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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발언, 여성비하, 성적대상화 | 탁현민의 경우

탁 행정관을 비난하는 이들은 그가 과거 책에서 여성혐오 발언을 했고, 여성을 비하했으며,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 말한다. 그런데 일각에선 탁 행정관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조금씩 들린다. 탁 행정관의 과거 발언이 다소 문제가 될 소지가 없지 않지만 그게 행정관에서 경질할 만한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소셜 미디어나 각종 게시판에서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종종 목격하는데, 그런 논쟁은 건설적인 논의로 이어지기 보단 상대방을 모욕 주고 비방하는 이전투구로 끝나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번 탁 행정관 이슈를 매개로 그간 한국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일반인의 선입견, 불신, 오해 등이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합리적인 공론의 장이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 최성호
  • 입력 2017.07.24 11:22
  • 수정 2017.07.24 12:47
ⓒ뉴스1

탁현민 행정관에 대해서 말들이 많다. 주류 미디어 및 여성계 그리고 야당에서 그의 경질을 거세게 요구하고 있다. 탁 행정관을 비난하는 이들은 그가 과거 책에서 여성혐오 발언을 했고, 여성을 비하했으며,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 말한다. 뿐만 아니라 탁 행정관이 임신한 여성에 대한 왜곡된 성적 판타지를 가졌고 자신의 첫 성경험을 회고하며 상대 여성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일각에선 탁 행정관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조금씩 들린다. 탁 행정관의 과거 발언이 다소 문제가 될 소지가 없지 않지만 그게 행정관에서 경질할 만한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소셜 미디어나 각종 게시판에서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종종 목격하는데, 그런 논쟁은 건설적인 논의로 이어지기 보단 상대방을 모욕 주고 비방하는 이전투구로 끝나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번 탁 행정관 이슈를 매개로 그간 한국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일반인의 선입견, 불신, 오해 등이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합리적인 공론의 장이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먼저 탁 행정관 사안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전에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탁 행정관이 그의 책에서 여성 혐오 발언을 했는지, 여성을 비하했는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는지, 그의 성적 판타지가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하는지 등의 질문에 대해서 결론을 미리 정하고 이 글을 읽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탁 행정관의 발언이 여성계의 비난을 산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정당한 비난인지는 따져볼 일이다. 그런 정당성에 대한 엄정한 검토 없이 누군가를 비난하고 성토하면 그건 여론재판, 마녀사냥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는 도덕적 이슈에 대해서 조금씩의 상식을 가지고 있고 그런 상식은 타인에 의해 존중될 필요가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도덕적 상식을 오류불가능한 참으로 단정할 수도 없고 단정해서도 안된다. 충분한 경험적·이론적 근거가 주어질 때 도덕적 상식 역시 오류로 판명날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 서로 상반된 도덕적 판단이 맞서는 경우엔 더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탁 행정관과 관련된 논쟁에는 매우 난해한 개념들, 가령, 혐오 발언, 여성 비하, 성적 대상화와 같은 개념들이 나타나고 그 개념들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위해선 언어철학, 법철학, 도덕심리학(moral psychology), 페미니즘 철학과 같은 학문 분야에서 이루어진 기존 연구성과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복잡하고 난해하면서 동시에 인화성이 큰 이슈인 만큼 미리 결론을 정해 놓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접근하자는 부탁이다.

