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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지정학적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한국 정부와 중국 전문가들은 북·중 관계를 보통의 국가 간 관계라고 오해했다. 그런 한국을 시진핑의 발언이 화성-14 못지않은 파괴력으로 기습한 것이다. 유엔 안보리에서는 러시아가 중국에 동조해 화성-14는 중거리 탄도미사일이라는 주장으로 대북제재 결의안 채택을 좌절시켰다. 한·미·일 대 북·중·러의 냉전 구도 부활이라는 비관론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김정은은 영리하다. 그는 6월 말의 한·미 정상회담과 7월 초의 함부르크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중간 시점에 맞춰 화성-14를 발사해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선언 김을 뺐다. 결과적으로 문 대통령은 수락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북한에 한반도 평화구상을 제안한 것이다.

ⓒSTR via Getty Images

2017년의 한반도는 암울하게 시작되었다.

1월 1일, 김정은, "우리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쏠 날이 머지않았다."

트럼프, "그런 일 일어나지 않는다."

7월 4일, 김정은 (트럼프 조롱하듯),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성공.

트럼프, "북한이 방금 미사일을 하나 더 발사했다...한국과 일본이 더 견딜 수 있으리라고 믿기 이렵다."

북한의 김정은과 중국의 시진핑(習近平)이 7월 들어 손을 맞잡고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김정은은 7월 4일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4 발사로, 시진핑은 7월 6일 베를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북한은 중국의 혈맹"이라는 발언을 통해서다. 두 '사건'으로 1990년대 초 냉전 종식 이후의 동북아 국가들 간의 역학관계와 안보질서가 요동을 친다. 이게 왜 그렇게 비관적인가.

화성-14의 사정거리는 8000㎞ 정도로 추산된다. 미국의 알래스카에 닿는 거리다. 거리를 2000㎞ 늘리면 로스앤젤레스, 5000㎞ 늘리면 뉴욕과 워싱턴 같은 미국 동부 도시들이 북한 미사일의 사정권에 들어온다.

미국 전문가들은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최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는 판단이다. 한국의 군 당국자들과 일부 전문가의 판단대로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에 탑재된 핵탄두가 마하 20의 속도로 대기권에 재진입할 때 받는 7000~8000도의 고열을 견뎌내는 감삭(ablation) 기술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고 해도 남은 것은 시간 문제다.

북한이 미국 본토(homeland)에 이르는 미사일을 보유한다면 미국의 한반도 방위전략이 흔들릴 수 있다. 한국은 지금 미국의 핵우산을 포함한 확장억지력의 보호를 받고 있다. 북한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핵·미사일 능력을 가져도 미국은 로스앤젤레스·시카고·뉴욕·워싱턴을 북한의 핵공격에 노출시키면서까지 동맹국 한국 방어의 공약을 지킬 것인가. 이것이 화성-14가 제기한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화성-14를 게임체인저(game-changer)라고 한다. 안보게임의 틀을 완전히 바꾼다는 의미다.

한국 언론의 주목을 덜 받은 시진핑의 북한 혈맹론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시진핑을 자극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문' 제6항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 양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규범에 기초한(rules-based order) 질서를 유지하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공조해 나갈 것을 확인했다...." 중국의 민감한 반응이 충분히 예상된 도발적인 문구다.

중국은 2010년 이후 남중국해를 '핵심적 이해'의 지역으로 간주한다. 그때부터 미국도 이 해역의 항행의 자유 원칙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중국과 남중국해의 섬(島嶼)들에 대한 영유권을 다투는 아세안 국가들을 움직여 항행의 자유권을 존중하는, 국제법 수준의 구속력 있는 행동규범(code of conduct)을 만들려고 몇 번 시도하기도 했다. 중국은 남중국해의 바다를 메워 인공섬을 만든다. 인공섬 위에 군용 활주로를 만들고 인공섬을 기준으로 12해리(약 22㎞)의 영해권을 주장한다. 미국은 중국이 남중국해를 '중국의 카리브해'로 만들려 한다고 경계한다.

20세기 지정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해퍼드 매킨더의 황화론(黃禍論)은 우리 귀에 익다. "중국은 세계의 자유에 황화가 될지도 모른다. 거대한 대륙의 자원에 더해 해양의 정면(front)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러시아가 갖지 못한 우위성이다." 백인우월주의 냄새가 짙은 매킨더의 불길한 예언이 현실이 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지역의 '규범에 기초한 질서 유지'에 동의한 결과 한국은 남중국해 분쟁의 격랑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

시진핑이 북한 혈맹 발언을 한 다른 하나의 이유는 미국이 제공했다. 트럼프와 시진핑은 지난 4월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정상회담에서 열정적인 화합과 협력의 탱고를 췄다. 트럼프는 시진핑이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을 포기시키기에 충분한 압박을 가할 것이라고 믿었다. 회담 분위기가 그랬다. 그러나 시진핑은 김정은을 견제하지 않았거나 못했고 트럼프는 시진핑에게 실망했다. 마러라고의 미·중 밀월은 3개월 만에 파경을 맞았다. 트럼프는 네 가지 조치로 시진핑에게 수모를 안겼다. (1)국무부 연례 인권보고서가 중국을 최악의 인신매매국 지위로 떨어트렸다. (2)국방부가 항행의 자유권을 행사한다는 구실로 남중국해 파라셀(西沙) 군도의 작은 섬 트라이튼을 기점으로 한, 중국이 주장하는 12해리 영해로 구축함을 통과시켰다. (3)국무부가 대만에 14억 달러 상당의 무기 판매를 승인했다. (4)재무부가 북한 탄도미사일 개발을 지원한 단둥은행에 제재를 가했다.

