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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앞에 열중쉬어

꼰대의 연대기는 끝이 없다.

  • 김학선
  • 입력 2017.07.11 11:57
  • 수정 2017.07.11 12:44
ⓒ뉴스1

이대호와 오재원. 2017년 6월23일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 두산-롯데 경기. 롯데가 1:9로 크게 지고 있던 9회초 오재원이 1루 주자 이대호를 태그아웃하면서 경기는 끝났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이대호는 오재원을 불러세웠다. 1루에 공을 던져 아웃시킬 수 있는 걸 굳이 자신의 몸을 글러브로 태그했다는 거다. 몇몇 이들은 태그하지 않고 1루로 공을 던지는 게 그놈의 '불문율'이라 했지만 30년 넘게 야구를 봐온 나로선 그런 불문율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냥 '선배'의 기분이 나빠진 것뿐이다. 오재원을 불러 훈계하는 이대호의 옆에는 동료 최준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함께 서 있었다.

최준석과 진갑용. 2009년 6월13일 대구 삼성-두산 경기. 2루 주자 최준석은 다음 타자 손시헌의 중전 안타 때 홈까지 내달리다 포수 진갑용과 충돌했다. 여기까진 흔히 보는 홈 충돌 상황이다. 그 뒤 흔치 않은 장면이 연출됐다. 진갑용이 화난 표정으로 최준석에게 때리는 동작을 취한 것이다. 120kg 거구 최준석은 '선배'에게 연신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사과했다. 진갑용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두산 더그아웃까지 가 화를 냈다. 최준석은 경기가 끝나고 전화로 다시 한번 사과해야 했다.

진갑용과 유희관. 2013년 7월6일 잠실 두산-삼성 경기. 투수 유희관은 7회초 타자 진갑용에게 79km 슬로 커브를 던졌다. 공은 볼 판정을 받았지만 진갑용은 왼손을 허리에 짚고 유희관을 노려봤다. 자신을 농락했다는 표정이다. 유희관이 슬로 커브를 처음 던진 것도 아니다. 유희관은 가끔 아주 느린 '아리랑볼'을 던져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았다. 슬로 커브는 일찌감치 장호연·정민태·정민철 같은 리그 에이스들이 사용하던 구종이다. 기분 나쁠 이유가 없었다. 중요한 건 '선배' 진갑용이 기분 나빴다는 점이다. 경기가 끝나고 유희관은 진갑용에게 사과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유희관과 김하성. 2016년 7월7일 잠실 두산-넥센 경기. 2루타를 치고 나간 김하성에게 유희관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무언가를 지적했다. 김하성이 2루에서 사인을 훔쳐 타자에게 수신호로 알려준다는 항의였다. 물론 근거는 없었다. 그저 느낌적 느낌이었다. 2루타를 맞아 기분도 나쁜 참이었다. 신경전 뒤 2루 주자 김하성은 '선배' 유희관의 지적에 아예 손을 뒤로 한 채 열중쉬어 자세로 있어야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꼰대질. 앞의 사례 가운데 마지막 희생자(?) 김하성은 1995년생 유격수로 20홈런을 칠 수 있는 초특급 유망주다. 앞으로 20년 가까이 한국에서 그가 해야 할 야구는 이렇다. 2루에서 3루로 뛰어가는 선배 주자를 기분 나쁘게 태그하면 안 되고, 홈에 선배 포수가 지키고 있으면 부드럽게 다가가 아웃당해줘야 한다. 좀더 경력이 쌓이면 느린 커브를 던지는 후배 투수에게 다짜고짜 화낼 수도 있고, 2루 후배 주자에게 사인 훔치지 말라며 괜히 트집 잡을 수도 있다. 이런 게 과연 야구인가? 1점을 얻기 위해 홈을 막는 포수를 몸으로 밀어붙이고, 타자의 타이밍을 뺏기 위해 치열한 수싸움을 해야 하는 야구가 나이 앞에선 열중쉬어 해야 한다. 프로 '선배' 야구 출범 36년, 꼰대의 연대기는 끝이 없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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