1. 여성 혐오

먼저 탁 행정관의 발언이 "여성 혐오" 발언이라는 비판부터 살펴보자. 일부 언론에서 그런 비판을 제기하는데, 필자가 보기엔 이건 탁 행정관에게 정당한 비판이라 보기 힘들다. 필자가 그의 책을 읽지는 않고 언론에서 언급되는 구절("등과 가슴의 차이가 없는 여자가 탱크톱을 입는 것은 남자 입장에선 테러를 당하는 기분", "이왕 입은 짧은 옷 안에 뭔가 받쳐 입지 마라", "파인 상의를 입고 허리를 숙일 때 가슴을 가리는 여자는 그러지 않는 편이 좋다" 등)들만 보았지만, 적어도 거기서 그가 혐오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혐오 발언은 영어 "hate speech"의 번역인데, "hate speech"라는 표현은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철학자 마리 마추다(Mari Matsuda)가 1989년 "인종차별적 발언에 대한 공적 대응"(Public Response to Racist Speech: Considering the Victim's Story)이라는 논문에서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인종, 성, 종교 등에 기반한 각종 차별주의가 사회 문제화되면서 학계 및 사회 일반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런데 혐오 발언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아직까지 명확한 정의가 없다. 그럼에도 그것이 혐오(hatred)라는 감정과 밀접한 개념적인 관련을 갖는다는 것은 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듯하다. 그런 관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혐오 발언을 청자(hearers)에게 어떤 타깃 그룹(e.g. 여성)에 대한 혐오 감정을 유발하는 발언으로 정의하기도 하고, 다른 학자들은 화자(speakers)가 어떤 타깃 그룹에 대한 혐오 감정을 표현하는 발언으로 정의하기도 하며, 또 다른 학자들은 화자가 청자에게 혐오 감정을 부추길 의도 하에 내뱉는 말로 정의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식으로 정의되든, 탁 행정관의 발언이 혐오 발언으로 분류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등과 가슴의 차이가 없는 여자가 탱크톱을 입는 것은 남자 입장에선 테러를 당하는 기분"라는 발언을 통해 탁 행정관은 지극히 자극적인 언어로 일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신의 선호를 가감 없이 표현하였다. 그럼 이것이 여성 일반에 대한, 혹은 등과 가슴의 차이가 없으면서 탱크톱을 입는 여성에 대한 혐오 발언인가? 탁 행정관은 앞의 발언을 통하여 일부 여성들에 대한 비호감을 표현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혐오를 표현한 것으로 보긴 힘들다. 좋아한다는 것(호감)과 사랑한다는 것을 구분해야 하는 것처럼 싫어한다는 것(비호감)과 혐오한다는 것은 분명 구분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불쾌감을 얻는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어떤 사람을 혐오한다는 것은 그를 증오하고 미워하며 그에게 불행이 초래되는 것을 원하는 감정상태이다. 물론 비호감과 혐오가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다. 이번에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를 싫어하지만 그를 혐오하지 않는 미진이의 감정상태는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싫어하는 것과 혐오하는 것을 구분할 때 탁 행정관의 발언은 일부 여성들에 대한 혐오를 표현했다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비호감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가령 누군가 "빨갱이는 다 죽여야 해"라고 말한다든지 혹은 "자유한국당은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분명 혐오 감정을 표현한 발언이다. 그것은 타깃 집단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감정, 그들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감정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등과 가슴의 차이가 없는 여자가 탱크톱을 입는 것은 남자 입장에선 테러를 당하는 기분"이라는 말을 통하여 탁 행정관이 등과 가슴의 차이가 없으면서 탱크톱을 입는 여성들을 증오하거나 미워하고 그들에게 불행한 일이 닥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비호감을 자극적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탁 행정관의 발언이 일부 여성들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거나 혹은 탁 행정관이 그런 혐오를 부추길 의도로 그 발언을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화자가 "김아무개 교수의 강의를 듣는 것은 학생 입장에서 테러 당한 기분이야"라고 말할 때, 그 말이 김아무개 교수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화자가 그런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도하여 그 말을 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화자는 단지 김아무개 교수의 강의가 불쾌하다는 사실을 다소 자극적은 언어로 표현했을 뿐이다. 탁 행정관의 발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이런 점에서 혐오 발언을 어떤 집단에 대한 화자의 혐오를 표현하는 발화로 보든 아니면 그 집단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발화로 보든 탁 행정관의 발언이 여성 혐오 발언이 되기 힘들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필자의 이런 논거에도 불구하고 탁 행정관의 발언이 여성 혐오 발언이라 누군가 고집한다면, 그는 여성 혐오 발언의 정의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왜 탁 행정관의 발언이 그 정의하에서 여성 혐오 발언인지에 대한 자신 나름의 설명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2. 여성 비하

지금까지 필자는 탁 행정관의 발언이 여성 혐오 발언이라고 보긴 힘들다고 주장했는데, 필자의 추측에 아마도 탁 행정관이 "여성 혐오" 발언을 했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진정으로 말하려고 했던 바는 탁 행정관이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일 듯하다. (그럼에도 "여성 혐오"와 "여성 비하"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실제로 탁 행정관에 관한 보도에서 "여성 혐오"라는 표현보다 "여성 비하"라는 표현이 더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탁 행정관이 여성을 비하했다는 주장도 차근차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여성을 비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비하"라는 단어의 표준적인 용법에서 어떤 집단을 비하한다는 것은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그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낮은 도덕적 가치(moral worth)를 갖는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민중은 개·돼지다"는 나향욱의 발언 (유사하게 "국민들은 레밍이다"는 김학철의 발언)이 대표적인 비하 발언이다. 나향욱 발언은 국민들이 개·돼지와 동일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는 명제적 내용(propositional content)을 담고 있다. 즉, 국민들이 그런 열등한 도덕적 가치를 가질 때 나향욱 발언은 참이 된다는 말이다. 이는 그들의 발언이 명백히 국민을 비하하는 발언임을 뜻한다. 나향욱은 그 발언으로 교육부에서 곧장 경질되었다. 국민 전체에 대한 비하 발언이 공무원으로서 부적절한 발언인 만큼 그 경질은 도덕적으로 합당한 결정이라 볼 수 있다.

