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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감염 후 40년 동안 생존한 나의 이야기

  • 김도훈
  • 입력 2017.07.21 13:39
  • 수정 2017.07.21 13:40
ⓒmrs via Getty Images

나는 세계 에이즈의 날인 12월 1일을 매년 새 출발의 날로 삼는다. 2016년 12월 1일은 내가 HIV를 지니고 산지 40년이 되는 날이었다. 1977년 11월에 나는 예일의 학생 병원에 갔다. 여러 증상이 있었다. 식은땀이 났고 림프절이 부었다. 열도 조금 났고 발진, 아구창(鵞口瘡)이 생겼다. 독감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만약 내가 이런 증상을 가지고 지금 병원에 간다면, 누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면봉을 들고 와 내 입 안을 긁으며 혹시 내가 게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리고 ‘혈청전환’이야기를 하며 HIV가 이젠 사형 선고는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동안 AIDS 감염자의 삶의 궤적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나는 내게 무슨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천하무적인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전세계는 고사하고 미국의 게이들에게 AIDS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결코 모를 것 같다. 그건 아주 위험한 일이다.

나는 23세 때 내 친구 제리의 병원에 갔다가 한 달 전에 함께 애팔래치아 자연 산책로를 함께 배낭여행을 갔던 남성이 김이 서린 산소 공급 텐트에 누워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괴로워하는 걸 보았다. 뉴머시스티스 폐렴이었다. 그는 이야기할 수 있도록 텐트 안으로 들어오라고 내게 손짓했다. 무서워진 나는 내가 텐트에 들어가도 그에게 해가 되지 않을지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연인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뼈만 남은 그의 노인 같은 손을 만지며 펑펑 울었다. 우리의 포옹은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그는 헐떡이며 내게 말했다. “네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지 마, 짐보.” 그리고 그는 꾸벅꾸벅 졸았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사람이 나를 걱정했다. 그 순간의 휴머니티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그 날이 내가 AIDS를 진지하게 느끼게 된 날이었다.

AIDS로 죽은 내가 아는 모든 남성들은 죽기 전에 근육이 없어지다시피 했다. 그걸 본 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근육을 가지기로 결심했다. 나는 덩치가 정말 커졌다. 그러기 위해 스테로이드제를 구하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군살없는 몸으로 127kg까지 체중을 불렸다. 게이 사회에서 근육질 남성에겐 유리한 점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 병에 걸리고 죽어가는 친구들이 많아지면서, 체육관과 마약(스테로이드는 기분을 변화시키는 중독성 약물이다)은 내 도피처가 되었다.

1987년에 나는 보건원(NIH)에 가서 새로 시작되는 임상 시험에 자원했다. 나는 이런 실험들이 대부분 그렇듯 새 약이 효과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적어도 나는 시간 낭비가 되는 약을 없애는 데는 도움을 주는 셈이다. 만약 이것이 ‘궁극의 치료제’라면, 적어도 감염을 늦출 수 있는 약이라면 나로선 대박인 것이었다. 나는 내게 일어났던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는 정부가 AIDS 연구비를 지원하지 않았고, 제약회사들이 시행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특효약을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던 그들은 우리 몸에 아무 화학 물질이나 막 집어넣었다. ‘약이 바이러스를 죽이고 사람을 살릴까, 아니면 그 반대가 될까?’라는 식이었다. 당시 AIDS 환자, 특히 게이들은 쓰다 버려도 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건물 10층의 병원 대기소에 들어가 둘러보고 충격을 받았다. 의자마다 죽기 직전인 것 같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들과 비슷해지리란 것을 몰랐다. 나는 다른 참가자들과 똑같은 부작용을 겪었다. 그 부작용은 역겹다고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나는 모든 관절 부위가 새빨갛게 부어올라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그 병원에 있었다. 나는 4~5일 정도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나를 진찰한 보건원장은 “짐, 이 부작용만 이겨낼 수 있으면 돼. 바이러스는 이 약을 싫어하거든.” 나는 이것은 연구를 시작할 때 약속했던 삶의 질이 아니라고 말했고, 그는 마뜩찮아 하며 나를 연구에서 제외시켰다.

지금 그 연구에 참가했던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나 뿐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깊은 외로움과 책임을 느꼈다. 나는 운이 아주 좋았다.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고, 신이 내게 타인을 돕고 가르치라는 의도를 가졌다는 게 그 중 큰 이유라 생각한다.

AIDS 치료 시약 초기 복용 때문에 내 면역 체계가 내 연골을 공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슬프게도 이로 인해, 또 운동하고 내가 즐기는 스포츠를 하고 싶었던 마음 때문에, 내 연골은 모두 파괴되었다. 디스크가 전부 없어져서 보건원 연구를 시작하기 전보다 키가 18cm 정도 줄어들었다. 지난 13년 동안 수술을 80번 받아서, 지금은 네 바퀴 보행기를 사용해야 돌아다닐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다. 개발 중인 약으로 사람들의 삶을 끔찍하게 바꾸고 AIDS 관련 약으로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로슈와 같은 제약사들이 자신들이 했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초기 연구에 참여했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면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우리 다음 세대가 경계를 소홀히 했다간 어떤 끔찍한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알길 바라는 것이 내 다른 희망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서로에게 더 착해지는 법을 익혔으면 한다. 그 당시에 우리가 가졌던 커뮤니티의 감각은 슬프게도 사라졌다.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은 애닳아하며 그리워한다.

허핑턴포스트US의 My Story Of Surviving 40 Years With HIV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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