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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 역사 최고 행복세대의 오만', 몇 가지 해명

나는 그 글에서 우리 세대 중 일부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겸손한 책임의식을 느껴야 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를 포함해 우리 세대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그 노력도 무시할 순 없지만, 사회경제적 환경에 기인한 '운'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시대는 고도성장기인데다 대학진학률이 20%도 안 되었다. 지금은 저성장시대인데다 대학진학률은 80%가 넘는다. 그러니 대학을 나온 사람을 기회란 측면에서 비교할 때 과거와 지금은 비교하기 힘들다. 사실 내가 지금 대학을 나왔다면 언감생시 대학교수 꿈을 꿀 수 있겠는가

엊그제 쓴 '5천 년 역사 최고 행복세대의 오만'이란 글이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공간을 넘어 조선, 중앙 등 보수매체까지 기사화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SNS를 주시하는 기자들이 호시탐탐 기사거리를 찾고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예기치 않은 보도였지만 결과에 대해선 불만은 없다. 그 글이 우리 청년문제를 보는 기성세대의 관점을 보정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글쓴이로서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 글을 약간 오해하는 독자가 있는 것 같아 그 글의 취지를 보다 분명히 하고 싶다.

첫째, 그 글에서 말하는 '행복세대'의 정체다. 여러 반론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베이비부머 세대 중에서도 행복을 누리며 사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우리 시대의 '일부 행복한 사람'을 '우리 세대' 전체로 일반화시켰다는 지적이다. 맞는 말이다. 내 글에서 '행복세대'는 우리 세대 중 '대학을 나와 성공적으로 기반을 닦은 사람들'에 국한된다. 결코 우리 세대 전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나도 글을 쓰면서 이 점을 의식했기에 두어 군데에서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등과 같은 수식어를 썼다. 그럼에도 제목과 내용 중 일부에서 풍기는 뉘앙스로 인해 우리 세대 전체를 지칭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 글로 그 의미를 정확히 할 수 있길 바란다.

둘째, 그 글을 쓰게 된 동기다. 나는 대학에 있으면서 많은 젊은이들의 좌절을 목격한다. 슬픈 일이다. 과거엔 그것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조건 그들의 등을 미는 것이었다. ' 약해지지 마라, 너희들은 아직 젊다, 꿈을 가져라, 너희들은 할 수 있다' 이런 식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젊은이란 원래 아픈 거니 참고 견디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충고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 충고가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들의 좌절에 공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난의 시절을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이병태 교수의 글은 내게 그런 마음을 반사적으로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 중에도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셋째, 행복세대의 '오만'의 의미다. 나는 그 글에서 우리 세대 중 일부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겸손한 책임의식을 느껴야 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를 포함해 우리 세대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그 노력도 무시할 순 없지만, 사회경제적 환경에 기인한 '운'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시대는 고도성장기인데다 대학진학률이 20%도 안 되었다. 지금은 저성장시대인데다 대학진학률은 80%가 넘는다. 그러니 대학을 나온 사람을 기회란 측면에서 비교할 때 과거와 지금은 비교하기 힘들다. 사실 내가 지금 대학을 나왔다면 언감생심 대학교수 꿈을 꿀 수 있겠는가.

때문에 지금 사회적으로 행세한다고 해서, 소싯적 고생을 강조하며 젊은이들을 쉽게 나무라거나 훈계하는 것 자체가, 보기에 따라서는 오만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나와 이병태 교수의 인생관의 차이다. 나는 그분을 잘 모른다. 그저 유명대학의 경영학자로만 알고 있다. 때문에 그분의 인생관을 쉽게 말하긴 어렵지만, 내 글을 촉발시킨 글과 그 외의 몇 편 글을 읽어보건대, 이 교수님은 나와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분은 아름다운 세상을 경쟁의 산물로 본다. 그에게 아름다운 세상이란 열심히 노력하고 땀을 흘리면 그에 맞는 보상을 받는 세상이다.

이에 비해 나는 사회적 연대를 경쟁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경쟁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될 순 없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연대의식과 양립하면서 행복으로 나아가는 수단으로 인식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아마도 나와 이 교수님이 앞으로도 혹시나 상반된 글을 쓴다면 이 같은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본다.

나는 그런 논쟁이라면 피할 생각이 없다.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이런 가치론적 논쟁이야말로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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