나향욱 발언에서 비하는 발언의 명제적 내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비하가 언제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화자가 "철수는 일베충이야"라고 말한다면, 그 경우 화자는 "일베충"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일베이용자를 비하한다. 그 단어를 통하여 화자는 일베를 빈번히 이용하는 것이 일베이용자들의 도덕적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것, 즉, 그들의 도덕적 가치가 인간이 아닌 벌레의 도덕적 가치와 같은 것이 되고 만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일베충" 발언의 경우 나향욱 발언에서와는 다르게 비하가 발언의 명제적 내용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철수가 일베를 빈번히 이용하는 일베이용자라는 가정 하에서 화자가 일베이용자에 대한 비하를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철수는 일베충이야"라는 발언은 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일베이용자에 대한 화자의 비하가 그 발언이 참이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비하는 그 문장의 명제적 내용이 아니다. "김치녀"는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인데 ("한남충"은 한국 남성을 비하하고 "틀딱충"은 노인을 비하하고), 그것이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방식은 "일베충"이 일베이용자들을 비하하는 방식과 정확히 동일하다.

그럼 탁 행정관의 발언이 여성을 비하하고 있는가? 많은 이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판단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나향욱이 그의 발언 때문에 경질된 만큼 탁 행정관도 마찬가지로 경질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고 있다. 그런데 탁 행정관의 발언이 여성 비하 발언이라는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선 그가 그의 발언을 통하여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자보다 낮은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이 입증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이 명확하지 않다. 다시 탁 행정관의 발언을 되짚어 보자. ("등과 가슴의 차이가 없는 여자가 탱크톱을 입는 것은 남자 입장에선 테러를 당하는 기분", "이왕 입은 짧은 옷 안에 뭔가 받쳐 입지 마라", "파인 상의를 입고 허리를 숙일 때 가슴을 가리는 여자는 그러지 않는 편이 좋다" 등) 앞의 나향욱 발언이나 "일베충" 발언과 비교할 때, 탁 행정관의 발언에 여성들이 열등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분명 탁 행정관의 발언은 일부 여성들, 어쩌면 여성 전체에게 상당히 기분 나쁠 발언이다. 자신의 성적 선호를 가감 없이, 그것도 매우 선정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공개한 것은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이 여성 비하 발언인지는 다른 문제이다. 적어도 필자의 언어적 직관에서 그가 나향욱 발언이나 "일베충" 발언에서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타깃 집단, 즉 여성을 비하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3. 성적 대상화

그런데 여기서 곧장 탁 행정관의 발언이 여성 비하 발언이 아니라고 결론 내리기에는 다소 꺼림칙하다. 탁 행정관의 발언이 나향욱 발언이나 "일베충" 발언과 조금 다른 방식의, 좀 더 미묘하고 심층적인 방식으로 여성을 비하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탁 행정관의 발언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다는 주장이다. 비록 탁 행정관의 발언이 나향욱 발언이나 "일베충" 발언처럼 직접적으로 타깃 집단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함으로써 여성을 간접적으로 비하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탁 행정관의 발언을 비난하는 기자들이나 여성단체회원들은 심심치 않게 탁 행정관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탁 행정관의 발언이 여성 비하 발언인 것은 그것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공산이 크다. 이런 관점에서 탁 행정관의 발언을 이해할 때 성적 대상화라는 개념이 중요해진다. 그런데 "성적 대상화"라는 표현을 쓰는 이들이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쓰는지 알 길이 없지만 성적 대상화라는 개념은 칸트 철학에서 유래하는, 유서 깊고도 난해한 개념이다.

칸트는 타인을 성적 욕구의 수단으로만 삼는 것은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자기 자신 혹은 타인의 인격을 항상 존중하고 나아가 인격적 존재를 어떤 경우에도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률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칸트의 영향 아래 현대의 많은 페미니즘 철학자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은 많은 경우 여성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고 여성을 자신의 성적 즐거움을 위한 수단으로만 대했다고 설파한다. 그런데 인격이란 다름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게끔 해 주는 것, 즉 인간을 인간이 아닌 것들로부터 구분해 주는 인간성의 요체이다. 따라서 남성이 여성을 단지 자신의 성적 즐거움을 위한 수단으로만 대하는 한 남성의 관점에게 여성은 인간이 아닌 비인격적 대상이나 사물로 전락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발생한다. 성범죄는 성적 대상화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이다. 강간범이나 성추행범은 타인을 단지 자신의 성욕을 충족하는 수단으로만 대하고, 타인이 자율적 자기 결정권을 갖는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을 철저히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럼 탁 행정관의 발언에서 이런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이루어졌는가? 어렵고도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답변은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할 듯하다. 그 답변까지 논의하자면 허프포스트 역사상 가장 긴 포스트가 탄생할 것인데, 그것보단 이쯤에서 쉬어가는 것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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