한국 정부와 중국 전문가들은 북·중 관계를 보통의 국가 간 관계라고 오해했다. 그런 한국을 시진핑의 발언이 화성-14 못지않은 파괴력으로 기습한 것이다. 유엔 안보리에서는 러시아가 중국에 동조해 화성-14는 중거리 탄도미사일이라는 주장으로 대북제재 결의안 채택을 좌절시켰다. 한·미·일 대 북·중·러의 냉전 구도 부활이라는 비관론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김정은은 영리하다. 그는 6월 말의 한·미 정상회담과 7월 초의 함부르크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중간 시점에 맞춰 화성-14를 발사해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선언 김을 뺐다. G20 정상회의 의장 성명에도 북한 문제는 들어가지 않았다. 외국 경험이 없는 문 대통령으로서는 괴팍한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을 무난히 치렀다. G20 다자외교 무대 데뷔도 산뜻했다. 연설들도 좋았다. 그러나 김정은은 국제사회의 어떤 압박에도 굴복할 생각이 없다. 국제적 고립도 두렵지 않다. 중국이 석유 공급을 중단하지 않는 한 김정은은 꿈쩍도 않을 것이다. 중국이 원유 공급을 끊으면 북한은 러시아 원유를 수입할 생각이지만 북한의 공장·탱크·공군기들을 움직이기에는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문 대통령은 수락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북한에 한반도 평화구상을 제안한 것이다. 그가 제시한 한반도 문제의 해법 그 자체는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그는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는다, 흡수 통일도 인위적인 통일도 추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비핵화와 함께 관련 국가들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제안도 담대하고 전향적이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의심한다. 그런 북한이 체제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평화협정 없이 핵과 ICBM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외교무대 데뷔의 성공에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취중 질주'를 경계해야 한다. 워싱턴과 베를린에서 밝힌 평화구상을 서두르지 말고, 쉬운 것부터 하나하나 풀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준비가 안 된 상대에게 너무 많은 제안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은 아이디어의 낭비다. 북한의 ICBM 발사를 남의 일처럼 말하는 트럼프,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인 야망을 드러낸 시진핑, 구체적인 손익계산 없이 몽롱한 타성으로 북한 편에 선 푸틴, 핵·미사일로 강대국들을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기세등등한 김정은.... 우리는 어디서 출구를 찾을 것인가.

세상에 불변의 것은 없다. 문 대통령이 이번 정상외교 무대에서 절박한 한반도 문제를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를 느꼈다는 것은 좋은 출발이다. 한반도 문제 해결의 운전석에 앉는 것의 의미도 알았을 것이다. 북한·중국·러시아를 설득할 전략을 치밀하게 짜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백채널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캠프 밖으로 눈을 돌리면 활용할 인재는 많다. 가령 중국에 두터운 인맥과 강한 추진력을 가진 정덕구(전 산자부 장관) 니어재단 이사장, 북한 상대로는 박한식 조지아대학 명예교수와 토니 남궁 박사가 그들의 일부다. 외교 당국자들은 "외교는 우리가 하는 것"이라는 낡은 생각에서 나오는 백채널 무조건 배척의 태도부터 버려야 한다. 북한 핵·미사일과 한반도 평화는 고차방정식으로 풀 복잡한 국제 문제다. 미국은 중국을 더 강하게 압박하고 한국은 북한과 일단 대화의 길을 열어야 한다.

사람이 문제다. 독일의 빌리 브란트에게는 에곤 바, 헬무트 콜에게는 호르스트 텔칙이라는 발군의 전략가가 있었기 때문에 동방정책과 통일외교를 성공적으로 추진해 통일을 이뤘다. 헨리 키신저가 있었기에 닉슨은 미·중 관계에 돌파구를 열어 역사의 새 장(chapter)을 썼다. 일본에서도 1890년 이나가키 만지로라는 외교관이 『일본과 태평양』이라는 영문 저서에서 일본이 호주와 제휴해 남북 해양 수송로를 확보하는 해양국가 전략을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그 지정학적 비전이 놀랍다. 19세기 말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 혼란기에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결하는 것이 조선의 나아갈 길이라고 제안한 『조선책략』을 쓴 것도 일본 주재 청국 외교관 황준헌이었다. 미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조지 케넌을 국무성 정책기획국장에 발탁해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옆방에 집무실을 만들어 줬다. 그 방이 소련 봉쇄론뿐아니라 전후 유럽 부흥의 초석을 놓은 마셜 플랜의 산실이 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한국에는 그런 전략가들이 없는 것인지, 있는데 기용하지 않는 것인지 깊이 성찰해 봐야 한다. 수직적 관료조직이 체질화된 외교참모들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지금의 위기를 고차방정식으로 풀어 나갈 지정학적 전략개념을 가진 캠프 밖 창의적인 인재들, 외교부 내의 아이디어와 의욕 넘치는 신진기예들을 4강 상대의 평화·통일 외교전선에 총출동시키는 것이 어둡고 우울한 한반도에 희망의 빛을 비추는 길이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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