만, 일단 단기 목표로 30조원 후반대는 적정한 수준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차피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청와대는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증세 규모를 정확하게 내놓고 국민들의 동의를 구하라. 사실 청와대가 내놓은 슈퍼리치 과세는 대중의 이기심에 기대는 '꼼수 증세'라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렵다. 그 열배인 38조원을 더 걷어서라도 불평등을 해소하고, 특권을 타파하고, 복지를 확대하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동의해줄 국민들 많다. 국민을 믿고 정도를 가는 것이 촛불혁명 정부가 취해야 할 마땅한 태도 아니겠는가?

증세의 순서는 어떻게 잡아야 할까?

어떤 세금을 더 걷어야 할까? 일찍이 헨리 조지는 이 문제에 관해 정곡을 찌른 언급을 한 바 있다.

"진실로 과세 방식은 금액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무거운 짐도 잘 실으면 말이 거뜬하게 운반할 수 있지만 가벼운 짐도 잘못 실으면 말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다. 적절한 방식으로 부과하면 별 어려움 없이 부담할 수 있는 조세도 잘못 부과하면 국민을 궁핍하게 하고 부의 생산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집트 왕 모하메드 알리(Mohammed Ali, 1769~1849)가 야자수에 조세를 물리자 농민들이 자기의 야자수를 베어버리는 사태가 생겼으나 그 두 배의 세금을 토지에 부과했을 때에는 이런 결과가 생기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알바(Alva, 1508~1582) 공작이 모든 판매에 대해 세율 10%의 조세를 매긴 적이 있었는데 이 세제가 계속되었더라면 교환이 거의 중단되고 세수입은 거의 못 올렸을 것이다."(헨리 조지 저, 김윤상 역, 『진보와 빈곤』에서)

세금은 좋은 세금부터 먼저 걷어야 한다는 말이다. 조세학자들은 어떤 세금이 좋은 세금인지 판별하기 위한 기준으로 조세원칙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날이 갈수록 내용이 불어나서 현대의 조세학자들이 제시하는 조세원칙은 교과서 몇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가 됐지만, 가장 간명한 것으로는 중립성, 경제성, 투명성, 공평성을 제시한 헨리 조지의 조세원칙이다(이는 아담 스미스의 조세원칙과 거의 유사하다).

중립성은 조세가 경제를 위축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이고, 경제성은 조세 징수에 따르는 행정비용이나 사회적 비용이 적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투명성은 세원이나 조세 징수 과정이 투명해야 한다는 원칙이고, 공평성은 사회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을수록 많은 부담을 지게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네 가지 기준을 적용할 때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 세금은 토지보유세이다. 이 세금은 중립적이고, 경제적이며, 투명하고, 공평하다. 네 가지 기준 모두를 최고 점수로 통과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금 자체를 혐오하는 밀턴 프리드먼 같은 경제학자조차 이를 "가장 덜 나쁜 세금"이라고 평가했다. 토지보유세 다음은 각종 특권이익에 부과하는 조세와 환경세이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슈퍼리치 과세는 특권이익을 대상으로 하는 조세에 해당한다. 슈퍼리치 소득자와 대기업이 누리는 막대한 소득은 노력소득이라기 보다는 특권이익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환경세는 부과하는 방식에 따라 경제를 위축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토지보유세보다는 뒤떨어지지만, 환경이란 본질적으로 토지와 같은 성질을 갖기 때문에 증세 순서에서 상위에 놓아야 한다.

증세를 추진할 때는 이런 세금들부터 먼저 더 걷은 후에 부족할 경우 국민의 동의를 구해서 슈퍼리치 이하 소득자의 소득세를 강화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부가가치세를 더 걷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바둑에서 수순이 중요한 것처럼 증세도 마찬가지다. 현재 조세 전문가들 중에 부가가치세 우선 증세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한국 사회를 자멸의 길로 몰아넣을 악수다.

가장 좋은 세금을 외면하는 문재인 정부

이상하게도 문재인 정부는 토지보유세 강화를 말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발간한 책에서 부동산 보유세를 GDP 대비 1% 수준으로 올리겠다고 말했지만, 대선 투표일 직전 캠프 인사들이 그 공약을 백지화시킨 후 지금까지 일절 언급이 없다.

한국이 보유세 부담이 낮고, 보유세에 비해 거래세 비중이 과하게 큰 기형적 부동산세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부동산 보유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데 정면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난 대선 경선 과정에서 이재명 후보가 국토보유세를 제안하고 그것을 기본소득과 연계함으로써 보유세에 대한 조세저항을 정면 돌파할 길도 열어 놓았다. 게다가 참여정부 때처럼 서울의 아파트 시장이 달아올라서 난리다. 그런데도 토지보유세 강화를 애써 외면하는 것은 정말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 집권세력이 참여정부 시절에 겪은 세금폭탄론의 영향 말고는 그 이유를 찾기 어렵다.

어려운 적을 만났을 때 세를 따져 결정하면 결국은 패배한다. 문재인 정부가 민심과 천심, 원칙과 정도(正道), 자기 정체성과 이상(理想)을 새롭게 마음에 새겨야 할 때 주판알만 튕기고 이미지 정치에 쏠리고 있는 듯해서 무척 안타깝다.

* 〈오마이뉴스〉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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